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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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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춘기
2019년 11월 21일 17시 24분  조회:498  추천:0  작성자: 류재순
나의 사춘기
류재순
 
가끔,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사춘기를 떠올려본다.
그때마다 나의 열 한 살의 기억과 열다섯의 실수가 참을 수 없는 아픔으로 가슴을 찌른다.
나의 아버지 나이 열아홉에 내가 태여 났다고 한다. 양쪽 부모님들의 수선으로 일찍 장가를 간 아버지는 한 달도 채 못 되어 부모님과 어린 색시를 남겨놓고 전방으로 떠나셨단다. 게다가 열네 살 밖에 안 되는 유일한 남동생 하나까지 부모 몰래 빼돌려 같이 전방으로 가셨다고 한다. 바로 그해 내가 태어났는데 열일곱 어린 나이에 나를 낳은 어머니는 출산과 함께 나를 할머니 품에 안겨놓고 돌아 가셨다니, 나는 젖 한 모금 못 빨아보고 할머니 손에서 미음을 먹으며 자랐다.
딸은 못 낳아보고 아들 형제만 낳고 어떻게 단산이 되어버렸던 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 다 전방으로 ‘도망’가고 며느리마저 잃어버린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지시었다. 그런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나는 깊은 아픔이었으며 극진한 ‘ 사랑 선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은 물론, ‘엄마’란 이름을 입에 올려보지도 못했던 나는 다른 애들은 왜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를까? 하는 착각의 유년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소문난 ‘서울 댁’이었다. 비록 고향인 서울을 떠나 만주 땅에 힘겹게 정착하면서도 서울식 긴 흰 앞치마를 항상 앞에 두르시고 제비 같이 반들반들한 자그마한 까만 머리통에 짧은 은비녀를 가뜬히 찌른 그 뒷모습은 좀 작은 키와 단아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키가 껑충하고 구레나룻이 시커먼 할아버지는 예쁜 할머니를 바라보며 늘 싱글벙글 하셨고 그 힘든 농경 일에도 집안 앞뒤일 다 잘 처리하시며 서울의 어린 시절에 익히지 못했던 한글을 ‘야학’까지 다니는 배움을 가지며 열심히 사는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안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할머니 등에서, 할머니 뒤꽁무니에서 항상 으썩거리며 어린 강아지처럼 붙어 다녔다.
 
그렇게 나는 열한 살이 되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공부할 수 있는 작은 독방 하나를 내 주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른 큰 방을 써셨다. 밤에 잠을 자다보면 나는 아무리 곤하고 오줌이 마려워도 아침까지 꾹 참고 일어나기 바쁘게 시원하게 한바탕 해소하군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어떻게 된판인지 한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깊이 잠 들 수가 없었다. 자기 전에 물을 너무 많이 들이켰던 모양이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오줌이 곧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급기야 방 미닫이문을 확 밀어 제치고 요강이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 뛰어 들었다.
이때 내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발견됐다.
맨 엉덩이를 다 내놓은 할머니가 요강에서 급히 일어서는데 배꼽아래 이상한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놀래서 무심결에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는데 눈을 감고 자고 있는 줄로만 여겼던 할아버지가 멀쩡히 눈을 뜨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할머니 쪽을 바라보시던 중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할머니가 저렇게 남자인 할아버지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맨 엉덩이를 가리지 않고 있다니? 그 시절의 순진한 열한 살 소녀의 머리로서는, 그것도 남 여구별에 예민하기 시작한 사춘기에 갓 들어선 나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의 ‘최고’였고 마을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아름다운 형상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해 있었고 할아버지는 외려 싱긋이 웃고 계셨다. 나는 그것이 더 이해가 안 갔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요강을 두 손으로 내 방에 옮겨놓고 방 미닫이를 찌르륵 ‘쾅’하고 닫아 버렸다.
아마 그렇게 근 일 년을 할머니의 그 창피했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어 더는 자랑할 만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나만의 ‘비밀’에 묻혀 있었다. 내가 할머니로부터 소원해지고 괜히 트집을 잡으며 말대꾸하는 나를 보고 하루는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너도 이담 커서 결혼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시작한 나의 사춘기는 열다섯에 이르러 최고봉에 이르렀다.
반의 한 남학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연애’ 편지를 받았다. 당혹감으로 나는 일부러 그 남자애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남자애는 방과 후 여유가 생기면 우리 집 뒤 담장 밖에서 집 창문가를 바라보며 배회하기 일쑤였다. 무언가를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할머니가 그 남자애 앞으로 찾아가 냉철히 손을 휘저으며 무슨 말을 하는 것을 나는 방안에서 창문으로 보게 되었다.
“제가 반장인데요, 부반장과 반의 일을 좀 상의할게 있어서요.”
그건 학교서 상의 할 일이지 왜 방과 후 집까지 찾아오느냐고 할머니의 야멸친 언성이 들렸다. 할머니의 매서운 눈빛에 그 남자애는 너무 무참하여 귀뿌리까지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곤 급급히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사실 그 남자애는 반에서 여자애들의 인기 남이었다. 할머니에게 된 무안을 당한 후로는 반에서 나와 눈 맞추기도 피하는 듯했다. 나의 마음은 무겁고 답답했으며 할머니가 꼭 그렇게 내쫓아야 했을까 달통이 안 되었다. 갑자기 어디론가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까지 무시로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병원 간호사로 있는 나의 절친한 친구가 생리를 하는 나에게
생전 보지 못했던 하얀 병원용 거즈로 만든 깨끗한 생리대 두 개를 주며 엇갈아 빨아가며 쓰라고 주는 것이었다. 자기 엄마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하였다. 그때는 생리대라는 것을 파는 것이 없어서 우리 여자애들은 신문지를 둘둘 말아 팬티 속에 끼워 넣기도 했고 헌 헝겊 조각을 무어 대충 생리대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헌 헝겊도 많지 않던 시대여서 한번 생리가 올 때면 푹 젖은 그것을 온종일 끼고 있다가 밤에 급히 씻어 말려 이튿날 학교 갈 때 쓰는 게 보통이었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 불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말하자 할머니 시대는 이것도 없어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를 둔 그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갑자기 몇 년 전 밤의 요강 사건, ‘남자친구’ 내쫓던 일, 생리대도 잘 만들어 주지 못 하는 일, 그리고 어렸을 때 가끔 회초리로 사정없이 내 장딴지를 후려치던 일… 많은 일이 삽시에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한족 농촌 생산 대에서 수전 기술원으로 일하고 계시는 할아버지께
(원래 농사를 짓던 분이시라 시가지 생활에 적응이 안 되어 중국 촌에 가셨다.) 이튿날 떠날 준비로 무언가 서두르고 있었다. 첫 행차도 아닌데 나는 괜스레 이름 모를 화가 치밀어 오르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와?”
“글쎄, 챙겨드리고 될수록 빨리.”
“나도 엄마가 키웠음 좋았을 거야, 왜 할머니야?”
번연한 생활을 나는 이렇게 당치도 않는 트집을 잡으며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할머니의 손에 잡혀있던 물건 떨어지는 소리가 ‘털렁’ 들렸다. 할머니는 멍한 눈길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셨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한마디 하셨다.
“그랬구나, …”
사실 친척들은 늘 할머니가 외동 손녀 하나를 너무 애지중지 손 받들어 키워서 앞으로 좋을 게 없다고 하였고 친구들은 동네에서도 제일 똑똑하고 대단한 할머니가 있다고 부러워하였다.
“재순아, 할머니가 좀 놀랬다. 네 어린 것이 지금까지 엄마 생각을 그렇게나 하고 있었구나.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네가 먹고 싶어 하는 물고기 한번 제대로 해먹이지 못했구나.”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돌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싶었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사람이 죽으면 눈을 감게 된다며 어느 날인가는 할머니도 저 세상 사람이 될 터이니 우리 재순이를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쉬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가끔 몸져누우실 때면 자그마한 손으로 성냥개비를 들고 할머니가 눈을 감게 되면 눈꺼풀을 받쳐 놓을 준비를 하는 어리석은 응석 등이었다. 할머니가 내 옆을 떠날 수도 있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알고 컸다. 그런데 왜, 어디서 그런 당치도 않은 거짓말과 오기가 생겼을까?
이튿날 내가 방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자그마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흰 밥상보를 열고 보니 처음 맡아보는 군침 도는 냄새, 이름만 들어보던 조기 생선찜이 놓여 있었다.
 
며칠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돌아오셨다. 그때야 나는 나에게 조기찜을 해놓고 떠나시던 날이 바로 할머니의 육순 환갑날 이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그때 전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연대까지 졸업하고 새 가정을 이루며 중학교 교직으로 있다 ‘우파’로 몰려 어디에선가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도 유지하기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금쪽같이 키우는 손녀마저 ‘배신’을 하며 외로운 환갑날을 보낸 할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내 마음속에 깊이 묻혀있는 사춘기 시절의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은 항상 아픈 피고름으로 괴여진다.
딸 삼아 손녀 삼아 모든 면에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 혼신을 다 하고 하늘나라에 가신 할머니가 만약 나의 이 속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할머니~!
 
 
2019 , 11 , 13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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