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거슬러 어느 때 부터의 일이라고 그 년도를 짚기는 어렵지만 5개현이 도시 하나를 둘러싸고 무어진 이 고장 잡거지구 사람들은 산수 맑은 아름다운 송화호를 명산대천 중에서도 이름 높은 유람지로 삼고 하루에도 몇 패씩 송화호로 모여오군 하였다.
오늘도 B탄광구역에서 오는 유람버스가 흥겨운 조선민요 가락으로 녹음을 헤가르며 송화호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자그마한 B탄광구역은 이 잡거지구의 주요 석탄 생산지다. 탄광 구역에는 조선족들이 남새밭의 봉선화처럼 다문다문 끼어 살고 있었는데 김씨, 박씨, 리씨, 최씨 하며 몽땅 손을 꼽아도 불과 스무나문 집밖에 되지 않았다.
둬달 전에 남편을 따라 이 탄광구역으로 이사 온 나는 이곳 사람들과 별로 낯이 익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손목을 잡아끄는 이곳 제 민족여인들의 인정이 고마워 유람버스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 백의민족의 습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여기 잡거지구 조선족들은 일년에 한 번씩 즐거운 휴식의 하루를 마련하여 송화호로 유람을 오군 한다.
버스 안은 명절기분으로 들썩이었다. 나는 워낙 말하기도 좋아하지 않고 숫기도 있어 즐거운 복새판에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나의 앞에 앉은 탄광병원 김 원장 부인은 탄광구역의 조선족들이 다 동원되어 왔는데 유독 안경쟁이네 한집만 빠졌다며 사람이 너무 고지식하니 재미가 없다고 떠들었다. 안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요즘 시대 ‘안경쟁이’ 란 별명은 지금 상국에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이 탄광구역에서 10년 이상 산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이 모두 그저 안경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 같다.
문화대혁명의 고조가 방금 누그러진 어느 해인가 큰 키에 습관적인 좀 구부정한 어깨에 반창고로 왼쪽 안경다리를 붙여 건 중년 사나이가 가족을 데리고 이 탄광구역에 왔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이곳 조선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안경을 낀 사람으로 되었는데 그는 안경쟁이들에게 흔히 내비치는 인텔리다운 멋이라곤 전혀 없이 오자마자 탄갱 속으로 내려가 석탄을 캐는 탄부로 되었다.
그에게는 아주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많지 않은 동포들의 오락 장소에 와서는 소리를 하고 춤을 출 대신 한쪽 구석에 앉아 술만 마시고 담배만 태웠다. “아니 이 사람,이게 뭔가? 그래 도라지 타령 같은 것도 못하나? 놀음판에서 입을 봉하고 있다니?”
“난 정말 소리란 건...”
“소리를 못하면 하다못해 젊었을 때 부르던 사랑 노래라도 좋잖은가 그것도 정 못하겠으면 하다못해 어릴 때 부르던 ‘산토기 토기야 너 어디로 가니?’ 하는 것도 부르란 말이야 오락판이 다 식지 않나”
그 사람은 권하다 못해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토끼 뛰는 흉내까지 내며 진땀을 뺀다. 그러면 그 안경쟁이는 마지못해 천천히 일어나 한마디 부르곤 하는데 번마다 들어봐도 언제나 우크라이나민요 그 노래였다.
가없이 넓은 우크라이나 전야에
맑은 물이 흐르는 그 강변에
두 그루의 아름다운 백양이 자랏네
... ...
점잖은 자태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바리톤은 의외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다.
그는 노래를 다 하고는 술을 몇 잔 들이키곤 다시 입을 봉하고 구석에 앉아있군 하는데 눈가가 축축해 보이는가 싶다간 어느새 끝내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사람들이 놀라며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저 씁쓸하니 웃으며 눈물을 닦고 만다. 그래서 오락장소가 시시해진다고 사람들은 이 괴상한 성격을 가진 안경쟁이를 차츰 술좌석에 부르지 않았다.
전대미문의 중국의 그 문화대혁명은 끝내 결속을 짓고 권력을 남용하던 4인방은 무너졌으며 넓은 대륙은 모든 것을 바로잡기 국면으로 돌아 섰다. 그 나날에 사람들은 뜻밖에도 그가 연변대학 정사학과 졸업생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광무국 자제중학교에 들어가 요행 교편을 잡게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던 날, 그는 전례 없이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주름이 실리기 시작했건만 그는 옷매무시도 특별히 다듬고 반나마 빠져버린 머리도 반지르하게 빗어 올렸다. 그리고 안경 속에서 언제나 우울하기만 하던 눈길도 생기로 차 넘쳐 유난히도 빛이 났다.
그는 번마다 교수안을 온 성의를 다 들여 썼다. 하지만 모든 과목을 한어로 교학해야 하는 이 한족 중학교에서의 그의 한어 수준은 늘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러다보니 그는 속을 태우며 배워주던 역사학과를 얼마 지나지 않아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는 학교의 총무 일을 맡아 보는 말석 교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근년에 그의 얼굴은 또다시 무섭게 일그러졌다. 술좌석을 마주하면 권하지도 않는 술을 또 혼자 몇 잔씩 쭉쭉 들이키고는 눈시울을 붉히고 멍해 앉아있군 하였다.
중앙방송국에는 그와 아주 친한 동창생이 있었다. 어느 날, 북경의 그 동창생이 찾아왔다. 그날 안경쟁이는 이 기쁨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처음으로 그의 집에 술상을 차려놓고 이곳 조선족들을 다 불렀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 동창생은 이 집에 찾아 올 때 고급술이며 남방 과일들을 한 짐 들고 왔다고 한다. 했건만 주인집에서는 동내 사람들을 다 청하면서도 이름 있는 반찬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집에서 키우던 중개 한 마리밖에 잡지 않았다. 놀러오는 사람들이 모두 빈손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 오히려 주인집에서 얻어먹은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대학생이란 게 체념도 없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고 수근 거렸다. 그래도 동창생은 대학을 나온 친구가 총무 일을 하는 것은 인재를 매몰시키는 일이라면서 교육국의 아는 사람 통해 그에게 걸맞은 조선족중학교로 전근시켜 주겠다고 찾아 왔다지 않는가. 이런 고마운 친구에게 개고기를 대접하고 싶으면 살찐거로 큼직한 것을 사서 잡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절반은 얼려서 보낼 수 도 있고. 지금이야 어느 집에서나 음식을 차린다하면 물고기요 해삼이요 해서 한족식 고급 술 안주들로 스물 몇 가지씩 차려 놓는 때가 아닌가?
“그러니까 그 사람 아직까지도 그 반창고 붙인 안경을 걸고 다니지 않소?”
“하긴 그 집에 수년간 반신불수로 누워있는 상노인이 돈을 무척 쓰고 세상을 떴지만 아무튼 사람이 너무 고정하고 융통성이 없다니까. 그러게 동창생이 찾아 올 때까지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고도 총무질을 하는 거지.”
김원장 부인이 안경쟁이에 대한 말을 꺼내자 아낙네들이 앞을 다퉈 가며 이렇게 네 한마디 내 한마디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까지 끝일 줄을 몰랐다. 그들의 말을 듣노라니 우울하고 고정하고 전혀 융통성 없이 인색한, 보지도 못한 안경쟁이의 형상이 나의 머리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여보, 뭘 그리 생각하오? 풍만에 다 왔소. 저길 보오.”
남편이 일깨워 주어서야 나는 물소리 바람소리 요란한 곳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발전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 여기가 바로 북극의 유명한 전기 도시-풍만발전소로구나! 사품 치며 흐르는 송화강의 허리를 잘라 막아선 높이91M, 길이1,080M 된다는 거대한 언제, 세찬바람에 출렁이는 키 높은 물결, 가없이 펼쳐진 400리 송화호...,송화호는 실로 장관이였다.
“자-여러분, 여길 왜 풍만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풍만풍만 (風滿 ) 바람이 가득하다는 말이랍니다. 여기에 들어서자마자 난데없는 바람이 몰켜불어 제치는 걸 보십시오!”
“에끼 이사람, 아는 소릴 작작하게. 풍만이라 하니 바람 풍자를 쓰는 줄 아는가? 풍족하고 많다는 그 풍( 豊)자를 쓴다네 그러니 물이 그득 차고 풍요롭단 뜻이지.”
“핫하하!”
누군가 그 사람의 ‘박식’을 까발려 놓는 바람에 버스 안에선 웃음보가 터졌다 .나루터에 이르니 기복을 이룬 청산에 둘러싸여 아득히 뻗어간 송화호가 한눈에 안겨왔다. 장백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여서인지 송화호의 물은 유달리 맑고 푸르렀다.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호수를 둘러싼 녹음 짙은 청산이 물 위에 비쳐 들었는데 바람이 불때마다 호수면은 눈부신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은비늘을 휘뿌려 놓은 것 같다.
저 멀리 떠나가는 돛배 ,웃음을 가득 실은 유람선, 모래불의 점점의 수영수들, 구석진 곳에 까딱 않고 앉아있는 낚시꾼들, 실로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가 펼쳐진 듯 했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는 수채화를 초월한, 송화호 특유의 아름다운 대자연의 교향악으로 가슴에 가득 울려 왔다.
“아, 송화호! 내 너를 한품에 안으리라!”
누군가 나루터에 턱 버티고 서서 익살스레 소리쳤다.
“흥, 한품에 안아? 두 팔을 벌리고 들어가 봐, 그림자도 못 찾을걸!”
내가 웃고 떠드는 그들의 거동을 멍해서 보고 있는데 김원장 부인이 다가서며 귀띔해 준다.
“저 사람들은 여기에 올 때마다 어느 해인가 처음 여기로 유람을 왔을 때 안경쟁이가 시를 읊듯이 한마디 한 말을 올 때 마다 저렇게 흉내를 낸 다오. 이번에 안경쟁이는 퍽 섭섭할 걸 ,그 사람은 다른 모임에는 잘 끼지 않지만 송화호 유람 하나는 좋아 했으니까”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를 읊듯이 송화호를 품에 다 안으련다는 안경쟁이와 우울하고 인색하다는 안경쟁이는 또 얼마나 다른가? 그에게도 그처럼 풍부한 감정세계가 있는가?
우리가 탄 유람선은 거북섬을 지나 계속 앞으로 달린다. 시원한 바람이 귀밑머리를 날려주고 “처절썩 철-썩” 배전에 부딪치는 물결들이 아낙네들의 치맛자락에 물방울들을 튕겨준다. 그리고 저 멀리 낙타봉 앞에서 이름 모를 물새 한 마리가 물 우에 내리 꽂이는 것 같더니 어느결에 물고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날아오른다.
“자, 우리 오호산에 내려 점심을 먹기요!”
옛날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구렁이와 싸워 이기고 저렇게 강변에 우뚝 발을 붙이고 섰다는 오호산에 우리 일행은 발길을 내리웠다. 모래톱을 지나 풀숲 길섶으로 들어서니 송화호의 푸른 물을 끼고 선 아늑한 “별장”이 안겨왔다. 오호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장사꾼들이 가지각색으로 튀김을 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을 손에 받쳐 들고 앞 다투어 싸구려를 부른다. 물고기 음식점에 들어가면 한 가지 물고기를 가지고도 열 몇 가지 고급요리를 만들어 낸다는데 송화호에는 뛰노는 물고기가 백여 종이나 된다지 않는가. 그러기에 물고기 맛을 보려고 송화호로 유람을 떠난다는 말도 과언이 아닌 상 싶다. 나는 저도모르게 이 수천수만의 생명들을 번식시키고 키워주는 송화호의 품위는 더욱 우아해 보이고 그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리라는 감탄에 젖어 들었다.
맥주 상자며 사이다 상자를 받쳐 든 남정들과 푸짐한 음식 그릇을 해 인 아낙네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가 자리를 잡았다.
김원장 내외가 들고 온 쌍나발 녹음기에서는 빨갛고 파란 팥알만 한 불들이 줄을 지어 반짝거리더니 뒤이어 즐거운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니, 김원장네는 그전에 자그마한 녹음기 하나 있던 것 같은데 저렇게 멋진 녹음기는 또 언제 샀소?”
살림살이에 시샘 이 많은 아낙네 들이라 남의 집 재물이 붇고 주는 것은 용케도 잘 알았다.
“원래 집에 있던 건 우리 집 주인이 받은 상금으로 막내 놈이 영어 공부 하라고 사준 거고 저거야 천 여원 짜린데 일본서 들여 온 거라오.”
실팍한 엉덩이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김 원장 부인의 자랑 끼 넘치는 말이다.
“저네도 녹음기 있소? 우리 동내에서 조선집치고 안경쟁이네를 내 놓군 그래도 집집마다 좋으나 나쁘나 다 있다오!”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물질문명이 바야흐로 발전하고 있는 80년대에 와서 그 누가 수치스럽게 “우린 못 살아요. 그런 건 아직 못 샀는데요.” 라고 선뜻이 말하고 싶으련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 야 없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는 그저 듣기 좋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살 바엔 외제 녹음기 한 대 준비하려고 돈을 모으던 참인데 뜻밖으로 이사를 오느라 돈을 많이 쓴데다가 또 오자마자 금년 국채 임무를 완성하느라 몇 십원씩 떼우다 나니 계획이 파탄 됐네요. ‘
“국채소리가 나오니 하는 말이지만 우리도 저 녹음기를 사느라 돈을 싹 긁어 썼는데 글쎄 단위에서 날보고 우리 집 월급이 높다고 남보다 국채를 더 사라 하지 않소.”
남정들 쪽에서도 술이 몇 순배 돌자 음식을 차려 놓느라 분주했던 아낙네들도 제법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빨간 찔광이 술을 잔들이 찰찰 넘치게 부었다.
“그래서 어쨌소?”
아낙네들은 호기심이 번쩍 나는 모양이다.
“오늘은 이렇게 흐늘거리고 놀아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7,8년이나 기다려야 할 국채를 그리 많이 사서 뭘 하겠소? 그리고 나라의 현대화만 현대화요? 가정 현대화 건설도 해야지, 그래서 나는 우리 친척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돈을 싹 꿔줘 국채 같은거 못 사겠다고 딱 잘라 말했소!”
“야, 원장부인도 이제 거짓말이 슬슬 나오, 하하하! 그러나 어쨌든 국채를 많이 사는 사람들도 있습데, 신문에도 그렇고 방송을 들을라니 농촌의 어떤 전업호
들은 몇 천원 몇 만원씩도 샀다지 않소?!”
“그런 사람들이야 돈이 너무 많아 아무래도 저축할 돈이니 그러지. 흥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이 그렇게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 내 손에 장지진다!”
“지금은 사람마다 제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한단 말이요, 못 살아 보지, 안경쟁네 처럼 남에게 업수이 보이지나 않나!”
김원장 부인의 위력 있고 열기 띤 말소리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우리 집처럼 아직 녹음기도 사지 못했다는 안경쟁이에 대해 이상한 동정심과 의문이 갔다. 탄광에는 수입들이 높아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모두 이만저만이 아니라는데 안경쟁이 네는 어떻게 살길래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는 건가?
날 좀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보소-
누군가 소리를 하기 시작하자 돈에 대해 열변울 토하던 원장 부인은 제꺽 그 노래를 받아 부른다.
네가 잘나 내가 잘나
그 누가 잘나
구리동전 십원 짜리가 잘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 팔을 흔들며 덩실덩실 춤추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곱새춤으로 분주히 돌아가는 사람. 왁새처럼 다리를 껑충거리며 너울거리는 사람... 같이 돌아가던 아낙네들이 입을 싸쥐고 요절하게 웃는다. 실로 한족들이 대부분인 탄광에 살면서 오랜만에 노래와 춤을 즐기는 제 민족의 짙은 생활미를 맛보는 절호의 기회였다. 긴장한 사업과 고된 노동의 여가에 한번 씩 이렇게 마음의 탕개를 확 풀어놓고 들끓는 환락의 기쁨을 맛본다면야 살아도 사는 멋이 있지 않는가! 문득 나는 환락과 웃음소리 속에서 방불히 그 어느 구석에 머리를 푹 떨어뜨리고 애상에 묵묵히 잠겨있는 그 안경쟁이를 보는 듯싶었다.
“자, 주의! 사진을 찍겠습니다. 이건 채색사진입니다!”
사진 기술이 있는 나의 남편이 새 고장의 동네 분들과 처음으로 모여 노는 장소에서 자그마한 기여라도 해 보려는 듯이 사진기를 지니고 왔던 것이다.
“저-사진사, 작년에 여기 와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넣고 왔는데 사진 기술이 어떤가 보고 좀 평가를 해 보오.”
나도 나의 남편도 원장 부인의 손에서 제꺽 사진을 받아 쥐였다. 한창 음식상을 벌려놓고 먹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눈앞에는 입들을 헤 벌리고 물고기를 먹으며 마음껏 웃고 있는 뭇 사람들과는 달리 한쪽 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입을 꾹 다문 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안경 낀 한 중년 사나이의 모습이 첫눈에 안겨 왔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홀연 내 머릿속에는 학창 시절에 그처럼 익숙하면서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형상이 살아났다. 나는 도정신하여 보고 또 보았다. 비록 여위고 늙었지만 나는 끝내 그를 알아보았다. 틀림없다, 그이였다!
“아주머니, 이분의 이름이 무엇이래요?”
나는 원장 부인의 팔을 마구 흔들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게 바로 오늘 하루종일 외우던 안경쟁이 아니오? 이름은 뭔지 모르겠지만 성은 최가라 합데.“
“이분이 바로 안경쟁이라구요?!”
사진속의 이 사람이 바로 오늘 하루 종일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안경쟁이란 말인가?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나는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이분은 저의 최 준 선생님 이예요! 선생님, 어쩌면...제가 나쁜 사람 이예요 .이 고장에 이사 온지 두 달이 다되도록...” 나는 놀 멋도 먹을 멋도 없었다. 그저 날개만 돋쳤으면 당장이라도 날아가 그리운 선생님의 품에서 마음껏 흐느끼고 싶었다. 아직 인간과 세상물정에 눈을 뜨지 못했던 나의 어린 소녀 시절에 진정으로 고상한 인간의 도덕과 따듯한 인간애를 깨우쳐준 잊을 수 없는 선생님, 그러나 뜻하지 않던 혹독한 세파에 밀리워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버렸던 그이...
지금의 안경쟁이로만 알고 있는 이 고장 사람들이야 어찌 그 옛날 그처럼 존경스럽던 최 준 선생님을 알 수 있으랴! 쏟아지는 나의 눈물에 사람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 했다...
그것은 3년 재해가 전국을 휩쓸던 ,내가 초중 1학년에 다닐 때 일이다. 어느 날 오후, 우리 초중1학년 여학생들에게 종자감자 눈을 뜨는 일이 맡겨졌다. 끼니마다 말간 수수죽 물과 나무껍질 대식품 (大食品)으로 주린 배를 겨우겨우 달래던 그 기황의 나날에 감자란 말은 얼마나 우리들의 귀맛을 당겨 주었던가!
창고문을 활짝 열고 수북이 쌓인 감자 무더기를 보았을 때 우리 여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군침이 삽시에 입안에 가득 고이며 침을 꿀꺽 삼키였다. 한 자리에 모여 앉기만 하면 그 굶주림 속에서도 동심에 떠들고 까불며 웃기를 좋아하던 열 네댓 살의 소녀들 이였건만 자그마한 손칼을 들고 감자무더기를 에워싸고 앉은 그날만은 웬일인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봉하고 앉아 일만하였다.
토실토실한 감자알을 손에 들고 손칼로 감자 눈을 오려낼 때마다 차분한 감분물이 돋아나는 먹음직한 젖빛 감자 속이 눈에 확 안겨왔다. 우리는 감자무더기를 마주하고 앉을 때부터 신경을 팽팽하게 조이고 올리미는 식욕을 억제하느라고 안간힘을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 하였다. 저마다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던지 서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느라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방금 문명에 눈이 트기 시작한 우리 앳된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끔찍한 생각 이였던가.
그런데 문득 저쪽 구석에서 서걱서걱 생감자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학생들의 눈길은 일제히 그 구석으로 쏠리었다. 눈이 우묵하구 이마와 광대뼈가 좀 튀어나온, 남자애처럼 툭하게 생긴 한 여학생이 눈을 뜨고 남은 감자를 흙이 묻은 그대로 입에 넣고 어석어석 씹어 먹고 있지 않는가! 그의 눈은 깜짝도 않고 부릅떠져 있었다. 우리 모두의 숨 막힐 듯 한 찰나의 침묵- 조소, 질책? 아니, 그 선두성과 용기와 대담성은 구사일생을 주는듯한 고마움이었다! 뒤이어 여기저기서 서걱서걱하고 생감자 씹는 소리가 났다 .그 때 친구들 속에 끼여 앉아 사람을 못 견디게 괴롭히는 식욕의 시달림을 가까스로 참고 있던 나도 마침내 ‘썩-둑’하고 한 조각을 재빨리 베물어 입안에 넣었다. 그 달큼하고 향긋한 생감자 맛은 얼마나 사람을 미혹시키는 별미였던가! 맛을 보고나니 구미가 버쩍 더 동해 미처 껍질을 발가 낼 사이도 없이 입에 대고 깨물어 먹는 판이다. 여학생들의 깨끗하고 발그스름하던 입술은 모두 거무스름한 흙물이 도배질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걸 보고 웃으며 놀려 줄 새도 없다. “서걱서걱..”그저 생감자 씹는 소리만 요란스레 날 뿐이다.
바로 이때 “삐걱-”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등지고 앉은 나는 또 감자 한 조각을 막 입에 넣으려다가 마즌켠 애들이 입에 문 감자를 씹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불룩한 입들을 해가지고 공포에 질려 서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만 멍해졌다. 나는 감히 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 볼 수가 없었다.
실내는 삽시에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문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집안의 공기는 더욱 팽팽해졌다. 사람을 질식시킬 것 같은 침묵이었다. 우리들의 가슴은 그저 쿵쿵거리며 세차게 뛰기만 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드디어 문이 “쾅”하고 닫기는 소리가 났다. 곧 터질 것 같이 팽팽하던 공기는 얼어붙은 듯 주춤하다 얼마간 누그러졌다.
“얘, 방금 누가 왔었니?”
나는 문 닫기는 소리가나기 바쁘게 급히 앞에 앉은 친구에게 물었다.
“최 준 선생님이”
“엉?!”
최 준 선생님이란 말에 나는 더욱 놀랐다 .최 준 선생님이란 바로 정치과를 맡고 있는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었다. 웃음기라곤 별로 없고 나 젊은 선생 치고는 너무나 근엄한 얼굴을 가진 이 선생님을 학생들은 제일 두려워하였다.
무거우면서도 과단성 있고 분별 있는 행동거지 ,철리가 풍부하고 빈틈없이 짜인 그의 교학은 학생들의 마음을 꽉 틀어쥐곤 하여 상학시간에 누구하나 졸거나 잡담하는 현상이 없었다. 우리 반은 언제나 질서가 정연하고 학습 성적이 우수하였으며 무슨 활동에서나 우승을 따내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반 학생들은 모두 이런 담임선생님을 모신 우리 반 학생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런 엄격하고 권위 있는 선생님께 이처럼 망측한 일이 발각되다니? 강철 같은 규율과 제도를 강조하던 그 나날에 호된 처분은 둘째 치고 이 수치스러운 일이 전교에 퍼지면 우리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이튿날, 우리는 또 뜻하지 않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날 우리가 훔쳐 먹던 종자감자 속에는 송화강반의 어느 농촌에서 홀로 살고 계신다는 최 준 선생님의 할아버지네 종자 감자 반 가마니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종자감자를 구하지 못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최 준 선생님은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기황에 시달리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부석부석 누렇게 부어있었다. 집 공간에는 종자감자 반가마니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서도 종자감자를 아끼고 있는 할아버지네 형편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또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이였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봄철에 가서 그 많은 나 어린 기숙생들의 식량은 무었으로 보탠단 말인가 ... 그는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웬 일이냐? 사내대장부가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학교 애들이 너무 먹을게 없어서 ...돌아오는 해에 감자라도 심어야...”
“뭐라고? 이놈아, 네 할아버지가 배가 불러 남겨 놓은 건 줄 알어?”
얼마나 부아가 났던지 할아버지는 부들부들 떨며 손자에게 달려들었다.
“할아버지 알고 있어요. 한창 커야 할 학생들인데 너무 불쌍해서...”
할아버지 앞에서 그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할아버지도 눈물이 그렁하여 무거운 한숨을 쉬였다. 얼마가 지났던가, 할아버지는 끝내 머리를 끄덕였다. 손자가 종자감자를 자전거에 싣고 문 밖을 나설 때 할아버진 부디 한 푼의 돈도 받지 말라고 부탁까지 하였단다.
이일을 알게 된 우리는 수치와 자책감에 가슴을 쥐여 뜯었다. 정말 바늘을 삼켰어도 마음이 이처럼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 학교에서는 한 단락의 생활을 총화하는 대회를 열었다. 회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는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힌 참새들 마냥 팔딱이는 가슴을 붙안고 손등만 내려다 보며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의가 끝나 모두 다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까지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학생들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그처럼 에누리 없던 최 준 선생님이 어찌하여 여학생들의 도식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내지 않는가?
가슴을 지지 누르는 침묵 속에서 며칠이 지났다. 초조하게 기다려지면서도 어쩐지 불안스럽기만 한 정치과 시간이 드디어 닥쳐왔다.
교실문이 열리며 최 준 선생님이 들어섰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숭엄한 눈길은 안경알을 꿰뚫고 먼저 반급의 우수생인 나의 몸에 떨어졌다. 나는 가책과 수치감으로 하여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학생들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선생님은 드디어 조용히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국제 국내 정세를 풀면서 3년 연속적인 재해에 처한 우리나라 인민들에게 어느 강대국의 묵은 빚을 한꺼번에 다 갚아야 하는 엄연한 현실을 알려 주었다. 나중에 그는 눈시울이 불그스름해 지며 이렇게 말씀을 맺었다.
“동무들, 우리나라 인민들은 이를 악물고 재해를 이겨 낼 것이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 빚을 몽당 갚아 낼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상의 그 어떠한 곤란도 조국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으로 완강히 참고 견디며 전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조국이 번영 부강 해 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동무들도 더는 생감자로 주린 창자를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학생들의 마음을 꽉 틀어지는 선생님의 이 격정에 그만 책상에 엎드려 훌쩍거리고 말았다. 뒤이어 그날 감자를 훔쳐 먹었던 우리반 여학생들도 모두 훌쩍 거리기 시작했다. 아, 선생님은 우리를 이토록 이해하고 계셨다!
평시의 근엄한 표정과는 달리 최 준 선생님은 가끔 나와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책을 보기 좋아 한다지? 그래 요즈음 또 무슨 책을 보오?”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엑토르 말로가 쓴 ‘집없는 소년’을 봅니다.”
“음, 훌륭한 책이지. 그 중에서 누구의 형상이 제일 인상 깊지?”
“불쌍하고 인정스러운 레미, 선량한 위딸리스 할아버지, 충실한 벗 마찌아...”
“옳소! 나도 눈물을 흘리며 봤지. 그 불쌍한 사람들의 운명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켜 주지.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런 비참한 유랑생활의 고통을 맛 보아야 했는지 생각해 보았소?”
“...”
“그것은 그들을 한품에 안아 줄 조국이란 것이 없기 때문 이였소‘
혼잣말처럼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시는 선생님을 바라보느라니 나는 선생님이 평시에 늘 외우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장백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송화강의 젖 줄기를 물고 살아가는 자손들이요. 그것은 다름아닌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뜨거운 피줄기가 그기에 있다는 것이요.”
나는 어렴풋이나마 무엇을 깨달은 듯 싶었다.
그 후 우리가 고중 1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 정사학부를 전업했다던 최 준 선생님이 뜻밖에도 우리의 로어 과임으로 되었다.
“얘, 최 준 선생님은 마흔도 넘어 보이는데 왜 그냥 독신숙사에 있을까?”
“마흔은 뭘, 얼굴이 겉늙어 보여서 그렇지. 이제 서른이 남짓한 모양이더라. 그런데 아직도 총각이래. 호호호...”
나이 든 여학생들은 가끔 귓속말로 젊은 총각 선생님의 사생활에 대해 관심을 가지군 하였다.
“듣자니 최선생님의 외삼촌이 모스크바에서 번역관으로 있다더구나. 그리고 대학 시절에 그
나라에 갔다가 눈 맞은 처녀도 있었구.”
존경을 받는 총각선생님의 로맨스는 홀연 우리 여학생들의 흥취를 자아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최 준 선생님이 모스크바 외 삼촌네 집에서 대학시절의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 그의 마즌켠 층집에서는 박씨 같은 새하얀 이발을 살짝 드러내놓으며 미소를 보내군 하는 한 어여쁜 조선족 여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푸른 커튼에 비꼈던 마지막 석양빛이 살그머니 사라지고 땅거미가 찾아 들때면 처녀는 손풍금을 안고 조용히 창문가에 앉아 우크라이나 민요를 타군 하였다. 이 노래는 최 준 선생님이 외 삼촌네 집에 도착하던 첫날 정원에 앉아 하모니카로 불러본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쏘련 노래였다.
가슴을 파고들며 깊은 사색을 불러주는 이 아름다운 선율은 두 층집 사이에서 오래오래 사라질 줄 몰랐다.
어느 날, 등산모를 눌러쓰고 아카시아 향기가 무르녹는 모스크바의 머나먼 교외로 나갔던 최 준 선생님은 뜻밖에도 나무 밑에 서서 생긋 웃음을 보내고 있는 그 귀여운 손풍금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저물도록 들길을 걸었건만 걷는 길도 끝이 없었고 사랑 이야기도 끝이 없었다.
중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이국 청년의 뜨거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처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엔 꼭 모스크바로 돌아오세요!”
“모스크바로...아니, 내가 다시 와서 꼭 데려가겠소.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할아버지 슬하에서 커온 나는 나라 돈으로 지금껏 공부하고 있다오. 장백산 줄기줄기와 송화강반에 탯줄을 묻고 사는 우리 고향겨레들에겐 그나마 내가 수요 된다오...내 방법을 대여 꼭 그대를 데려 가겠소!”
청년은 뜨거운 약속을 남기고 돌아왔다.
돌아온지 얼마되지않아 전국적으로 갑자기 로어 학습을 중단시켰다. 갑자기 중국과 쏘련은 날카로운 정치 공세로 치닫았다. 모스크바로의 길은 완전 막혀 버리고 말았다. 우리 학교에서도 로어과를 취소하다보니 최 준 선생님은 또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퍽 겉 늙어 보였다. 꾹 다문 거무스럼한 입술, 조용히 땅 우에 눈길을 꽂고 걷는 걸음걸이, 무거운 짐에 눌리운 듯한 축 늘어진 어깨... 이 모든 것은 쉰을 넘은 중늙은이를 연상케 했다.
혹독한 시기는 끝내 닥쳐오고야 말았다. 온갖‘잡귀신’을 잡아내는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교정에 휘몰아치자 최 준 선생님은 첫 번째로 외국 특무선에 걸려들었다.
“무엇 때문에 3년재해 때 학생들이 학교 종자감자를 훔쳐 먹는 일을 보고도 비판하지 않았는가? 작심하고 기숙생들을 굶겨 죽이자는 것이었지? 그리고 나라의 보조금으로 대학문까지 나온 고아가 무엇 때문에 모스크바 처녀를 사랑했는가? 그래 모두 나라의 어떤 정보들을 따돌렸는가?”
대자보들이 학교 벽과 강당에 잔뜩 나붙었다. 그처럼 존경하던 선생님이 외국 특무라니? 그럴 수 있는가? 나는 가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가만히 선생님을 훔쳐보았다. 홍위병 학생들은 사정없이 그의 귀쌈을 쳤다. 그 바람에 선생님의 얼굴을 떠나지 않던 안경다리를 분질러 놓았다 .그 장면을 목격한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로부터 그의 왼쪽 안경다리에는 언제나 반창고가 감겨 있었다.
. 문화 대혁명으로 수라장이 되였던 전국은 싸움들을 중단하고 대 연합이 시작되었다. 혁명위원회가 성립될 때 특무 모자를 쓰고 있던 최 준 서생님은 갑자기 학교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후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역사는 다시 제 궤도에 들어섰다. 잘못된 모든 것을 다시 바로 잡으며 시정하고 검토 하였다. 조국은 지난날의 상처를 가시며 현대화의 건설에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현실은 나로 하여금 최 준 선생님의 가슴에 안겨진 상처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억울했는가를 날이 갈수록 심심히 느끼게 하였다. 그럴수록 나의 마음은 괴롭기만 했고 그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립기만 했다.
“선생님 어디 계셔요? 선생님이 조국에 바친 것은 충성과 사랑이었건만 역사는 얼마나 불공평하게 선생님을 대해 줬는가요!”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내가 갓 이사온 이 낯선 고장에서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는 안경쟁이가 바로 그 잊지 못할 최 준 선생님이었다니.
천사만감에 사로잡힌 나는 조용히 사람들의 곁을 떠나 저 멀리 끝없이 설레이는 송화호의 기슭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환락과 기쁨으로 들끓는 유람객들을 동반하고 있는 송화호의 푸른 물에도 천변만화의 풍운조화가 지나갔을 것이며 자연계의 천태만상이 비꼈을 것이리라...
뭉긋한 산등성이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의 빛을 받으며 귀로에 오른 버스는 쏜살같이 탄광 구역을 향해 달렸다.
‘선생님, 이제 곧 만나게 되겠군요! 저는 한 번도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어요. 이 고장 사람들은 선생님을 너무도 모르고 있어요. 이제 곧 저는 이 고장 사람들에게 모든 걸 얘기해 줄 거예요!“
화살마냥 튕겨가는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버스는 탄광구역의 네거리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은 여로에 물쩍지근해진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차에서 내렸다.
서쪽으로 환히 뻗어나간 광무국 중심병원 앞 큰길에서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애가 달려가다 말고 이쪽에서 차가 정거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홱 돌려 본다. 눈물 투성이 된 그 애는 김원장 내외를 보자 “와-”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빨리요, 원장 아저씨! 빨리 병원에 가 봐줘요. 우리 아버지가 아무래도 곧..”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 졌다. 짐들을 손에 든 채로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
“빨리 가보기요, 안경쟁이가 퍽 위험한 모양인데, 저 애가 바로 그 집 외동아들이라오.”
김원장 부인이 나의 팔목을 당겼다.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그만 아연해 졌다. 최 준 선생님이 위험하시다니?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만 하면서 발길을 옮길 줄 몰랐다 .뒤이어 눈앞이 캄캄해 났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병원으로 뛰였다.
그가 입원한 병실에 들어서니 사람은 벌써 응급실로 옮겨가고 빈 침대만 덩실하게 남아있었다...
최 준 선생님의 외동아들이 요 밑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더듬는 것 같더니 편지 한통과 아직도 반창고가 감겨져있는 그 눈에 익은 낡은 안경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 낡은 안경을 보노라니 나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최 준 선생님의 그 낡은 안경은 마치 사람들에게 그의 마음의 상처를 말해주고 그 어떤 원한을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모든 것을 증오하시겠지요. 세상은 왜 지금까지도 이렇게나 선생님을 불공평하게 대해 주는가요?!”
나는 부르짖었다. 탄광 굴속에서 다년간 석탄을 캘 때 얻은 풍습성심장병으로 고생하던 그가 오늘 아침 북경에 있는 그 동창생에게 편지를 쓰다가 문득 병이 발작한 것이 끝내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다. 단 한번이라도 꼭 만나보려고 그처럼 갈망하던 최 준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튿날 사람들은 15평 되나마나한 최 준 선생님네 단간 집으로 모여 들었다.
“아니, 광무국에서는 사업에 참가한지 20년씩 되는 대학생들에게는 모두 새 주택을 주지 않았소?”
하긴 이 고장에 조선족 치고는 대학 졸업생이라고는 김원장과 안경쟁이 둘뿐인데 김원장네야 언녕 설비가 구전한 아파트에 들었건만 이 집은 아직도 단간 살이었으니 이상할 만도 하다. 이 사람이야 탄갱에서 수년간 석탄만 캔데다가 학교에 복직 되었어도 결국 또 총무질밖에 못했으니...”
“아니, 굴속에 내려 간 것도 문화대혁명 땜에 억울하게 된 거라잖소. 그리고 이 사람을 제대로 조선족 중학교 같은데 가만 내버려 뒀어 보오, 쯧쯧...”
“그러게 말이요. 이리 좁은 집에서 칸막이 천을 치고 8년이나 반신불수로 누워 앓은 노인을 시중했으니...”
“참, 노인에겐 끔찍도 했지!”
흉도 많고 말도 많던 안경쟁이- 우리 선생님, 눈을 감은 후에야 조금이나마 공정한 재 평판을 듣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신변의 사람이 빛을 발산하고 있을 때는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저승길에 들어선 다음에야 양심의 천평에 저울추를 놓는가?
“참 힘겹게 살아갔소. 노인의 병 구환을 하느라 귀한 아들에게 그까짓 록음기 하나 못 사줬으니까 말이요”
“노인이 세상 뜬지도 이제 2년 남짓 됐는데 외동아들에게 그까짓 학습용 녹음기 하나 못 사주겠소?”
원장 부인만큼은 끝까지 안경쟁이를 이해 못 하겠다는 뜻이다.
“이 2년 동안 우리 아버지는 나라 돕는다고 해마다 국채 사는데 두달 월급을 몽땅 밀어 넣군 했어요!”
원장부인의 말에 아들이 발끈해서 이렇게 쏘아붙이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녹음기고 뭐고 다 싫어요 아버지만 옆에 있으면. 엉엉-”
그까짓 녹음기 때문에 아버지를 속태운 일이 후회되어 아들은 소리소리 울었다.
“뭘? 해마다 두달 월급을 몽땅 국채를 사는데 밀어 넣었다구?‘
원래도 큰 원장부인의 눈이 더 화잔등만 해 졌다. 송화호에 갔을 때 어느 월급쟁이가 국채를 자원해서 더 사는 사람이 있으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떠들던 그가 입을 봉하고 말았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 거리의 조선족들 가운데서 손에 꼽히자도 못하고 놀음 좌석에 잘 불리우지도 못하던 평범하고 수수한, 학교의 총무직 밖에 못해온 대학생-안경쟁이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들 하고 있었다.
다음날 고인은 근 20년을 소리없이 살아온 이 고장을 떠났다. 그가 조용히 누워있는 자동차 우에는 의외로 화환이 많이 덮여 있었다. 그 속에는 김원장네와 이 고장 조선족들이 특별히 만든 화환이 끼여 있었다. 그것은 다른 색 하나 섞이지 않은 눈부시게 흰 화환이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화창한 날 이였다.
유람선들이 오르내리는 송화호에 쪽배 한 척이 무거운 침묵을 싣고 조용히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쪽배 우에는 소복단장을 한 몇 사람이 골회함을 하나 안고 앉았다.
호심에 이른 그들은 정중히 함 뚜껑을 열고 송화호의 푸른 물에 묵묵히 뼈가루를 날리였다.
입을 꾹 다물고 하염없이 송화호의 푸른 물을 바라보고 있는 삼십대의 여인의 얼굴에서는 추억의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최 준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북경의 동창생에게 쓰다만 편지 구절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전번에 당신이 모처럼 찾아 왔건만 노인님이 금방 세상 뜨신 뒤여서 형편이 따라가지 못하여 푸대접해 보낸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리는구만. 그때 우리는 지난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었지 .참 때론 별난 생각이 들 때가 있다오, 나도 한때는 포부가 있고 정력이 넘치는 교원이 아니었소? 학교에서 손꼽아 주는 것으로 하여 언제나 긍지감에 벅차 있었댔지. 그러던 내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 대학생이란게 제 할 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말이요. 그래서 술만 들어가면 감상주의자가 되어 눈물을 흘렸지...참, 스피카에서 장엄한 국가가 울려 나오누만, 방송 개시곡을 국가로 고친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요. 아침저녁으로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오. 나라의 운명도 ,백성들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도 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소...
지금 나는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한 지식인에게 알맞는 위치를 찾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심심히 느끼오. 전번 편지에서 나를 원래 내가 있던 조선족 중학교로 전근되게 이미 연계를 다 해놓았다니 대단히 고맙소. 사실 이 몇 년간 내 중국어 실력도 꾀 괜찮아 졌다오. 음-헌데 근간에 내 몸이 어쩐지 신통치 않구만...
오늘 이 고장 사람들은 모두 송화호 유람을 떠났소, 송화호의 푸른 물이 그립소 .당신도 기회가 있으면 와서 송화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해 보오. 정말이지 내가 앞으로 눈을 감으면 그 곳에 안식됐으면...“
아, 가없이 넓고 풍요한 송화호의 푸른 물, 그 호심에는 사랑스런 이땅의 초목을 떠 받들고 거연히 서 있는 아름다운 청산들이 비껴 있으며 송화강반에 태를 묻고 대를 이어가는 우리 민족 자손들의 충혼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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