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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서류함
2020년 12월 08일 14시 23분  조회:578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아버지의 서류함

안금화



지난 6월의 어느 날, 나는 파가이주를 기다리는 옛집에 들려보게 되였다. 부모님이 떠나간 후로는 줄곧 비여있는 옛집이건만 작은오빠가 가꾸면서부터 터밭의 남새는 여전히 부모님의 손길이 닿은듯 예전처럼 싱싱하고 파랗게 잘 자라고 있었다. 낯익은 뜨락도 부모님들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여 낯설지 않고 정겨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버지의 손때 묻은 책상과 늘 앉아계시던 낡은 의자가 제일먼저 눈에 띄였다. 샘물처럼 솟는 그리움을 붙안고 의자에 앉으니 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젖어왔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용케도 참아오시고도 아버지는 70세도 못 넘기고 우리 곁을 떠나간 아쉬움을 남겼다.
1988년 9월, 아버지는 30여년을 몸 담고 있던 연변농업과학연구소에서 정년퇴직하였다. 다른 건 다 마다하면서도 아버지는 자신과 몇십년 함께 해온 책상과 의자만은 날라다가 웃방에 놓고 매일 그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쓰군 했다. 아버지의 책상은 먼지 한점 앉을세라 깨끗하였고 책상 우에 놓여있는 책꽂이에는 서류함 여러개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뭐가 들어있나 늘 궁금했으면서도 감히 열어보지 못했던 서류함들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서류함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서류함들에는 아버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서류함들을 확인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새롭게 읽어갈 수 있게 되였다.
서류함마다 제일 앞에는 목록이 적혀있었고 그 뒤의 내용들은 목록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 대로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앞부분에 있는 몇개의 서류함에는 30여년래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많은 업적들이 일목료연하게 정리되여있었다. 성급 과학연구성과상 3개, 주급 과학연구성과상 2개와 성급 이상 잡지에 발표한 학술론문 20편, 《대중과학》 등 잡지에 발표한 과학기술보급문장 300여편을 비롯하여 편집, 출판한 저작도 9권이나 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연변농학회 비서장으로 있으면서 중일농업기술교류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했고 북경에서 열린 중미대두(中美大豆)쎄미나르에도 참석한 적도 있었다.
한전연구실 주임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콩재배연구를 위해 농촌 출장이 잦으셨다. 토지의 선택과 그에 맞는 선종, 옳바른 파종기술, 합리적 시비(合理施肥),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 등 콩재배기술을 아낌없이 농민들에게 전수하면서 농촌경제발전을 위해 땀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총화해낸 새로운 지식들을 알기 쉽게 글로 옮겨 농민들에게 알려주었다.
언젠가 개산툰 광소에서 아버지의 강의를 여러번 들었다는 로농이 “안선생님은 누구보다 구수하고 알아듣기 쉽게 강의를 하셨죠. ‘콩박사’거든요.”라고 말씀하셔서 많이 뿌듯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맨 마지막 서류함엔 아버지의 입당서류들이 들어있었다. 입당신청서며 당조직에 바친 여러편의 사상회보며 여러 사람을 울렸다는 리력서까지…
아버지는 60세에 가까워서야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바쳤다. 솔직히 그 때 우리 가족들은 이런 아버지를 리해하기 힘들었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숱한 루명을 쓰고 농촌에까지 쫓겨갔던 아버지가 파란만장한 세파를 겪으면서 당을 향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버렸을 거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는 “내가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할 때마다 조직에서 잊지 않고 나를 불러주었고 마음껏 기량을 펼치도록 배려해주었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입당하지 못한 게 지금에 와서 제일 큰 유감으로 남아있구나.”라고 말씀하면서 자원적으로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바쳤다.
1986년초부터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도 무시로 몰려오는 통증에 멈춰서서 장딴지를 한참씩 주물군 했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은 밤낮없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맥관염이란 병이였는데 치료해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고 어느새 발가락부터 썩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비상시기에마저 아버지는 수시로 몰려오는 극심한 아픔을 참아가면서 어김없이 중일농업기술교류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하셨다.
아버지의 불타는 사업심과 병마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완강한 의력은 사람들을 경탄케 했다. 조직에서도 깊은 중시를 돌려 물심량면으로 배려해주었는데 전문인원까지 두명 파견하여 아버지를 북경 협화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허나 병이 이미 많이 악화되여 발등까지 썩은 상태인지라 아버지는 부득불 오른쪽다리를 허벅지 부위까지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버지가 파리한 얼굴로 쌍지팽이와 한쪽 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다시 우리 앞에 섰을 때 내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날의 정경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우리 집 뜨락은 아버지를 보러 온 많은 문안객들로 꽉 차있었다. 아버지는 문안객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내가 다리 하나를 잃어서 우는 거라고 생각 마시오. 당의 배려 덕분에 다시 살아나 여러분을 만나볼 수 있고 다시 함께 할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 뿐이요.”
수술자리가 아물자 아버지는 휴식도 마다하고 휠체어에 앉아 출근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굳건히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마음속 깊숙이 새겨둔 신념 때문이 아닌가 싶다. 1987년 6월 22일, 아버지의 오랜 념원이 드디여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되였다. 파란만장한 리력서를 읽을 때 아버지는 물론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우리 집은 명절을 맞이한 기분이였다.
1999년 8월 11일, 일생을 농업연구사업에 바친 아버지는 뇌하수체종양으로 69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100세 시대라 하는 요즘, 한껏 누리지도 못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으면서도 살아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애대를 한몸에 받아안은 아버지의 값진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아버지의 그 대바르고 자신감 넘치며 어떤 풍상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성품은 우리 가족이 세세대대로 물려받아야 할 보석 같은 재부임을 이 서류함을 보면서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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