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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처럼 깊숙이 숨겨두었던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꺼내면서 숫접게 말을 건넨다.
“우리 손주를 잘 부탁드립니다.”
할머니의 거친 손에서 건네받은 건 백원짜리 두 장, 200원이다. 기어코 받지 않겠다고 되돌려드렸지만 기어이 쥐여 주신다. 그리고 할머님의 떨리듯 서운함이 담긴 음성은 귀를 아프게 때렸다.
“적어서 안 받슴까?”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과 우리 교육 현장이 왜 이 모양새로 전락됐는지 마음만 서글퍼 난다.
할머니를 잘 설득하여 돌려보내셨지만 마음은 우중충하기만 하다.
여러 모로 보아 부유한 집안은 아닌데, 할머니가 촌지를 건넨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도 사교육 현장에서… 그렇다면 공교육 현장의 “거래”도 류추하여 짐작이 가능하지 않을 가?
안 그래도 기울어져 가고 있는 민족교육현장에서 근절돼야 할 페습들이 응당한 관례로 여겨지는 원인은 무엇일가?
학부모로부터 은밀하게 받은 액수가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환산되는 “경영철학”이 우리 교육현장에서 일반화 되였다고들 한다.
주는 부모님과 받는 선생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동시에 모두의 잘못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만연돼 보편현상이 되여 버렸는데, 안 주기도 안 받기도 서로에게 례의는 아니다.단지 “대세”와 “사조”에 편승하여 이를 거역하지 않았을 뿐이므로 “죄”는 아니다. 그러나 교육환경을 병들게 하는 옴같은 존재로서 주는 이와 받는 자, 모두가 대역죄를 짓는 일이다.
모든 선생님과 학부모가 일괄적으로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꾸라지 한 마리 온 웅덩이를 흐려놓는” 것은 분명하다.
할머니의 시름에 찬 눈동자와 걱정으로 휘여진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승의 참된 덕목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꺼림직함으로 흐려진 마음은 설음이 차올라 울컥했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빈손으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부당한 거래”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상품”으로 전락 돼버린다면 장성한 아이들은 어떤 인격체가 되여 있을가?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유치원으로 가는 딸애의 가방 속 책 사이사이에 돈을 끼워 넣어 보냈더니 돈은 무사히 “증발”되고 아이는 가방이 열린 채로 유치원을 나서더라는 친구의 사연, 그리고 친구가 건넨 한마디.
“받더라도, 받은 돈 액수로 아이의 가치를 가늠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줬으면 좋겠더라.”
그리고 지인 한분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다사스러운 소학교 선생님으로 취직했다. 그가 넌지시 건넨 한마디.
“그래도 소학교가 먹을 떡이 크답니다. 물론 학교마다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아이들이 힘차게 걸어가면 모든 것들이 한마음 되여 길을 열어”(윤동재 시, <아이들이 힘차게 걸어가면>)주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추락해도 교육과 스승의 품위는 절대 실추되지 말아야 한다.
“촌지현상”은 주는 이와 받는 자, 량자가 자신의 “리익”을 보장받기 위한 행위이다. 때문에 페풍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리익을 동시에 만족 시킬 수 있는 구조적 혁신과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 전환도 가져와야 만 한다. 동시에 당국에서 엄한 처벌 제도 등 여러 조치를 취하고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
사회 일반에서도 교육현장의 병페를 적극 고발하고 해결책을 활발하게 공론화하여 논의하면서 개선을 가져와야 한다.
“…진실로 교원의 얼굴과 자세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학교가 된다.”(김호웅 칼럼,<교원의 얼굴과 자세>)
이링공뎌링공하야 참된 덕목과 교양을 갖춘 “큰 스승”님들의 량지(良知)와 사명감으로 충만 된 교정에서만이 우리의 빛나는 미래를 노래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미래를 잘 부탁드립니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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