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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년의 천륜지락
2021년 02월 04일 10시 16분  조회:668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이순지년의 천륜지락

오성호



이 세상에 천륜지락 만한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 이순의 나이에 귀여운 외손녀를 얻은 후로 가슴 벅찬 행복을 누리게 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심심히 깨닫게 되였다.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환갑나이가 된 내가 요즘 들어 딱 그런 기분이다. 황혼로맨스가 아니라 귀여운 외손녀한테 푹 빠져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그 즐거움에 흠뻑 취해 점점 행복한 바보가 되여가는 중이다. 외손녀가 태여난 후로 우리 량주는 외손녀의 해맑은 웃음에 홀랑 넘어가 날이 가는 줄도,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그저 온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외손녀와 함께라면 그 즐거움의 끝을 알 수 없다. 아침에 잠에서 깨여나서부터 귀여운 외손녀는 우리에게 더없이 찬란한 웃음을 선물한다. 실눈을 짓고 캐득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귀여운 모습에 우리 량주는 앞 다투어 외손녀를 안아주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댄다. 나는 어떻게든 외손녀를 좀 웃겨보겠다고 사력을 다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외손녀 앞에서 나의 18번 〈고향의 봄〉을 불러보기도 하고 얼씨구절씨구하며 어깨춤을 덩실대면 외손녀는 까만 두 눈이 올롱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웃는다. 그러면 나는 더욱 흥이 나서 목청을 한껏 돋구고 팔다리에도 힘을 넣어 신나게 휘젓는다. 나중에 딸애가 찍어서 보여준 동영상을 보니 나의 그 우습강스러운 모습에 〈행복한 늙은 바보〉라는 제목을 붙이면 딱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가끔씩 섭섭할 때도 없는 건 아니다. 딸애는 내가 외손녀를 안을 때마다 잊지 않고 이렇게 한마디 건넨다.
“아버지, 좀 조심스레 안아주세요.”
여리디여린 아기가 혹여 다칠가 봐 딸애는 한시도 시름을 놓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알아, 걱정하지 말아.”라며 퉁명스레 대꾸한다. 품에 안은 외손녀를 내려놓을 때에도 딸애는 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는다.
“아버지, 좀 천천히 내려놓으세요.”
이렇게 매번 신경을 도사리는 딸애한테 섭섭한 마음이 들다 못해 저도 모르게 반발심까지 일어났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내가 뭘 어쩐다고? 외손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네가 뭐 안다고 그래.’ 그래도 나를 보며 방글방글 웃어주는 귀여운 외손녀를 봐서 화를 꾹꾹 눌러놓고 능청을 떨어댄다.
“아가야, 넌 이 할아버지 마음을 잘 알지? 너는 이 할아버지와 언제나 한편이지? 그렇지?”
이렇게 ‘상처 입은’ 마음을 스스로 달래면서 딸애 앞에서 보란듯이 외손녀의 야들야들한 볼에 살짝 뽀뽀를 한다. 그러면 옆에 있던 안해가 외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다는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호호, 얘가 무슨 할아버지와 한편이겠어요? 제 엄마와 한편이지.”
“그런가?”
번연한 답인 줄 알면서도 되묻다가 안해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껄껄대며 멋적게 웃어버린다. 하긴 외손녀와 딸 그리고 나 사이에 무슨 편 같은 걸 가를 일이 있겠는가.
외손녀가 태여난 후로 우리 량주는 외손녀를 돌보는 한편 산후몸조리를 하는 딸애를 돌보느라 밤낮이 따로 없이 바삐 보내고 있다. 안해는 매일같이 외손녀와 딸애를 챙기느라 그들 옆에서 새우잠을 청하면서 하루도 편하게 쉬여본 적이 없다. 밤중에도 몇번씩 일어나 분유를 풀어 아기에게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느라 시름 놓고 잠을 청할 새마저 없다. 나도 덩달아 밤중에 여러번 일어나는 고역을 치러야 했는데 그 바람에 밤잠을 설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수두룩하다. 한번은 외손녀를 품에 안고 달래다가 그 맵시로 쏘파에서 끄떡끄떡 졸고 있는 안해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게 되였다. 쌔근쌔근 단잠이 든 외손녀를 꼭 껴안은 손목에는 너덜너덜해진 파스가 붙어있었고 물집이 잡힌 입을 맥없이 헤벌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났다. 나는 딸애를 불러다가 외손녀를 안아가게 하고는 안해를 쏘파에 편히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렇게 매일 버겁도록 힘든 ‘전쟁’을 치르면서도 우리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외손녀의 귀여운 표정,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우리는 집안이 떠나갈듯 웃는다. 가끔은 리유없이 시물시물 웃을 때도 있다. 처음 리유식을 받아먹을 때 숟가락을 꼭 물고 놓지 않는 외손녀의 엉뚱한 모습에 폭소를 터뜨렸고 안해가 옆으로 눕혀놓고 기저귀를 바꿔주는데 “뽕”하고 방귀를 뀌고는 머리를 돌려 제 엉덩이를 돌아보는 모습이 능청스러워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내가 안아주면 징징거리다가도 딸애가 안아주면 좋다고 들까불며 제 엄마의 어깨너머로 캐드득거리면서 숨박곡질하듯 나를 훔쳐보는 모습에는 맹랑해서 피씩 웃고 만다. 태여나서 5개월 가량 반듯이 누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외손녀가 하루아침에 한다리를 들어 다른 다리 우에 포개놓고 어깨를 들썽거리더니 머리를 번쩍 추켜들고 엎치는 순간, 우리는 마치 대단한 기적이라도 일어난듯 박수를 치면서 “야, 만세! 우리 손녀 만세!” 하고 환호했다. 아픈 예방주사를 두대 맞고도 울지 않던 날에는 집안에 녀장부가 태여났다고 하면서 이제 커서 어떤 인물이 되려고 저럴가 하고 즐거운 상상에 잠겨보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금방 엄마가 된 딸애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여 말없이 딸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녀가 태여난 기쁨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진 딸애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마음이 알알해났다. 이윽고 큰일을 해냈다며 손등을 다독여주니 딸애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였다. 내가 아기가 우리 이쁜 딸을 닮아 무척 귀엽다고 치하하자 파릿한 딸애의 얼굴에 금방 함박꽃웃음이 어리였다.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났다.  
나중에 딸애는 살폿이 웃으면서 우리 량주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아기가 저 보고 웃을 때면 기분이 참 좋아요. 아버지, 어머니도 전에 제가 웃으면 기분이 즐거웠지요? 참, 그 때 많이 웃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요.” 그러면서 밤새 창작한 작품이라며 시 한수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그 시를 그대로 적어본다.
 
엄마가 되여 엄마에게
       
엄마가 되여서야
떠올랐습니다
훌쩍 뛰며 신나하는 내 모습에
행복해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엄마가 되여서야
떠올랐습니다
풀이 죽어하는 내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어린 외손녀가 딸애로 하여금 모성애의 진의와 부모 사랑을 새삼 깨우치게 한 모양이다. 우리는 딸애의 마음이 하도 갸륵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환갑나이의 우리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바보’로 만들어주고 슴슴하던 생활에 활력을 부여해줌과 아울러 몸과 마음을 젊어지게 해준 외손녀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매일 하많은 재롱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아가야, 사랑하는 아가야, 지금처럼 쭉 무럭무럭 잘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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