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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2021년 02월 04일 10시 12분  조회:608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첫눈

최준봉



흰 눈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해변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에 내리는 첫눈이다. 올해 첫눈은 여느 해보다도 푸근하게 내린다.
하늘의 선녀인양 하늘하늘 춤 추며 내리는 흰 눈이 어느덧 온 대지를 흰 비단으로 뒤덮어 산과 들은 어느새 곱게 소복단장을 하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창밖에서 쏟아지는 흰 눈을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눈이 내리는 게 그렇게 희한함둥?”
평소에 말수가 적은 안해가 나의 곁으로 다가오면서 한마디 건넸다.
“희한하다기보다는 첫눈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설레는구만.”
안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나는 안해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쯧쯧— 왜 이러시우? 주책 맞게스리. 그러다 애들이나 보면 어쩌려구.”
안해가 나의 손등을 찰싹 후려치면서 눈을 힐끔 흘겼다.
“첫눈이 내리던 날 우리가 혼례를 치르던 일이 생각나우?” 
“그럼요.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40년이 흘렀다니…”
먼산에 눈길을 주던 안해가 입을 열더니 말끝을 흐렸다. 우리 량주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밖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추억의 쪽배에 몸을 실었다.
1975년 봄, 나는 부대에서 제대되여 룡정역에 배치받았다. 그 때 이미 30살을 앞둔 로총각인지라 나는 장가 비위가 부쩍 동했다. 그러나 만나본 처녀마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면서 구차한 우리 집에 시집 오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대에서 갓 제대한 나는 살림집이 없었고 늙은 어머니마저 시골에 계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처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나는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였다.
몸매가 늘씬하고 치렁치렁한 쌍태머리를 길게 드리운 함박꽃 같은 처녀였다.
첫 만남부터 나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숨김없이 들려주었더니 처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이예요. 사람만 좋으면 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인물도 예쁘지만 마음씨는 그보다 더 고운 속 깊은 처녀였다.
그후로 우리는 종종 만나서 사업과 리상을 담론하는 가운데 서로를 깊이 알아갔다.
어느 날, 우리는 라이라크향기가 물씬 풍기는 해란강강변을 따라 어깨나란히 거닐었다. 강변 곳곳에서 쌍쌍이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남녀들의 다정한 모습이 눈에 띄였다.
나는 용기를 북돋아 처녀에게 나의 진정을 고백했다.
“동무를 안해로 삼고 싶소.”
“저도 동무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요…” 
처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의 사랑을 축복이라도 하듯 그 날 따라 하늘의 뭇별들이 유난히 깜빡거리는가 하면 개울가에서는 개구리들이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 둘은 날을 거듭하면서 서로에 대한 진정을 확인해가면서 청춘의 멜로디를 엮어갔다.
“사돈보기도 안한 애가 만날 총각하구 붙어다니다 사달이라도 치면 어떻게 할라구.”
장모님 되실 분이 그런 우리를 지켜보면서 걱정스레 던진 말씀이였다.
우리는 서둘러 사돈보기를 하고 그 해 10월 24일을 결혼날자로 정했다. 그런데 그 무렵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마침 ‘문화대혁명’시기인지라 시집 가는 새색시가 너울을 쓰는 걸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관습이라고 금지하던 형국이였다. 결혼식을 치르는 날에 새색시가 너울을 쓰지 못한다고 하니 못내 마음에 걸리였다.
대지에 가을자취가 채 가시지 않은 마가을, 우리는 예정 대로 결혼식을 올리였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새벽부터 흰 눈발이 날리였다. 여느 해보다 일찌감치 내리는 첫눈이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더없이 검소하게 치러졌다. 나는 부대에서 갖고 온 데트론군복에 철로에서 발급받은 작업용 구두를 받쳐신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다음 뻐스도 통하지 않는 길에 올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눈발이 굵어지더니 함박눈으로 이어져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우리 뒤로 두쌍의 발자국이 흰 눈밭에 나란히 도장을 찍어놓았고 새색시의 머리에는 흰 ‘비단너울’이 들씌워져있었다.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듯 하늘이 내려준 흰 눈이였다.
“야, 곱다야. 오늘은 새색시가 흰 너울을 썼구만.” 
“이런 눈은 30년에나 한번 내릴가 말가 하는 눈이라우. 이런 날 시집 오는 색시는 아들딸 쑥쑥 낳구 잘살 거라우.” 
예로부터 잔치날에 눈이 오면 색시가 친정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시집에 마음을 딱 붙이고 잘산다느니 하면서 하객들이 이구동성으로 찬탄하는 소리에 우리의 아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결한 흰 눈, 그건 안해에게 내려준 예쁜 ‘너울’이였고 우리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하늘의 선물이였다.
이렇게 첫눈을 맞으면서 들뜬 마음으로 장가 들고 시집 간 게 어제일 같은데 벌써 70 고개를 훌쩍 넘어섰다. 그동안 자식들도 모두 장성하여 잇달아 대학문을 나와서 가정을 이루었고 하나 둘 태여난 귀여운 손자, 손녀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니 우리 량주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이 다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런 오늘의 우리를 축복해서 그 때 내려준 선물이였을가. 차마 즈려밟기조차 아쉬울 만큼 하얀 그 날의 첫눈,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 속의 첫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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