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녀가장
리단
“결과가 심상치 않아요. 아마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어쩌면 좋죠?”
할아버지를 초보적으로 진단하고 난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손발이 덜덜 떨리고 울음이 막 터져나와 선자리에서 휘청거리였다. 떨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쓰러졌어요. 지금 병원에 계시는데 병세가 심각해요…”
슬픈 기별을 알려드렸으나 기실은 새까만 밤하늘에 처절하게 울려퍼진 메아리나 다름없었다. 다 아시다싶이 2019년말부터 징그러운 코로나가 우리 일상을 휘저어놓으면서 마음이 불같이 달아올라도 여느때처럼 항공편으로 당장 연길에 날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말하자면 두 발이 꽁꽁 묶인 촌보난행이였다.
사실 재작년말부터 할아버지의 병세가 나날이 기울어지는 것 같아 은근히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뇌경색에 걸려 점적주사에 기대여 살면서 시름시름 앓던 할아버지가 급작스레 쓰러진 건 나한테는 설상가상의 타격이였다. 하늘은 무심하게도 하필이면 인원류동이 지극히 구애받는 이 시점에 이상이 생겼으니 부모님은 부모님 대로 애를 끓고 나는 나 대로 단 가마 우의 개미처럼 선자리를 쉴새없이 바장거리기만 했다.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아무튼 철부지라 할 수 있는 나는 의사선생님의 분부 대로 가까스로 할아버지를 중증병실에 모셨다. 한밤중이여서 어른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아니, 한낮이라도 사실 도와줄 친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두 자식중 아들인 아버지, 딸인 고모가 부부 쌍쌍이 한국에 나가있다보니 연길에 남은 혈육이라고는 외롭고 처량한 나뿐이였다.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래도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입원수속을 허둥지둥 마치고 할아버지를 구급침대에 눕히고 검사 받으러 이 부서 저 부서 휘청거리며 오고 갔다.
열이 펄펄 끓다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할아버지가 당장이라도 운명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때문에 관찰실에 모셔놓고 지켜보면서 눈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구생 수업에 아르바이트까지 마치고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하필 그 때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으니 솔직히 지금도 제정신이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여난 지 40일 만에 ‘코리안드림’을 이루고저 한국으로 떠났다. 그 때는 철부지였으니 아버지가 곁에 없어도 그런 외로움과 서러움을 느낄 나이는 아니였다. 네살 때 어머니마저 나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맡겨두고 한국으로 떠나가버렸다. 그 때는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과의 리별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인지 퍼그나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때라 서럽기 그지없었다. 결국 눈물을 뿌리며 매달렸으나 갈라지는 설음 속에서 어디까지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맡겨서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성장의 길을 서투른 대로 아장아장 걸어가게 되였다.
할아버지는 경륜 있는 출판일군이였고 할머니는 부지런하고 현숙한 가정부녀였다. 어른들의 손에 끌려 나는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붙었고 또 연구생과정에 도전하게 되였다. 편집경력자인 만큼 할아버지 집에는 문화적 분위기가 늘 물씬거렸다. 촘촘하게 꽂아둔 책장에서 책을 하나하나 빼내여 돋보기 너머로 들여다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싱그럽고 매혹적인 풍경으로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에 스스럼없이 빨려들어갔고 지금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있다. 마치 곁에 항상 계시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과 사랑을 책에서나마 탐색하여 나를 풍요롭게 가꾸기라도 할 듯한 집념같이 말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되는 본능이 있나보다. 말하자면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두고 사는 현실이 환상적 궁합이라고 받아들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중에서 어느 한쪽이 비게 되여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니 말이다. 이전에는 팔촌들까지 10여명이 한구들, 한가마솥을 쓰면서 살았다는데 그러한 풍경이 우리들 세태에서 사라져가던 무렵, 이른바 4촌, 5촌, 6촌 친척관계가 경제관계, 혈육관계, 요즘 세태에서 썩 달갑지 않을 수 있는 이웃관계로 어정쩡하게 이어져가지 않으면 안되는 세태가 씁쓸해질 때도 있는 게 새삼스러울 뿐이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공부에서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소학교, 중학교까지 줄곧 학년에서 앞자리에서 달렸다. 학교로 애를 데리러 찾아오는 부모들을 볼 때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단 한번 만이라도 날 데리러 왔으면 얼마나 좋을가?’라는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깨문 적도 있었다. 다만 그런 풍경마저 어느 사이 저 언덕으로 사라져버렸다. 자식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청일색의 할아버지, 할머니, 이웃으로, 지인으로 바뀌고 그러면서 달라지는 세태 속에서 일찌감치 적응되고 길들여진 내가 오히려 대견스러워보였다. 솔직히 부모님한테 대한 원망이 줄어든 것도 그 때부터였다. 이 세상 아이들은 똑같은 숙명에 길들어져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나의 학잡비와 용돈을 남부럽지 않게 푼푼히 보내준다는 부모님의 막무가내한 궁여지책의 배려에 단맛을 들여서 그런 건 분명 아니였다. 오히려 어느새 부모님 없이도 내가 오뚜기처럼 서야 한다는 배짱을 가지게 되는 게 스스로도 장해보였다. 현실이 얼마나 거치르든 그게 정녕 가시밭길이더라도 우리한테는 헤쳐나갈 숙명밖에 차례진 게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진 지도 26년 세월, 솔직히 손꼽아보아도 그 사이 부모와 만난 적이 10여번 되나마나하다. 그것도 한번에 고작 며칠, 한주일씩 머물 때가 있는가 하면 간혹 할아버지, 할머니 병간호 때문에 1년씩 묵어간 적도 있었다. 이게 기나긴 26년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전부의 만남이였다. 인생의 4분의 1이 될지 3분의 1이 될지 모르는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세월이였다. 그러나 내 공부뒤바라지를 위해, 또 로년에 봉양해야 할 부모님 말하자면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할 경제력을 키우겠다고 결코 정상이라 할 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애면글면하는 부모님 앞에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어른스러워졌다.
“단이야, 괜찮아?” 하며 부모님께서 팔을 잡고 물을 때마다 나는 그냥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서는 순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지.” 하며 난색을 하는 부모님 앞에서 지금 당장 때려치우라고 모질게 나오는 게 내가 그 사이 받은 교육과 례의 나아가 정감에는 아귀가 어울리지 않은 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슬하에 오누이를 두고 있었는데 두 자식 다 운명같이 하나뿐인 자식들을 부모님한테 맡겨두고 부부가 쌍쌍이 외국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나는 사촌오빠와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였다. 나보다 세살 우인 사촌오빠는 지금 일본에 나가있다. 코로나에 막혀 병환에 계시는 할아버지 보러도 오지 못한다면서 전화로 불만을 쏟아낼 때가 많다.
할머니는 부지런하고 작식솜씨가 매끄럽다. 그 슬하에서 살가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동안 작식솜씨도 아쉽지 않게 퍼그나 배워갔다. 지금도 찌개, 떡국, 미역국 같은 료리를 거뜬하게 만들어 밥상에 올려놓는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부러워서 야단이다. 그럴수록 자립에 필수적인 기량을 갖추는 게 우리 같은 애숭이한테 얼마나 절실한지 스스로 저울질하게 된다. 우리가 부모 곁에서 자라지 못했다고 반쪽으로만 커가는 건 구실이거나 핑게거리로 될 수 없다. 배우려는 의욕만 있고 흥미가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해진 스마트한 시대에서 살아가니 이런 어설픈 핑게는 더구나 통하지 않는다.
할머니와 지내면서 남긴 기억중 두어가지만 골라 쓰도록 하겠다.
할머니께서 세상 뜨신 지 몇해 되던 어느 날, 케케묵은 가을옷을 넣어둔 궤짝을 열어 밤색코트를 꺼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기 전에 정리해두려고 코트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봤더니 뭔가 손에 잡히기에 꺼내보니 퍼그나 닳아빠진 100원짜리 지페가 하트모양으로 꼬깃꼬깃 접혀져있었다. 언제인가 할머니가 요즘 종이접기를 배웠다고 싱글벙글하면서 나에게 건네준 거였는데 그 때 집어넣고 그대로 까먹은 게 분명했다.
“할머니,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요?”
“너희들 학교 앞길에 문구점이 새로 섰더구나. 거기서 너희들을 기다리면서 렴치불구하고 배웠지. 색종이로 접다가 돈으로 접어주면 더 근사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번 시도를 해본 거지.”
하트모양으로 접혀진 돈을 보는 순간 할머니가 그리워나 코등이 시큰해났다. 이미 꼬깃꼬깃해진 지페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할머니는 나를 각별히 아끼셨다. 녀자애인 데다 엄마가 곁에 없으니 더구나 마음을 쓰신 게 아닌가 싶다. 친구들의 모임, 친인척 집에 마실을 다닐 때에도 나를 분신처럼 꼭꼭 데리고 다녔다. 차림새에도 항상 신경을 썼다. 가끔 추억에 잠겨 옛 앨범을 펼쳐보면 깔끔한 쌍태머리에 알록달록한 꽃리봉을 달고 하늘하늘 날듯이 부풀어오르는 원피스를 입고 할머니 품에 안겨 환히 웃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할머니는 내가 외로울세라 웃음을 넘치게 안겨준 천사였다.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무렵,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할머니께서 페암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비보를 전해듣게 되였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할아버지는 눈가에 충혈이 가득 진 채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울먹한 목소리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 눈섭, 속눈섭까지 뭉청뭉청 빠져나간 할머니가 수척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가 그렇게 낯설어보이기는 처음이였다. 거울 앞에서 속상해서 얼굴이 일그러지는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편하고 멋진 가발이라도 사드리고 싶었다. 가발상점에 가서 할머니께서 만족할 듯한 최신스타일로 골랐다. 그리고 나서 예쁜 선물곽에 정히 담아서 할머니한테 전해드렸다. 기운없이 헤쳐보던 할머니께서 활짝 웃으시더니 수줍은 새각시마냥 가발을 쓰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 때 할머니는 이미 팔순을 넘긴 고령이였다. 그래서 녀자의 마음 속에는 영원히 소녀가 살고 있다고 했나 보다.
“할머니한테 선물도 하고… 다 컸네, 우리 손녀.”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대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후 할머니는 하루라도 빠뜨릴세라 가발을 쓰고 다녔고 아침마다 정성스레 씻고 말리고 빗으면서 애지중지 여겼다. 할머니의 병소식을 전해듣고 부모님도 허겁지겁 항공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한국에서 변변치 못한 일자리에 수입도 안정치 못했지만 병치료에 쓰라면서 할머니 앞에 돈 2만원을 내놓았다.
그렇게 암과 가족의 전쟁은 검질기게 이어졌으나 맹랑하게도 할머니는 나날이 쇠약해갔다. 통통하고 몰랑하던 팔다리는 앙상한 나무가지마냥 볼품없이 말라갔다. 설상가상으로 밤에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서 뼈까지 다쳤다. 가뜩이나 운신이 힘들어 서러웠을 텐데 이제는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숨 막혔을가? 할머니는 쩍하면 내 눈을 피해 눈물을 훔쳤다.
아쉽게도 고중에 진학하면서 할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학교외에도 다녀야 할 학원들이 한둘이 아니였으니 말이다.
어느 날 학원시간이 급해서 책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할머니가 안방에서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반듯하게 누운 채로 흐린 초점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할머니, 왜 불렀어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산송장같이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니, 빨리 죽어야지.”
“할머니, 가족들 모두 할머니가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이런 맥 빠진 말씀 하실 거면 절 부르지 마세요.”
웬만해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닌 내가 그 날, 괜히 속상해서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리를 뜨려다가 문득 할머니가 살아계신 것에 고마워하고 마음 놓고 있으면서도 그 이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얼른 메고 있던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다시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간 만에 화투치기나 할가요?”
“그럴가?”
할머니의 두 눈이 홀제 반짝거렸다. 얼굴에도 대뜸 생기가 넘쳐흘렀다.
나는 오래 동안 서랍 속에만 박혀있던 할머니의 애장품인 화투를 꺼내왔다 화투 앞에서는 례사롭지 않게 움직이는 할머니의 손놀림에 나는 “우와, 우리 할머니 역시 녹 쓸지 않았네!” 하고 감탄을 쏟아냈다. 몸져눕기 전에 할머니는 단 하루도 화투장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날 나는 할머니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 퍼그나 지났음에도 무아지경으로 할머니가 패를 떼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그 뒤로 나는 대학교에 들어갔고 커가면서 우리는 살면서 때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버거운 현실과 마주칠 수 있다는 섭리를 조금씩 깨치게 되였다. 할머니의 병세는 안정기를 찾아가는 듯했지만 끝내는 하늘나라로 떠나가는 비운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였다.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곳곳에서 할머니의 흔적과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정겨우면서도 가슴이 애달파났다. 하루라도 빠질세라 쥐고 있던 화투장, 지정석처럼 앉아계시던 쏘파, 물을 떠달라던 목소리,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옆침대에 송구스럽게 누워서 눈치 보던 그 얼굴이 눈앞에 알른거리면서 할머니가 아직도 누워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때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곁에 거의 계시지 않았던 어머니가 이 사실을 가볍고 편하게 받아들였던 사정도 점차 리해해주기로 했다. 부모시대의 가슴 시린 사연을 주관적이고 자기만 똑똑한 듯한 일방적인 시각으로 작두질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후대들에게도 자기 의식을 가지고 커갈 권리와 자유가 있지 않은가? 시야비야 속에서 어느덧 수십년 세월이 훌쩍 흘러갔음에도 우리 태반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완전완미란 걸 기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사치였다.
어른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도 세상물정에 어섯눈을 뜨게 되였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여러가지 일을 맡아 아르바이트를 뛰여서 학비와 용돈도 마련했다. 한국에 교환대학생으로 나가있는 몇달 사이에도 어머니한테 칭칭 매달려 단즙을 빨지 않고 호프가게,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우리 또래들이 환장하는 전자제품들도 갖추었다. 앞으론 부모님의 신세를 지게 되더라도 지금 만큼은 내 힘으로 뭐든 마련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이런 오기가 생긴 게 나한테는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27살 먹도록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도 자신에 넘치고 여유 부리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 사이 부모님 그리고 고모 대신 할아버지 곁을 지켜드린 일이 스스로도 가장 대견스럽다. 솔직히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도 어설프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처럼 대견해하시니 시름이 놓인다. 그 때 학원 갈 시간이 늦었음에도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화투를 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른 척하고 학원으로 달려갔더라면 아마 평생 후회로 가슴을 잡아뜯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로인들은 주변의 자그마한 배려에도 늘 목 말라있지만 우리가 너무 덤덤하게 지나쳐서 결정적 실수와 한탄을 빚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도 인젠 어엿한 성인이 되였으니 이역땅에 계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 곁을 지켜드리면서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데 할머니는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고 고령의 할아버지마저 몸져누우셨으니 서글프기 그지없다. 할머니가 떠난 지 3년 만에 사촌오빠마저 류학길에 오르면서 연길에 할아버지가 기댈 언덕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할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를 이리저리 밀고 다니면서 검사를 마치는데 문득 가장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나의 보호자가 되여 나를 태산같이 지켜주신 할아버지셨는데 이젠 내가 할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였으니 참 새삼스럽다. 문득 한국에 가서 교환대학생으로 있을 때 들었던 ‘소녀가장’이란 말이 떠오르면서 내가 바로 그 소녀가장이 아닌가 하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든다. 한국에서는 소녀가장이란 부모의 사망, 리혼, 가출 등의 까닭으로 미성년자만으로 세대가 구성되였거나 조부모 등 보호자는 있어도 고령, 장애로 부양능력이 없는 어른의 슬하에서 자라는 세대를 가리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어딘가 맞물리는 게 있는 듯한 소녀가장, 하지만 우의 경우에 비하면 나는 썩 홀가분한 소녀가장이였다.
검사결과는 썩 리상적이 아니였지만 점적주사의 은으로 힘들게 의식을 찾은 할아버지가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단이야, 고맙다. 네가 할아버지 곁을 지켜주어서…”
별로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그저 곁을 지켜주었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원한다면 그냥 곁에 남아 지켜줄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나서 코로나에 길이 막혀 시간이 퍼그나 지난 요즘에야 연길에 돌아왔다. 그러니 이 참에 내가 소녀가장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점적주사를 맞고 있는 할아버지를 지켜드릴 때면 갖고 다니던 책을 옆에서 펼쳐드는 게 이젠 버릇으로 굳어져버렸다.
차홍의 뷰티에세이 《당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필립 체스터빈드의 《아무도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등 책들 대여섯종을 번갈아 보다가 그중에서 이런 글들에 마음이 끌렸다.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을 터무니없이 미화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에 결코 현혹하지 말라. 다만 너는 랭혹한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며 아무도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명심하라. 아들아, 시간을 랑비하지 말라. 네 인생의 최고경영자가 되여 당당하고 지혜롭게 자신 있게 멋지게 사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라. 그러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저자가 아들한테 건넨 이 조언은 부모님한테는 딸자식인 나에게도 매한가지겠지. 이젠 자신이 소녀가장이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 내 인생도 새롭게 열어가야 하고 20여년 가까이서 거의 지내지 못한 부모님도 내가 모셔야 할 바다같은 아량도 키워가야 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는 그냥 있고 그런 숙제들이 남아있어 인생은 살 만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