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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첫 김밥말이
2019년 11월 21일 17시 16분  조회:764  추천:0  작성자: 류재순

 
나의 첫 김밥 말이
류재순
 
나라마다 그 나라 음식문화의 대표성적 간식이 있다. 미국엔 햄버거, 일본엔 타코야끼,( 요사카 지방) 중국의 월병이나 탕후루, 프랑스엔 크레이트, 이타리아엔 아이스크림…
그리고 한국엔 한국인에 의하여 향유되고 한국인의 풍토에 맞게 재창조 변형되어 국민간식으로 자리매김한 맥심커피, 신라면 등이 있으며 건강식품으로 더욱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김밥일 것이다.
반듯하게 김밥용 김 한 장을 놓고 한 주걱 밥을 골고루 펴 놓은 후 단무지, 햄, 계란, 시금치, 당근, 어묵, 우엉…등 몇 가지 가능한 재료들을 밥 위에 모둠 놓기를 한 후 두루루~ 말면 김밥이 된다. 특히 지금은 가끔 냉장고 내용물들을 정리하며 쓰다 남은 식 재료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초 간단하게 김밥 말이를 하는 것도 주부들의 지혜다. 특히 야채를 잘 안 먹는 애들도 여러 야채를 듬뿍 넣고 치즈를 살짝 끼어서 만들어 주면 해맑은 얼굴에 입이 터지는 듯 즐겁게 먹고 있으니 근간의 웰빙 열풍에는 더욱 엄지 척이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한국에 와서 이런 초 간단 국민간식-김밥 작식법을 몰라 잊을 수 없는 수치와 곤혹을 치룬 적이 있다.
그 속에 파묻힌 아프고 아름다운 한 토막의 추억은 그 후 나의 인생길에서 가끔은 속이 뒤집히고 머리에 뿔이 나려는 순간이 올 때마다 가슴의 열기를 식히고 마음을 따뜻이 잡아보며 바른 처신의 길을 찾아보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1990년 대 말의 일이었다.
중국을 떠나 김포공항에 내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알려 준대로 ‘직업소개소’를 향하였다. 땀을 줄줄 흘리며 두 손에 이삿짐 같은 큰 트렁크 두 개를 밀고 들어서는 나를 본 직업소개소 소장 아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공항에서 내려 바로 오는 길이며 당분간 거처 할 자리가 없으니 숙식 제공이 되는 일자리를 가능한 빨리 구해 줬음 한다는 뜻을 밝히었다.
소장님은 중국에서 무슨 일을 했으며 한국에서 일을 해 본적이 있느냐 물었다.
그때 나는 비록 두 번째 한국행이었지만 정작 일을 하러 오기는 처음 이였다.
한번은 내 소설집을 출판한 서울의 모 출판사의 초청으로 고작 며칠 서울에 머물다 간 것이 전부였고 이번이야말로 서울에 일가친척 하나도 없이 처음으로 생계를 위해 무작정 ‘돈벌이’행차로 달려온 셈이다.
그때만 해도 서울엔 ‘불법체류’로 숨어서 일하는 친구가 둿 있긴 했지만 그들의 처지도 처지인지라 날 보고 돈도 벌기 전에 셋집은 얻을 수 없으니 무조건 짐을 가지고 숙식 제공하는 일터를 직접 찾으라는 것이었다.
한국 일에 초보이며 그것도 바로 숙식 제공하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나의 뜻에 소장 아저씨는 머리를 설래설래 저으며 난처해하였다.
아무튼 당분간은 그리 쉽지 않을 거라며 어딘가에 가서 며칠 쉬며 소식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제야 이 두서없고 막무가내인 자신의 경솔한 행차의 황당함을 침통히 느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다급히 울리며 소장님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 김밥집요? 지금 당장요? 사람이 있긴 한데 초보여서…”
보아하니 저쪽은 다급히 인력이 수요 되는 지라 두말없이 빨리 보내라는 소리만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소장 아저씨가 지하철 로선을 가르쳐 준대로 두 손에 짐을 들고 그 김밥 집을 찾아 갔다. 찾아 간곳은 김밥 프렌차이즈, 체인점인데 내가 문어귀에 들어서며 보니 점심시간이여선지 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 밖에서부터 길게 줄을 서 대기하고들 있었다.
내가 손님들 속을 비집고 식당에 들어서 주인을 찾았다. 어깨 너머로 긴 생머리를 가뜬히 묶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내 앞에 섰다. 중키를 좀 넘는, 살짝 통통한 아주 균형 잘 잡힌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사슴같이 순진해 보이는 눈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식당 사장님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너무 앳된 모습에 나도 놀랐고 큰 짐을 들고 이 좁은 식당에 일하러 온 나를 보고 그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국에서 방금 들어온 초보란 말에 또 한 번 놀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엔 아직 교포일군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였다. 잔뜩 실망스런 표정이었지만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인지 빨리 저쪽 김밥 싸는 아줌마 옆으로 가서 같이 일을 하라고 하였다. 자그마한 김밥 가계에 손님까지 꽉 차니 가져간 짐을 어디에다 놓고 일을 시작한담? 내가 겨우 주방 한끝에 자리를 찾아 트렁크 두 개를 놓고 나오며 보니 주방 일꾼들은 물론, 직원들 모두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지금 생각하니 그때의 그 광경 내가 봐도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내가 김밥을 전혀 쌀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정을 이미 직업소개소 소장 아저씨께 말했으니 허드레 일이나 시키는 줄 알았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는 중국 동북쪽에 쭉 살아 온 나에게 그때까지 김밥이란 너무 생소한 음식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후에 들은 얘기지만 서양인들은 물론 중국이나 동남아 많은 국가들에서도 김밥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음식 문화차이 때문에 웃지 못 할 사건도 발생한 적이 있었단다.
2차 대전 중 해안 지방에 있던 일본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김을 떼서 배식 한 적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전쟁 재판이 벌어졌을 때 포로학대의 근거로 ‘검은 종이’를 강제로 먹였다는 죄목으로 채택 된 적도 있었다 한다. 물론 내 세대에 와서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국과 작은 왕래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김밥이란 이름과 개념을 알게 된 것에 불과 하였으니 첫 일터가 이런 자리란 것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김밥아줌마 옆에 다가가 ‘흉내’를 내보려 하였다. 그런데 그 아줌마 김밥 싸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도무지 시늉도 낼 수가 없었다. 김 한 장을 척 놓고 잽싼 솜씨로 밥 한줌을 쭉 깔아 펴드니 어느 결에 여섯 가지 재료를 스치듯 한 손에 모둠 놓기를 하면서 휙 하고 한 번에 말아버리니 김밥 한 줄이 되었고 칼을 손에 드는 덧 하더니 한줄 김밥이 토막토막 완성이 되었다.
그의 ‘히든카드’를 발견하려고 전신의 거미줄 같은 신경세포를 몽땅 곤두세워 눈 한번 깜짝 못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 한 장을 앞에 놓고 밥 고루 펴기가 그렇게 힘들었고 여섯 가지 재료를 하나하나 집어오는데도 한참, 두 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김 속에 말아 넣는데도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진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속이 바질바질 타고 있는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우둔한 여자란 것을 심심히 느꼈으며 줄 서있는 손님들을 바라보는 내 이마에선 땀이 방울방울 돋아났다.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김밥도 쌀 줄 몰라요?”
같이 일하는 아줌마가 버럭 화를 냈다. 하긴 김밥하면 한국의 대표적인 식사대용으로 집집마다 싸는 가장 보편적인 초 간단 레시피니 한국 아줌마로서는 도무지 리해가 안될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 직장의 어떤 일도 다 이것보다 훌륭히 해 재꼈던 일이 떠올랐다. 사람은 이렇게 바보가 되는 구나…
옆에서 호통을 치면 칠수록 내 손은 점점 더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깔끔히 말고 또 말아놓은 후에도 터지지 않게 한 칼에 또박또박 잘라놓기가 쉽지 않았다. 요령이 없다보니 김이 잘리는 것이 아니라 칼에 눌리어 김밥이 썰려질 때 마다 안의 내용물이 분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김밥 옆구리가 터졌다는 말은 일이 안 될 때나, 분위기 파악 못하고 주제에 맞지 않는 말을 마구하거나 엉뚱한 소리를 할 때 쓰이는 말이란 걸 후에 알게 되었다. 비록 비유의 말이지만 그 모양새의 황당함은 충분히 표현이 된 것이다.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후끈거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옆 아줌마가 참지 못하고 또 소리쳤다.
“사장님, 나 이 아줌마하고 같이 일 못 하겠어요. 나 혼자에게 일이 다 밀려 있자나요. 도대체 뭣 하러 여기 왔는지 모르겠네요!”
휴, 김밥 모양도 모르고 살았던 우리 사정을 그가 어떻게 알랴! 나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앳된 사장아가씨가 달려왔다.
“전에 김밥 싸 본적이 없으세요?”
“네, 제가 살던 고장에서는…”
죄책감에 말이 목에 막혀 나가지 못 했다.
“쳇, 소개소에서는 저런 사람을 왜 보냈데. 소개비만 받으면 그만인가!”
“그만 하세요.”
그 아줌마에게 조용히 한마디 던진 사장 아가씨는 잠간 멈춰 있는 덧 하더니 그 바쁜 와중에도 내 손을 잡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터지지 않게 썰어내려면 김밥을 적절하게 잡고 김밥 바로위의 약간 뒤쪽으로부터 시작해 칼을 내리면서 몸 쪽으로 당겨 온다는 느낌으로 썰어보라 하였다.
그가 이렇게 요령을 알려주자 굳었던 내손이 풀리기 시작하며 인지도가 따라가는 듯 했다.
 
어느새 벌써 오후 2시가 다 되어가고 식당이 비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3시간이라는 황금 시간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들어가 그렇게 엉망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드디어 저녁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이 바쁜 매점에서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금 시간을 나 때문에 급한 손님들이 근처 식당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많은 매출이 내려갔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직원들의 냉냉한 시선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엿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그 어린 사장님 앞에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오늘 임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젊은 사장은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앳된 얼굴에 차분하고 약간은 슬픈 표정 같은 것이 흐르는 듯하였다. 그녀는 조용히 내손을 잡았다.
그 손에는 5만원이 쥐여져 있었다. 일당 배당이 얼마 안 되는 그때는 큰돈이었다.
“괜찮아요. 금방 오셔서 고생이 많으실 텐데, 다 잘 될 거예요.”
그리고 종이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자기 고모가 운영하는 고기 집인데 그곳은 숙식도 제공되니 일단은 먼저 그 식당에 가서 설거지 하는 일을 하며 차차 다른 일들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었다. 쪽지에는 전화번호와 소개하는 자기 이름까지 뚜렷이 적어 주었다.
아직은 이 세상 속세를 잘 알 것 같지 못해 보이는 어린 사장님 앞에서 뜨거운 것이 눈앞을 가려 이모뻘쯤 되는 내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파란만장 했던 한국 디아스포라 삶에서 많은 것을 착실히 하나하나 배워 나가며 자신을 성숙시켜 나갔다. 물론 나도 한국사람 부럽지 않는 김밥 말이 ‘스타’가 되었다. 그 한걸음 한 걸음에는 세속에 때 묻지 않은, 그때의 그 앳된 사장의 얼굴이 항상 어른거렸다.
 
2019, 8, 20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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