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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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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향연
2019년 11월 21일 22시 16분  조회:762  추천:0  작성자: 류재순
가을의 향연
류재순
조용한 멜로디가 내 귀가로 흘러들어 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6시, 시원하고 경쾌한 기운이 밤새 답답이 숨을 죽이고 있던 내 폐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스며든다. 매일 시작되는 나의 아침 산책ㅡ빠른 걷기 운동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다리 아래 영등포 수변 둘레길, 도림천 둘레길에 이르게 된다.

가을이다. 9월의 가을은 아직은 완연한 황금빛과 단풍 빛이 아닌 녹색의 미련들을 머리에 버티고 있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생긴 황갈빛이 녹음의 원숙이 남아있는 그 독특한 진녹색을 헤치고 언뜻언뜻 선을 보이고 있다. 발효된 내음 같은 것이 저 멀리 숲속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다가와 계절의 발걸음 소리를 노크 한다. 짙은 보랏빛, 연두빛 , 핑크빛 새벽 나팔꽃들이 싱싱히 피여서 길 량 옆을 수놓고 있다. 저 야트막한 오른쪽 둔덕길에는 넓은 부영 꽃 밭, 그리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길 량 옆 흐트러진 풀숲에서는 타닥타닥 무엇인가 여물어 가는 소리, 채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걷는 산책길 옆 자전거 도로는 벌써 자전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비둘기들의 구구 소리, 까치들의 깍깍 반가운 소리와 모습이 자전거 행렬 속에서 흩어졌다 모였다 바쁜 날개 짓을 한다.
“ 누님, 좋은 아침!” 칼칼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젊은 아저씨가 나에게 건네는 인사말,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아침운동에서 익숙해진 얼굴이다. 어쩐지 기분이 업그레이드 된다. 이름 모를 설레임과 즐거움을 안고 가슴을 쭉 펴고 뒤 발꿈치를 먼저 땅에 부착 시키며 제대로 된 걷기운동 자세로 활기차게 걸어간다. 생활 패턴이 각자 다른 낯설고 낯익은 사람들이 앞뒤로 스쳐 지나며 나름대로의 자태로 열심히 걷고 뛰는 행렬 속에서 나는 생명이 자기의 연장선을 위한 갈구와 분투의 소리를 듣는다.
길 양 옆의 가로수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성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기다란 녹색 터널ㅡ구로 올레길은 내가 꼭 거치는 코스다. 그곳엔 즐비한 운동기구와 다문다문 세워져 있는 시목( 诗木 ) 들이 넘 좋다. 여기에 오면 나는 동반하던 음악을 끄고 물 안개마냥 끝없이 피여 오르는 내 사색의 해양에서 유영 하게 된다. 눈앞엔 윤동주 시인의 “코스모스” 시목이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써늘이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 간다...“
나도 소녀 시절의 안타까웠던 첫 사랑을 떠 올린다.그 여운은 오랜 세월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과는 저기 걷고 있는 노부부들처럼 한번도 정답게 나란히 손을 잡고 다닌 적 이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본분과 직책을 다하며 지금의 이 가정을 지켜 왔다. 어느날 나는 약을 입에 삼키지도 못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난 어떻 하라구..” 내 입 옆에서 약을 든 손이 가볍게 떨리며 말하는 남편의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가슴이 뭉클하여 더 약을 먹을 수 가 없었다. 무심히 덤덤하게 같이 걸어 온 세월, 언제 이렇게 하나가 되였나, 그것은 분명 봄, 여름, 그리고 냉냉한 겨울도 겪었던,오랜 기간 발효된 탁주 같은 취향(醉香)ㅡ.오늘의 향연이였다
.
올레길을 내려와 다시 도림천 둘레길로 들어서는데 저 멀리에서 휠체어 하나가 다가온다. 벌써 며칠 째인가 오늘은 어쩐지 눈길이 자꾸 휠체어에서 떠나지를 못한다. 휠체어를 미는 여인의 긴 생머리가 아침 바람에 가볍게 흩으러지고 있다. 그 앞 휠체어에는 70대쯤 되여 보이는 할아버지가 힘없이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앉아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늦어진다. 오늘은 휠체어 한쪽에 예쁜 코스모스 몇 송이가 걸려 있다. 휠체어가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서서히 옆으로 지나간다.
“ 아빠, 눈 좀 뜨고 이 꽃 좀 봐요” 젊은 여인의 말이다. “ 애 데리고 매일 출근길도 바쁜데... ”
힘은 없으나 분명한 뜻이 전달되고 있는 할아버지의 말씀 이였다. 나는 금방 머리에 감이 왔다. 무엇인가 좀 더 듣고 싶은데 휠체어와 나의 간격은 벌써 멀리 떨어져 버렸다.. 이 세월에 조금은 낯선듯 한 오늘의 풍경,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또다시 스펀지마냥 무겁게 퍼져 나가는 나의 생각...진주보다 더 귀한 자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아글타글 키우느라 아빠가 보낸 그 겨울, 봄, 여름의 헌신과 고투를 생각 해 본다. 그 무게는 저 늙고 병든 몸에 무겁게 무겁게 쌓여져 있을 것이다. 그 무거움에 비해 아침마다 병든 아빠의 건강을 위해 휠체어 산책에 나선 딸자식의 마음은 어쩌면 아빠의 넓은 바다 같은 수심의 몇 방울의 무게 뿐일 수 도 있다. 그런데 어이하여 지금 이 가을 햇빛 아래서 이처럼 오색령롱하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끝없이 높고 파아란 하늘, 자갈돌 위에 돌돌 굴러가는 맑은 개천 물, 늦은 사랑에 심취되어 예쁜 끼를 한 것 뽐내는 아름다운 들꽃들, 무르익어가는 과일과 곡식, 이제 곧 불타는 단풍이 올 것이고 바야흐로 풍요로운 황금 들녘이 펼쳐 질 것이다. 이 속에는 지나간 날 언 땅을 비집고 일어선 봄 새싹들의 의지와 갈구, 한 여름의 무성한 성장 진통이 수렴 되여 있다. 정말 뿌려놓았던 모든 것이 가식 없이 결실을 드러내는 긴 장막극의 에필로그다. 나도 지나간 나의 세월들을 반추해 본다. 열차 밖의 풍경처럼 언뜻언뜻 지났던 한번밖에 스칠 수 없었던 그 매매일의 “현재”를 혹 “다음 역에서 보자”는 게으름의 빙자로 모두 무심이 흘려버리지 않았는지?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느닷없이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센티멘탈의 우수가 밀려온다. 그것은 항상 부족함의 기아를 안고 사는 인간의 상정 이라기 보다 분명 내 자신이 불충실함이 빚어낸 만회 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이다. 다시 되돌아 갈 수 있는 유턴의 신호는 인생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다는 이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는 왜 때늦은 뒷 풀이로만 되고 마는가.
복합의 멀티 맛으로 가득 찬 이계절의 특유의 칵테일이 각자 앞에 놓여있다. 가을이 선물한 내 앞의 이 찰랑이는 칵테일은 나에게 과연 어떤 맛을 선물 할 것인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해 본다. 저 넓은 들녘의 개미보다 못한 이 미소한 존재 에게도 후회 없는 삶으로 인생의 가을에 티끌같이 작은 아름다움의 향연이라도 남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20015 9 25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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