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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2021년 02월 04일 10시 19분  조회:658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아버지

리미옥



어제밤 꿈에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3년이 된다. 그동안 한번도 꿈에 나타난 적 없었는데 느닷없이 어제밤 꿈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여나 마구 요동치는 가슴을 붙안고 한동안 꼼짝할 수도 없었다. 지난 상처가 다 아물었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물 한 컵을 마신 다음 쏘파에 걸터앉았다. 가슴 속에서 일어난 방망이질이 이슥토록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여직 마음속에 남아있는 걸가? 아니면 자괴감 같은 거라도 남아있는 걸가? 아버지는 그 곳에서 잘 계시는 걸가? 아직도 나에게 걱정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아버지. 두번다시 뒤돌아보고 싶지 않는 그 지긋지긋하고 힘들었던 시간들…
40대 중반의 한창나이에 일손을 놓다싶이 한 아버지는 모아놓은 재산이나 로후대책 같은 건 전무한 상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꿈을 접고 어린 나이에 한국행을 택할 때만 해도 나는 아버지한테 원망 같은 건 품어본 적 없었다. 단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워준 사랑에 감사해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한국에 가서 몇년간 힘들게 벌어 아껴 모은 돈으로 아버지에게 아빠트 한채를 장만해드렸다. 그런데 그 아빠트가 나중에 아버지가 종종 나를 들먹이는 조건이 될 줄이야. 아버지는 무엇이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 집을 팔겠다고 으름장을 놓군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그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당신의 집이니 팔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야 잠시나마 그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자 하나 둘 결혼하는 친한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하루빨리 아버지한테서 해탈되고 싶었다. 얼마 뒤 남편을 만나면서 나의 인생에도 차츰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란 남편은 나랑 많이 달랐다. 그런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도 점점 밝게 변해갔다. 진정한 사랑이 어떤 건지, 가족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화목한 시댁 식구들을 보면서 점차 배워갔다.
그 무렵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팽팽해졌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게 되면 다달이 당신에게 보내던 생활비가 끊길가 봐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서 요즘 신부들의 로망이라는 다이아몬드, 황금, 진주 3 세트를 결혼례물로 나에게 선물했다.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한 마음에 그걸 아버지한테 보여드렸더니 대뜸 “이걸 팔면 돈이 되냐?”고 묻는 것이였다. 별로 기대를 한 건 아니였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서운한 나머지 화가 나고 허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상견례를 치를 때 시댁에서는 결혼례물로 한국돈 천만원을 우리 편으로 보내왔다. 엄마는 그 돈으로 새신랑한테 선물할 목걸이며 반지, 고급 양복 등을 갖추었다.
결혼식 전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술상을 갖추어올리면서 앞으로 생활비는 계속 드릴 테지만 빈주먹으로 신접살림을 꾸며야 하니 도움을 드리는 데 한계가 있을 거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시댁에서 보내온 그 천만원은 당신이 챙겨야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였다. 그 돈은 신랑에게 줄 결혼례물을 장만하는 데 썼노라고 이실직고하자 당장 부모자식의 인연을 끊고 래일의 결혼식도 망쳐놓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모들이 한밤중에 한달음에 달려와서 설득을 해서야 간신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튿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예쁜 모습을 보여야 할 날에 나는 눈이 퉁퉁 부은 채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아버지는 이번에는 축의금을 모조리 내놓으라며 한바탕 야단을 치더니 아무 것도 얻지 못하자 그 자리로 연길로 돌아간다며 려행가방을 챙겨들었다. 낳아서 길러준 은혜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고 나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말이다. 수년간 쏟은 온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음이 더없이 허탈해났다.
그런데 고모들마저 당신들이 내놓은 축의금은 아버지한테 몽땅 주라면서 나를 달달 볶아댔다. 내가 시집 가고 나면 아버지가 살길이 막막해진다는 리유에서였다. 결국 아버지에게 한국돈 500만원을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결혼 첫날밤, 나는 펑펑 목놓아 울었다. 자식을 낳고 키워준 은혜를 갚으라고 핍박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가. 자식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면 축복해주는 게 부모 마음일 텐데 하는 설음이 밀려들면서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말없이 나를 품에 껴안아주었다.
험난한 시련은 내가 임신한 뒤에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알콜중독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새벽녘에도 우리 신혼집 문을 두드려대니 나는 무거운 몸으로 시도 때도 없이 술상을 갖춰드리느라 들볶여야 하였다. 알콜중독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환각증상이 나타나면서 눈앞에 헛것이 나타나고 불안증세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병원치료를 한사코 거부했다. 임신 5개월차의 임신부인 나는 급기야 체중이 80근으로 떨어졌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태아의 머리에 물이 차는 사태까지 맞게 되였다. 귀한 첫 손주를 보게 될 시댁에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 때문에 무고한 남편이 함께 시달림을 겪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시댁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시댁에서는 남편이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기에 우리의 상황을 대강 알고 계셨다. 시부모님은 송구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나를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일단 안정을 취하면서 2주 동안 태아의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의사의 분부에 따라 나는 남편과 상의하고 한국에 계시는 엄마 곁에 잠시 가있기로 했다. 그동안 아가를 위해서라도 출산전까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태아의 상태가 좋아지자 시름 놓고 남편이 있는 연길로 돌아왔다.
그렇게 조용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곧 있게 될 아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그 날은 마침 나의 생일날이였다. 아기가 태여나기 전에 차를 장만하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일찍 나가서 수속을 마쳤다. 점심은 내가 좋아하는 신선로를 먹기로 하고 나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급촉하게 울렸다. 전화너머로 사촌올케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둘째삼촌(아버지)이 돌아가셨소.”
환갑나이도 안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환각증세까지 보이며 나를 괴롭힐 때 어렴풋하게 불안감이 찾아왔지만 배속의 아가를 지키려고 당분간 련락을 끊었는데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가슴 아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후 고인의 상태로 보아 돌아가신 지 하루이틀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을 때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흔히들 말하는 고독사였다. 아버지의 형제들로부터의 비난이 비발쳤다. 임신 9개월이 된 만삭의 몸으로 나는 쏟아지는 그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출산 예정일을 4주 앞두고 태아의 성장이 멈추면서 바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분부 대로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수술실에 실려들어갔다. 아이를 낳고 입원해있는 동안에도 친가에서 따뜻한 안부의 전화 한통 없었다. 아버지와 련계를 끊고 지내는 동안은 나에게도 퍼그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였는데… 이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하소연하랴…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훈훈한 추억 한자락도 잡히는 게 없다. 나의 성장과정에 기억에 남을 만한 도움이나 조언 같은 걸 한번도 건넨 적 없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떠올리면 마음이 한산하고 숨이 막힌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중에 입학하여 또래친구 부모님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을 때도 축하하기는커녕 집안형편을 살피지 않고 공부하겠다고 설치는 철 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던 나였다.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련민의 마음은 한구석에 남아있다. 평생 쪼들리면서 살다가 술에 절어서 지내다가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가족에게 따뜻한 추억 한자락도 남겨주지 못한 채 스러져간 아버지의 인생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먼 후날, 나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줄 만큼 훌쩍 자란 딸아이에게 늘 밝은 엄마에게도 어두운 턴넬 같은 힘든 길을 걸어온 시간들이 있었다고 들려준다면 딸애는 당시 이 엄마의 선택을 두고 어떻게 생각할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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