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일어나기 바쁘게 전화가 왔다. 아침식사 하러 가자는 것이다.
어제 밤늦도록 우리 재한동포 문인협회의 연변작가협회소속인 몇몇이 상주 숲 문학 18기 출판기념과 “상주 문인의 밤” 축제 열기에 오래오래 들끓었다.
상주 숲 문학회는 2002년 연변작가 협회와 자매결연하고 벌서 15년째 꾸준히 손잡고 발전해 오고 있으며 공동 작품으로 숲 문학지를 운영해 오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아오고 있는 터다. 방금 전화를 해 오신 분은 바로 숲 문학회 장 운기 회장이시다.
장 운기 회장님은 상주시 산림녹지과장직 재직 중 이신데 1998년, 숲 문학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맥 문학“ 시인으로 등단해 지금까지 한국 문인협회 (문화 개발 위원 및 경북 문협 회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다.
단단하게 생긴 중등 키에 짙은 박력감과 강인함을 가진 그의 얼굴엔 사람 좋은 웃음 가득히 우리를 데리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시원한 북어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로 와 버스에 오를 때 김 운기 회장님은 우리에게 선물 한 세터씩 손에 들려주었다. 버스에 올라 앉아 살펴보니 홍조 띤 어린 소녀의 볼따구니 마냥 발그스름하게 숙성되고 적당히 잘 건조된 곶감들이 정갈하게 줄을 지어 앉아 멋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뜻밖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곶감으로 유명한 상주에 와서 긴박했던 밤 행사를 보내고 급히 떠나다 보니 곶감 하나 못 사가지고 가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었다.
우리는 장 운기 회장님과 연신 고마운 작별 인사를 드리며 박스 속에서 말랑말랑 먹음직스러운 유혹을 보내고 있는 곶감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나는 상주에 올 때부터 이 곶감을 생각하고 있었다. 곶감은 나에게 추억이며 아픔이다. 선물 받은 곶감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귓전에 너무 익숙했던 한마디 말씀이 또다시 찾아 왔다.
“휴~ 내 살던 고장엔 이맘때면 그 말랑말랑한 곶감 맛이 기가 막혔지…”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늦가을, 낙엽 깔린 느릅나무 마당에 가마니 한 조각을 깔아 놓고 몸에 겉옷 하나 걸친 나는, 짧은 담배 대를 입에 물고 물끄러미 앉아 있는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매번 널어놓는 그 푸념을 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이 땅에 온 후 부터는 그놈의 곶감이란 것을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하신다. 그리곤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또다시 깊이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드려 훌 내 뱉으시군 하시었다. 나는 매번 할머니의 고향 얘기를 들으며 저-기 어디 남쪽나라 어느 동내에 가을이 되면 감나무에 붉은 감이 대롱대롱 달려있을 정경을 상상해 보군하였다. 생감, 단감, 그리고 숙성 시킨 곶감…할머니가 제일 좋아한 건 역시 곶감이라고 하였다. 그 졸깃졸깃하고 달큼한 곶감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끼니였고 간식이었다고 하셨다.
넓디넓은 땅에 삽만 밀어 넣어도 양곡이 된다는 신화 같은 소문에 밀려 만주 땅-동북으로 건너와 아들 둘을 키우고 이제는 손녀까지 키우면서도 아직 한 번도 그때 그런 곶감을 보지 못하셨다는 아쉬움은 평생을 안고 사시였다. 하긴 매서운 긴 겨울추위에 자리 잡고 있는 만주 땅엔 감나무도 없었고 중국 땅에 아직 시장경제가 풀리기 전이였으니 남방의 곶감이 한 작은 현성에 까지 건너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어느 해 중국동북의 겨울 시장에 정말 뜻밖에 곶감이 나타났다. 아, 이게 할머니가 그렇게 외우시던 곶감이구나! 그런데 그 곶감이란 것이 무슨 하얀 가루 같은 것에 뒤덮이여 조그마니 땅땅 바짝 말라 있어 모양조차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곶감이라니 나는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손에 사들고 부랴부랴 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내가 사온 곶감을 손에 들고 한참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한 입 입에 물다 말고 “에그, 돌덩이같이 땅땅하네!” 하시며 도로 내려놓으시는 것이었다.
그러며 또 그 남쪽 땅 고향 얘기를 시작하셨다. 뼈가 자란 그 옛 동내의 감나무 향을 다시 풍겨 놓으려는 듯, 얼기설기 엮어진 고향의 토막 얘기들이 풀려진 실타래처럼 끝도 없이 풀려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끝내 한중 수교를 기다리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고향이야기도 끝을 맺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갑자기 정신을 차리신 할머니가 나의 손을 잡고 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에겐 할머니는 엄마였다.
“너 삼촌 뼈가 조선전쟁터에서, 중국에서 뽑혀갔던 인민군인지 뭔지…그 땅에 묻혔을 텐데 이름 석 자 찍힌 열사증 ( 烈士證)만 돌아오고…아무것도 못 찾았다 하더라. 어떻게 희생 되었는지, 시체도 못 찾았다는 것이다. 같은 전역에 참가했던 수많은 어린 병사들이 그렇게 시체도 찾지 못한 체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너 아빠는 잔폐 되여서라도 돌아왔지만… 둘 다 감나무 집 울안에서 태여 났었지. 그 땅엔 다시 가 볼 수 없을가?…”
그랬다. 할머니는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꺽두머리 남편 따라 만주 땅으로 오셨고, 또 그렇게 혈기 넘치게 성장한 열 몇 살 밖에 안 된 어린 두 아들은 들끓는 세상사에 휩쓸려 약속이나 한 듯 어머니를 속이고 “애국”이란 정의로 조선 전방으로 나갔다. 할머니의 담뱃대는 둘째 아들의 열사증이 내려오던 날, 할아버지가 밤을 새우는 할머니에게 담배 잔득 담아 입에 물려주신 것이 시작이 되였다고 한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할머니가 그토록 일생을 외우시던 고향땅의 곶감 이야기 속에 뿌리 깊이 숨겨진 슬픔과 우수가 무엇 이였는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 나는 창밖의 풍경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무에서 채 떨어지지 못한, 찬바람에 얼룩진 단풍잎들이 보였다. 무슨 미련인가를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내 무릎 사이에 놓여 진 곶감 선물 박스를 응시하였다. —할머니, 천지가 변했어요, 저는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에서 정착하면서 한국 문인협회 작가들과 우리민족의 문학을 위한 유익한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눈물겨운 우리 한반도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가며 살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은 또 한국 땅에서 제일 이름 있는 상주 곶감을 선물 받아 가고 있어요. 할머니 제사상에 꼭 놓아 드릴게요! 그리고 삼촌도 이 땅 어디에선가 분명 감 향기를 맡고 계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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