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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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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살구꽃 필무렵 (박명선)
2016년 06월 21일 22시 36분  조회:2432  추천:0  작성자: 박명선
살구꽃 필 무렵

 
박 명선
 
 
     큰길 옆 살구나무에 꽃망울들이 빠금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살구꽃이 필 무렵이다.
     화창한 봄날에 피는 꽃은 많고도 많다.
     진달래꽃,사과배꽃,복사꽃과 같이 살구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살구꽃을 제일 좋아한다.
     사람들은 흔히 살구꽃을 이쁜 소녀로,치장을 곱게 한 젊은 녀인으로 비유하지만 나는 살구꽃을 보면 어쩐지 할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어릴 때 자란 옛고향집 마당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학교 갔다 올 때나 영화 보고 올 때 큰길에서 집골목에 들어서면 저기가 우리 집임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집을 나설 때면 잘 갔다오라고 바래주고 집에 돌아올 때면 반갑다고 맞아주는 듯했다.눈보라와 비바람 속에서도 훤칠하게 잘 자라는 살구나무를 보면 나도 하루 빨리 키가 크고싶었다.
      할머니는 추운 겨울이면 헛간에 보관해두었던 낡은 이불을 꺼내 살구나무를 덮어주고 한여름이면 손수 일군 밭에서 일하고 돌아와서는 시원한 뽐프물을 나무에 뿌려주셨다.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서인지 토질이 좋은 땅에서 자라서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정성이 고마워서인지 해마다 살구가 많이 달려 살구나무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살구가 입안에 떨어질 정도였다.
      할머니는 파란 살구들은 따로 쌀독안에 깊숙히 넣어두셨다.며칠이 지난 후 꺼내보면 노랗게 잘도 익어갔다.할머니는 노란 바가지에 노랗게 잘 익은 살구를 가득 담아 이웃들에 나누어주고 영국더기(룡정시가지 남쪽 작은언덕)너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전사들한테도 갖다주군 했다.당시는 《영웅 아들딸》 등 영화가 상영되여 전사들도 할머니를 "아마니!"라고 친절하게 불렀다.할머니는 적으나마 소박한 인정을 베풀어 서로 돕고 사는 도리를 나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해마다 살구꽃이 필 무렵이면 나는 꽃망울들을 바라보며 올해도 살구가 많이 달리기만 바랬다.살구가 많이 달려야 살구씨먹기놀음을 많이 놀수 있기 때문이였다.나의 책가방안이며 필통안이며 서랍안에는 보물로 간직해둔 살구씨가 가득하였다.누가 살구씨를 깨먹자고 하면 몇알씩 주기도 했지만...
      그러던 어느날,할머니가 "지금까지 모았던 살구씨를 모두 내놓거라.의약공사에 바쳐야 한다."라고 하셨다.의약공사는 바로 우리집 뒤에 있었다.살구씨가 기침약 등 약재에 쓴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까워서 깨먹지도 않고 모아둔 살구씨를 정작 내놓자니 여간 내키지 않았다.우물쭈물 내놓기 아쉬워하는 나를 바라보시더니 할머니는 웃으면서 "올해도 살구가 많이 나면 다시 모으면 되지." 라고 나를 위안해주셨다.나는 할머니와 같이 여직껏 모아두었던 살구씨를 의약공사에 몽땅 가져다 바쳤다.할머니 말씀대로 그해는 살구가 주렁주렁 신기하게도 많이 달렸다.
      그 날도 살구꽃이 필 무렵이였다고 기억된다.
      학교에 갔다가 집마당에 들어섰는데 할머니가 홍위병 완장을 낀 고중생 몇이와 말다툼하고 있었다. 홍위병들 손에는 톱과 도끼가 쥐여져있었다.
      "아니,이놈들이..."하면서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들어보니 소자산계급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였다.  
      "살구나무를 베기전에 담이 있거든 저것부터 떼가거라."
      할머니는 하얀 벽에 달려있는 붉은 꽃다발을 가르키셨다.지난 청명절에 현정부에서 《혁명렬사가족》이라는 빨간 문패위에 달아준 꽃다발이였다.그것을 본 홍위병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뿔뿔이 도망가버렸다.반혁명분자들을 족친다며 사처로 쏘다니며 우쭐렁대던 홍위병들도 할머니의 위엄있는 말씀에 주눅이 든 것을 보고 나는 기뻐서 퐁퐁 뛰였다.
      봄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이였던가, 동네애들과 소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저녁 늦게 집에 왔더니 살구꽃이 활짝 피여나고 있었다.나는 하얀 구름송이가 빨간 노을 속에 비껴있는 듯한 살구꽃을 눈자리 나도록 올려다보았다.밥상을 갖추는 할머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여있었다.그날 저녁 할머니는 살구를 먹으면 장수하고 과거에 급제하며 장가 들면 아들 낳는다며 우스운 이야기들도 많이 들려주셨다.
      시가지의 소학교들에서는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엔 거의 로동을 하였다.옥수수 영양단지를 만든다, 해란강뚝 철길옆에 새 체육장을 짓는다, 행장을 메고 십여리 떨어진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다 하며 어린 나이에도 갖가지 일들을 경험하였다.
     살구꽃이 피고 지며 또다시 찾아온 어느 봄날이였다.로동을 하고 맥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서 반혁명분자들을 트럭에 싣고 투쟁대회를 하는것을 구경하였다.그런데 아뿔싸! "일본특무"라는 간판을 목에 건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겠는가!와뜰 놀란 나는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할머니 무릅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그날도 살구꽃이 필 무렵이였지!
     그 일이 있은 어느날 밤중에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씀에 잠에서 깨여났다.
     아버지가 왔구나!
     나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인사드리려 하다가 아버지의 굳은 얼굴표정을 보고 꼼짝않고 자는척 하였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철남이도 남조선특무로 잡혀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는 철남이라는 분은 나의 친구의 아버지인데 현문화국의 령도였다.
      "언제 떠나나?..."
      "래일아침 철남이랑 함께 갑니다."
      "..."
      아버지가 로동개조하러 어딘가 먼 탄광으로 간다는 것이였다.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쭈루룩 흘러내리며 베개를 적셨다.
      며칠후 할머니는 그만 몸져 누으셨다.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누워계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살구꽃이 안폈지?"
     "아니,폈습니다."
     살구꽃이 피지 않았다고 하면 할머니가 서운해 하실까 봐서였다.살구꽃이 아직 피지 않은줄을 번히 아시는 할머니는 가까스로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이제 필 살구꽃처럼 웃으며 살아야 한다!"
     할머니의 말씀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한돐이 채 안된 아버지를 둘쳐업고 항일하다 전사하신 할아버지 뒤를 이어 탄약을 나르셨다는 할머니,억울한 루명을 쓰고 투쟁 받는 아버지를 면회하면서 견강하게 버텨내야 한다던 할머니,가도부녀들을 동원하여 비누공장을 세운다며 밤낮없이 보내는 어머니의 등을 밀어주며 집근심은 하지 말라던 할머니...
      그해 살구꽃은 할머니를 추모하는지 다른 해보다 더 하얗게 피여보였다.
      이듬해 살구꽃이 필 무렵에 우리 집은 아버지의 전근으로 작은 진마을로 이사가게 되였다.이사 가는 날,나는 할머니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이 똑똑 떨어지는 비방울 속에 점점 멀어져가는 살구나무를,할머니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그리며 이제 슬프게 피여날 살구꽃을 오래토록 바라보았다...
      그후부터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도시생활을 하면서 살구꽃을 거의 잊고있던 어느해 봄, 한국 수원시 어느 한 주택가에서 마당에 서있는 살구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여기보다 한두달 계절이 빠른 원인인지 살구꽃이 피여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살구꽃을 다시 본 나는 너무 반가와 찰칵 하고 잊을수 없는 순간들을 카메라에 남겨두었다.살구꽃이 피여있는 집이 마치도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집같아 보여 자꾸 그리로  눈길이 끌리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서성이였다.     
      몇해 전부터 작은 이 도시에서는 도시의 상징으로 살구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개발구에서 공항까지 동서로 뻗은 길거리와 주간통로에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살구나무들에 이제 곧 연두색 살구꽃이 곱게 피여나리라.  
      오늘도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살구나무를 올려다본다.
      꽃이 필 무렵인데 달콤시큰한 고향집 살구맛이 입안에 가득 고이며 군침이 꼴깍 넘어가는것같고 할머니의 말씀이 다시 귀전에 울려오는 것 같다. 
      이제 필 살구꽃처럼 웃으며 살아야지!

       (2016년 <청년생활> 제5월호)


                                                                                 
                               옥수수와 소년
 
빨간 토성 현정부 옆 초대소 바자 밖에 애어린 옥수수 몇 포기가 비술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학교 갔다오는 길에 옥수수 두 포기를 조심조심 파가지고 집에 왔다.한달 전에 물만두처럼 빚은 옥수수 영양단지를 들고 줄지어 어딘가 먼 산간마을 학교텃밭에 가서 처음 보는 길고 구불구불한 밭고랑에 소조별로 파고, 심고, 묻고, 물주고 하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소년은 헛간에 남겨두었던 진흙과 마당에 널려있는 닭똥을 반죽해 만든 영양단지에 옥수수를 넣어서 마당에 심어놓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겠지.이 옥수수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보여줘야지!)
손자의 거동을 지켜보던 할머니도 웃으며 물을 떠다주었다.
두 포기 옥수수는 마당에 있는 오이랑 가지랑 고추랑 같이 매일 잘도 자라갔다.초대소 바자 밖에서 자라던 나머지 몇 포기는 비에 씻겨갔는지 며칠 후에 온데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여름날,학교텃밭에 참관하러 와서 영양단지에서 자란 옥수수와 농가의 옥수수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선생님의 물음에 학생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학교텃밭의 옥수수가 농가의 옥수수보다 훨씬 더 빨리 자랐던 것이다.
(학교텃밭과 내가 심은 집마당 옥수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빨리 자랄까?그리고 우리 집 밭의 옥수수는 또 어찌 되였을까?...)
집 남쪽 영국더기에 위치한 부대를 지나 작은 산비탈에 할머니가 밭을 일구고 옥수수를 심었던 것이다.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집에 가다 말고 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4중 운동장을 지나 부대 구락부까지 거의 왔을 때, 할머니가 닭먹이 세투리를 가득 캔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오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이 더운데 찾아왔냐?"
소년은 옥수수를 보러 왔다 하기엔 우습게 생각되여 '아님다.그저...'하고 시무룩히 웃으며 할머니의 보자기를 받아 내려놓았다.
몇달 후,헐렁한 로동장갑을 끼고 학교텃밭의 옥수수를 따러 갔다.5.7분교 식당에서 삶아낸 옥수수를 맛 보면서 소년은 집마당의 옥수수는 언제 먹을수 있을까 궁리해보았다.집마당의 옥수수들도 거의 여물어가고 있었다.학교에 갔다오면 옥수수껍질을 조금씩 벗겨보며 살펴보군 했던 것이다.
한 열흘이 지났을까, 학교 갔다 집에 오니 할머니가 가마에 옥수수를 가득 삶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집 밭의 옥수수 맞지 예?"
"그래."
소년은 너무 기뻐 입이 함박만 해서 옥수수를 먹었다.
삶은 옥수수를 맛 있게 먹고나니 마당의 옥수수가 다시 생각났다.이젠 딸 때가 다 되였는데...
며칠 후, 초대소를 지나오는데 어느 집에서 옥수수를 굽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옥수수를 구워먹으면 맛 있겠다.풍로불에 구워볼까?)
집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두부장을 풍로에 보글보글 끓이며 맛 있게 먹던 것을 보고 언제인가 장난 삼아 진흙으로 쬐꼬만한 풍로를 하나 만들어 헛간에 두었다.
소년은 옥수수 한 이삭을 따서 껍질을 벗겼다.샛노랗고 통통하게 잘도 여물었다.
와!그 냄새 참 좋다!
젓가락을 옥수수에 찔러넣고 한참 풍로불에 옥수수를 굽고있는데, 어머니가 웬 키다리 젋은이 둘을 데리고 집마당에 들어섰다.가도 부녀주임직을 맡은 어머니였다.
"상해 지식청년이란다.형님이라 인사하거라."
형이 없다보니깐 동네의 키꼴이 큰 젊은이들을 자주 형님이라 불러왔다.
"형님...아니,거거 니호우?"
두 형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구운 옥수수가 맛 있겠다 라는 뜻으로 웃으며 서로 말하는 것 같았다.어머니는 옥수수를 절반 뚝 끊여서 형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형님들은 옥수수를 이리저리 빙빙 돌려보며 흠흠 냄새까지 맡더니 처음 먹는 사람처럼 맛나게 훑어먹는 것이였다.
상해에는 까짓 옥수수도 없을까 생각하면서 소년은 군침을 꼴깍 넘기며 아까워서 지금껏 먹지도 않은 옥수수인데 하는 눈길로 두 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건 못 먹어!"
한참 후, 소년은 송치까지 먹으려 하는 형님들의 손을 와락 잡아당겼다.그러자 형님들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더니 서로 마주보며 멋적게 웃는 것이였다.소년은 너무나 우스워서 배를 끌어안고 깔깔깔 웃어댔다.
그 날, 소년은 두 형이 쌍둥이란 것을 알았고 동네애들한테는 상해에서 온 형님들이라고 우쭐렁거리기도 하고 저녁에는 같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았다.
두 형은 인재였다.큰 형은 하모니카를 아주 잘 불었고 작은 형은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반짝이는 붉은 별》, 《영웅 아들딸》, 《갱도전》의 주제가뿐만 아니라 조금 발음이 우스웠지만 《꽃파는 처녀》에서 나오는 노래도 너무나 잘 불렀다.
두 형은 낮이면 동산자락에 위치한 길흥대대에 가서 일하였다.팔토시를 끼고 일하러 나서는 형님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
저녁이면 두 형의 하모니카와 노래소리가 울려퍼져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마당에 모여들군 하였다.그럴 때면 소년은 옆에서 옥수수 송치를 하모니카 연주하듯 흉내 내며 동네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옥수수를 삶고 있는 할머니한테서 홍범도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어머니가 형님들과 같이 바삐 집에 들어오더니 행장부터 차리는 것이였다.
형님들의 어머니가 사망하여 상해에 돌아간다는 것이였다.
눈물이 글썽하여 전보문을 다시 보던 큰 형이 가방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소년에게 주면서 뭐라고 몇 마디 부탁하더니 '짜이짼!'하고는 집문을 나섰다.소년은 할머니가 신문지에 감아준 삶은 옥수수와 하모니카를 량손에 쥐고 멀어져가는 두 형의 뒤를 초대소 대문까지 쫓아가며 울면서 불렀다.
"니먼 짠쭈.샹하이 거거먼!..."
집에 돌아와 소년은 보자기에 싸두었던 나머지 옥수수 한 이삭을 풀어헤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형들이 떠나는 줄 알았더라면 이 옥수수도 마저 구웠던 걸 그랬어!)
이듬해 봄,할머니는 집마당에도 옥수수를 심었다.
할머니는 소년이 남겨둔 옥수수 한 이삭과 같이 겨울 내내 벽에 걸어서 말려두었던 옥수수들을 손으로 부셔서 물에 불려 씨앗을 틔워냈다.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하게 물기에 어려있던 해볕이 좋은 날, 소년은 할머니와 같이 집마당에 옥수수를 심은 그 길로 집밭에 갔다.할머니가 호미로 흙을 파내면 소년이 씨앗을 뿌려넣고 흙을 도로 묻어주고 하였다.할머니의 손마디는 남자들 손처럼 굵직하다 못해 마디마디가 굳은살 투성이였다.
"왜서 세알 씩 뿌려라 함까?"
"하나는 새가 먹고 하나는 벌레가 먹고..."
"?..."
작년 봄에 학교텃밭에서 영양단지를 심을 때는 물 길으러 몇 번이나 갔다온 터라 몇 알 뿌려넣었던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맞지!
손기음을 매러 왔을 때 선생님이 마을의 년장자인,흰 수염을 날리는 할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와서 두 세개씩 자란 포기 가운데서 큰 것을 남기고 옆의 작은 것은 손으로 가볍게 뽑아낸 다음 흙을 꼭꼭 다독여주는 방법을 배워주셨지.
학교텃밭보다는 작은 밭이였으나 한나절이 걸려서야 옥수수를 다 심었다.
어느 여름날,발목을 상한 할머니 몰래 소년은 호미를 들고 밭에 와서 혼자 기음을 매면서 닭먹이 세투리도 한 자루를 캤다.비록 많이 지치기는 했어도 할머니를 대신해 어른들처럼 큰일을 해놓은 듯 마음이 뿌듯해나고 가슴 한켠에는 벌써부터 풍작을 거둔 기쁨이 신선하게 넘쳐있었다.
"야커시 야커시 따자이디 뽀미 쩌머양디 창예..."
문득 옥수수 수염을 달고 노래를 부르던 샹하이 작은 형과 하모니카를 주고간 큰 형이 생각났다.
(쌍둥이 형님들은 잘 있는지?...)
그 해는 무슨 영문인지 보릿고개라는 계절에 소년의 집도 쌀고생에 시달리며 옥수수떡에 푸대죽까지 먹은 나날들도 있었다.배 고파서 옥수수대를 물짜서 먹었다던 할머니의 말씀에 얼마나 배 고팠으면 그런거까지 다 드셨을까 속으로 웃었던 소년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설음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그때에 알았다.
그 때가 1974년이였으니 소년이 열살 되던 해의 일이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이 벌써 네 번도 바뀌였다.
오늘 소년은 아니,이젠 중년이 된 그 때 그 소년은 지금은 많이 낮아 보이는, 아직도 빨간 토성인 시정부 옆 옛적 초대소였던 자리를 지나면서 소년시절의 옥수수와 샹하이 형님들을 마음 속에 다시 그려본다.
                                                                             
《청년생활》 2016년 7월호

                                          떨어진 단추 하나 
 
 꽃샘추위가 한창인 어느날 아침, 출근하려고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걸치려는 순간, 딸랑 하고 단추 하나가 떨어졌다. 
채우고 벗기고 드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오고싶었을가. 나는 떨어진 단추를 다시 달기 시작했다. 쉰고개를 넘긴 남정이 바느질을 얼마나 잘 하랴만 한뜸한뜸 열심히 꿰나간다...
코물 훌쩍거리며 뛰놀던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손수 지은 솜옷저고리에 똑딱단추(호크라고 불렀다)를 달아주셨다. 새 솜옷저고리보다 똑딱똑딱 소리나는 단추가 더 신기해 애들 앞에서 뚜루룩~ 기관총처럼 단추를 벗기기도 하고 똑딱똑딱 채우기도 하며 자랑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날, 단추 하나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버리니 저도 모르게 남은 단추들이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추운 겨울밤이나 무더운 여름밤에도 할머니는 곧잘 돋보기를 걸고 양말이며 옷가지들을 깁고 집안의 옷들을 하나하나씩 단추가 떨어질세라 꿰매군 하셨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려다가 돌덩이 하나가 비어 졸지에 당황했던것처럼, 자리 하나가 비여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되여 울음보를 터뜨렸었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저녁, 야시장에 나갔다가 40대 중반의 사나이가 단추난전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진렬장에는 까만색, 빨간색, 흰색, 노란색, 파란색, 갈색 등 가지각색 크고작은 사이즈의 단추들이 놓여있는가 하면 금속, 유리, 플라스틱, 나무 등 재질들 뿐만 아니라 수공으로 만들어져 보이는 천단추까지 있어 진렬장은 그야말로 한폭의 멋진 수채화를 방불케 하였다. 각종 단추들은 그 어떤 옷에도 어울릴수 있게끔 준비되여있다는 듯이 자신감들로 차넘쳤다.
"장사 잘 되나요? 사는 손님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큰장사 바라는 거 아니지요. 허허!"
"네?..."
"멋진 디자인에 값진 옷도 단추 하나가 떨어지면 입지 못하게 되지요. 그런 단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꼭 찾아오거던요."
"아!"
감탄 비슷한 것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해인가 한국출장 다녀오면서 롯데백화점에 들려 안해가 좋아하는 자주색 봄가을철 세타를 사왔다. 평시에 그렇게 아껴입어오던 세타였는데 어느 날 가슴앞섶의 갈색무늬 단추 하나가 그만 떨어져나갔다. 안해는 며칠동안이나 백화며 시장이며 복장점들을 돌아다니다가 비슷한 단추를 찾다못해 "그 아까운 옷을 그저..."하고 많이 아쉬워했다. 그때 안해가 이런 단추전문난전을 만났더라면 오죽 좋았으랴 싶었다.
지금은 옷가지들마다 여벌단추가 달려있고 옷장에 옷들이 넘쳐나 까짓 단추 하나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간혹 떨어진 단추 하나가 면바로 눈에 띄였거나 달랑 실오리 하나 남아 떨어질 번한 단추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집에 와서 다시 꿰맬 때는 새옷이라도 사입는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단추 하나가 어느 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곁을 떠난 것을 보면 뭔가를 다시 뉘우치게 되고 그 사나이의 말처럼 단추를 찾아다니게 되지 않을까.
평시에는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단추일지라도 정작 잃고난 다음에는 아쉬워지고 그리워진다.
텔레비죤이나 자동차의 리모콘, 엘리베이터의 버튼, 컴퓨터의 키보드 등에 단추 하나가 비여있으면... 명절날 오손도손 모여앉은 부모형제 친척들가운데 어느 누가의 자리가 하나 비여있으면, 오래간만의 즐거운 친구들 모임에 한 친구가 자리를 비우면 과연 어떻까? 
우리는 단추를 잘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끊기지 않는 실과 깨지지 않는 단추처럼 좋은 인연을 계속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서로를 동여맨 실이 지탱끝에 풀려 쓰라린 리별의 바닥에 떨어져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는가?
떨어진 단추 하나는 다시 달면 되겠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그 무언가를 떨어뜨리고도 깨닫지 못하고 앞섶을 훤히 열어젖힌채 걷고있는 건 아닌지?
느슨해진 마음을 단단한 실로 다시는 풀려지지 않게 꽁꽁 끄러매는 아침, 제자리를 다시 찾아 고개를 번쩍 쳐들고 동그란 눈을 대롱거리는 단추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더없이 흐뭇했다.
 
<청년생활>2016년제4월호
             
 


                                니 춥지 않니?
 
"니 춥지 않니?"
"나 안춥다."
 
조명희의 소설 "락동강"에 나오는 한 대화대목이다.

고중 다닐 때 조선어문수업시간에 <락동강>을 랑독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김호와 키득키득 웃었다. 대화 군데군데에 사투리가 많이 섞여있어 재밌고 우스워서였다. 우리 둘은 과문을 본따서 "니 춥지 않니?" 하고 물으면 "나 안춥다."하고 대답하고 "니 춥지 않니?" 되물으면 "나 안춥다."하고 대답을 주고받군 했다.
그후부터 우리는 이런 유머스런 말투로 많은 날들을 보내왔다. 
농촌티를 약간 벗어난 진중학교 겨울철난방은 난로였다. 국경절기간에 불쏘시개로 싸리나무 세단이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어느날, 나와 김호는 낫을 들고 강건너 깊숙한 산으로 싸리나무하러 갔다.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물든 산중턱에 올라섰다.
"니 맥없지 않니?"
"나 안맥없다."
둘은 나지막한 풀숲을 찾아 앉았다.
10월의 따뜻한 해볕이 내리쬐여 겉옷으로 입고있던 군복을 벗어버렸다.그리고는 사과배를 꺼내 먹었다.
"니 맛있니?" 
"나 맛있다."
작은 진을 둘러싸고있는 과수원에 풍년이 들어 사과배는 귀한 과일이 아니였다. 한참후 싸리나무를 베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단이 되면 꽁꽁 묶어서는 눈에 잘 띄이는 큰 나무밑에 갖다놓군 했다. 세단이 거의 되여갈 무렵,
"아가!"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호가 나무가지에 손이 찔린것이다.
"니 일없니?"  
"나 일없다."
다가가서 보니 크게 찔리지는 않았다.우리는 나무지게를 해서 싸리단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그해 겨울은 지독하게도 추웠다.교실에서 손을 호호 불며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다.
"니 춥지 않니?"
"나 안춥다."
이듬해 대학시험에 우리는 모두 락방하였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군대에 갈가 하다가 재학하기로 했다. 김호는 현성고중복습반을 택하고 나는 그냥 남아서 문과를 하기로 했다. 김호가 현성고중에 가는 전날밤 저녁, 나와 김호는 처음으로 상점에서 락화생을 놓고 독한 흰술을 마셨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꾸 치밀어오르는 것같아 쓴것을 그대로 쏟아넣군 했다.
"니 취했지 않니?"
"나 안취했다." 
둘은 서로 반짝이는 이슬을 쳐다보다가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이듬해 우리는 모두 대학에 입학했다.
...
졸업후 나는 ××학원에, 김호는 ××병원에 배치되였다.
하해(下海)붐이 일던 그 당시에도 교원과 의사는 사회존중을 받는 좋은 직업이였다.남편으로, 아빠로, 교사로 보내오던 몇해후엔 좋은 집이라 말할 수 없어도 세방과는 "안녕!" 할 수 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층집도 차려졌다.
한해에 고작 한명이 대학에 입학하나마나하는 작은 진마을에서는 "개천에 룡이 났네", "촌놈이 성공했네" 하고 떠들썩하며 야단법석이였지만 나한테는 오히려 부담이라 할가 앞으로 성큼 미래를 향해 더 이상 발을 내딛지 못할까 봐 어정쩡한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좋은 자리에서 철밥통을 꼭 끌어안고 국가봉금을 계속 타먹으며 퇴직할 때까지 편안하게 보낼 것인가? 지금은 젊은이들을 많이 중용하는 시기인데 승진도 노려볼 것인가?
아니다. 고민 끝에 일본류학을 결정했다.
대학일본어시험출제번역과 채점도 몇년간 하였고 학위를 따고오면 외지대학 일본어학부에 들어가는데도 큰 지장이 없잖겠는가?
지금은 통신이 발달하였지만 그땐 사무실전화도 변변찮아 친구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직접 집이나 직장에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서로 직장생활에 바삐 보내다보니 작은 시내에서도 나와 김호는 만날 사이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와 김호는 조용한 식당에서 만났다.
"니 잘 있었니?"
"나 잘 있었다."
오래간만에 다시 주고받는 말이라 서로 소리내여 한바탕 웃었다. 
"나 며칠후 일본에 류학간다."
"그래?"
"석사공부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어서..."
"좋은 일이지. 나도 병원에 계속 있자니 경쟁도 심하고..."
오래간만에 어쩌다 만났다가 좋은 얘기들을 나누지 못하고 며칠후 일본에 간다고 말을 꺼내자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학원은 어쩌고?"
"글쎄, 갔다와서 보지뭐."
정작 몇년간 열심히 일해온 학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니 괜찮니?"
"나 괜찮다."
...
일본에서 돌아온 날, 훤한 대낮인데도 수도공항이 어두워 보이고 세관인원들의 오만한 태도와 거치른 말투에 와락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비행기를 갈아타고 집에 오니 기분이 좋고 소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무척 커보였다. 몇년 안되는 사이에 여러 중점중학교들에서 일본어과목대신에 영어를 많이 설치하였다. 일본어교원이 넘쳐나 교무처나 도서실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래도 조선족학생들은 대학시험에서 영어보다 일본어가 우세가 아니였던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학원의 업무도 대폭으로 줄어들 것은 뻔한 일이다. 한편 지방대학 일본어학부에서도 학생들이 줄어들어 일본어기초가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령기점"(零起点)반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외지 대학에 가려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혼자서 애를 키우며 고생한 안해한테 차마 말을 꺼내기가 거북하고 미안한 감도 들었다. 마침 대학시절 은사였던 일본어학부장님의 요청이 있었다. 
나는 며칠동안 밤늦도록 안해와 토의하고 고려하다가 결국에는 외국어양성학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 그리고 컴퓨터학과를 설치하고 일본류학도 겸하였더니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한창 30대 초반이라 어느 가능성으로던지 길은 다 열려져있는 것처럼 세상이 커보이고 매일 매일이 에니메이션처럼 신비롭고 재밌는 그림책을 한장한장 넘기듯 신선한 흥미에 넘쳐있었다. 이듬해에 딸이 태여났다.
...
일본류학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국에서 금방 박사학위를 따고온 김호가 퇴근길에 사무실로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쉴새없이 걸려오고 류학비용이요, 학비송금이요, 비자신청이요 업무에 분주히 보내는 직원들로 사무실은 북적거렸다.
"너 참 바삐 보내는구나.나 요즘 ××의과대학부속병원 전근수속중이다. 여기보다 조건이 많이 좋아서..."
"오. 김박사 축하!"
친구들중에서 김호가 유일한 의학박사였다.기실 나도 일본에서 박사과정까지 생각해보았지만 당시는 옆에서 진로를 일깨워주는 지인도 없고 돌격대처럼 혼자 앞장에 나섰다가 전투가 끝나자 곧바로 전장을 수습하고 본영에 되돌아왔었다.  
그날 저녁 나와 김호는 밤깊도록 술을 마셨다.
"니 이전에 모교일본어학부에 들어가지 않은 걸..."
"그건 왜?"
"니 후회하지 않니?"
"나 안후회한다."
김호의 말에 얼굴이 약간 뜨거워났다.
"앞으로 어떻게 하자고?"
"이대로 밀고나가다가 보지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나를 한참 지켜보더니 김호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니 변했지 않니?"
"나 안변했다."
...
딸애가 소학교 3학년, 아들이 고중2학년이던 어느 해 봄, 정부에서도 제일 분망한 부문인 접대처에서 처장으로 일보던 안해가 신체검사에서 그만 페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말기라는 것이다. 청천벽력이였다. 해마다 여름철은 업무분망기여서 새벽 일찍 나갔다가 저녁늦게 들어오면서도 기침 한번,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던 애엄마가 아니였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창 사업할 나이에 큰 봉변이 닥쳐온 것같아 못마땅하고 억울하게 생각되여 한심한 나의 처지에 경악하면서도 그동안 안해를 더 따뜻하게 사랑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되고 부끄러워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들의 대학시험까지만 보아도 한이 없겠다던 애엄마를 꼭 살려야 한다! 
나는 항암치료를 받는 안해를 보살피는 한편 이곳저곳 수소문하여 좋다는 밀방약들을 구해들이고 김호도 다른 큰병원에서 지방병원에 없는 고급약들을 알선해주었다.
허나 병마는 너무나도 무정하였다. 아들의 대학입시 열흘을 두고 안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업 하랴, 안해 병시중 들랴,두 아이의 아빠 할랴, 엄마대신 할랴 그동안 바삐도 보냈던 나 자신이 마치 삶의 온갖 전선을 걸치며 고군작전하다가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패잔병처럼 느껴졌다.
...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내보내고 아픈 추억만이 찢겨진 가슴에 스며들어 우울하고 어두운 날을 묵묵히 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보아왔다. 남들이 껶지 않는 싫은 경험에 모대기며 험난한 처경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어찌 나 혼자뿐이랴.
나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였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은 앞길에 수없이 가로놓인 난관과 도전을 하나하나 헤쳐가는 과정이 아닐까? 살다보면 아스팔트가 깔린 탄탄대로만 걷는 것이 아니라 때론 자갈길이나 비탈진 길도 걸으면서 내성을 더욱 튼튼하게 키워가는 것이 아닐까?
내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어느 날 어머니가 "에구, 그만 정신 차리거라. 그러다 몸을 상하겠다. 이젠 애들을 잘 키워야지. 쯔쯔쯔..."라고 푸념하신다. 나는 굳게 의지를 다짐하면서 다시 사업에 뛰여들었다. 
3년전에 아들은 북경 모 중점대학을 졸업하고 딸은 명년이면 대학시험을 치른다.
...
생의 전반전은 낯선 상대를 만난 것처럼 어영부영 보내왔지만 후반전에는 보다 열렬하게 사업과 현실의 잔디밭에서 지금껏 익혔던 인식과 정열을 한껏 쏟으며 열심히 뛰고 싶다.
세상을 한참이나 얼궈놓았던 찬바람이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새들이 시름놓고 하늘을 나는 걸 보니 따뜻한 봄도 다가온가보다.
며칠전에 저 멀리 김호한테서 연락이 왔다. 래일이면 휴가를 맡고 고향에 놀러온 김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옛날 김호와 주고받던 대화가 언뜻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니 춥지 않니?"
"나 안춥다."

그래, 난 춥지 않다. 나에게 항상 웃음을 주고 뜨거운 힘이 되여주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 소중한 친구들과 나에게 수많은 하트를 보내주는 이들이 있기에...
 
<청년생활>2016년4월호



                      갓 담근 배추김치 

김치는 우리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김치가 없으면 입맛이없고 무언인가 텅 비여있는 것 같다. 그야말로 김치는 "그대없인못살아"인가 보다.
 
누가 말했던가.김치는 정성과 사랑의 손맛이라고.
 
나뭇잎들이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뒹굴어대는 퇴근길에 갓 담근 배추김치를 가져가라는 누님의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에 한국에서 돌아온 누님이다.
 
누님은 집에서 한창 나긋나긋한 배추들에 양념을 바르고 있었다. 큰 그릇에 차곡차곡 담겨있는 배추들과 그 옆에 놓여있는 빨간 양념이 고운 빛깔로 잘 어울려 김치라고 하기보다는 멋진 가을의 풍경을 방불케 한다.
 
"맛이 어떤가 보렴."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을 묻혀 나의 입에 넣어주는 누님은 나의 입에서 무슨 퉁명스런 말이라도 나올까봐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음, 맛있네."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간은 맞나?"
 
"딱 좋은 같은데..."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시장이나  슈퍼에서 파는 김치들과는 확실히 뭔가 다른 오묘한 조합이다.
 
"어떻게 만들었어?" 음식솜씨가 좋은 누님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짐짓 모르는 체 물었다.
 
"어머니한테서 배운거지 뭘." 웃으며 말하는 누님을 보니 저도 모르게 구수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김장철이면 나와 누님은 어머니를 도와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며 마늘을 바르고 절구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빻았다. 어머니는 양념에 묻힌 배추속잎을 아버지와 누님과 나에게맛보게 한다. 아버지가 조금 짜다고 하면 김치 사이에 무우 몇 쪼각을 밀어넣고 누님이 싱겁다고 하면시집이나 빨리 가서 간을 잘 맞추라며 농담조로 말한다. 옆에서 허허 웃고만 있던 아버지도 어머니를 도와 움에 내려가서 김치들을 한 포기,한포기 씩 김치독안에 넣는다. 
  
어머니는 식장 옆에 놓아두었던 김치와 남은 양념들을 학교숙소에 가지고 가서 먹으라며 양념을 통조림통에 가득 넣어주신다. 잘 먹이지 못하는 자식들에게 김치라도 맛있게 먹일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아버지와 빨갛게 물든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웃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저녁이면 김치를 쭉쭉 찢어 뜨끈뜨끈한 밥에 올려놓고 한입에 쑥 넣어보면 김치의 새콤달콤한 맛이 혀끝에 감겨든다. 갓 담근 김치를 맛나게 먹던 그제날의 밥상이 머릿속에 다시 안겨온다.
 
지금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김장철을 따질 필요도 없고 시장이나 슈퍼에 가면 언제나 맛있는 김치를 사먹을 수 있기에 집에서 김치를 담글 필요도 없지만 누님은 그래도 집에서 어머니처럼 절로 양념을 만들어 김치를 담근 것이다.
 
한국에서도 해마다 김장철이면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기에 여념이없다. 그래서 누님도 손수 김치를 담근 것인가.
 
"택배번호를 아나?"
 
어느새 김치 두 봉지가 주방에 놓여있다. 보나마나 외지에서 근무하는 아들과 조카한테 보내려는 것이다.
 
"애들은 괜찮은 같은데..."
 
"김치라도 맛있게 먹이고 싶어."
 
조카와 아들이 요즘은 외식하지 않고도 집에서 뜨끈뜨끈한 밥에 어머니와 큰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누님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의 음식문화는 이렇게 세세대대로 이어받고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밖에 나와 올려다본 창문에는 누님이 그냥 서있는다.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귀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김치를 가지고가는 나의가슴속으로 늦가을의 밤바람이 훈훈하게 스며든다.
 
요사이 나는 누가 밥먹자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을 것 같다. 갓 담근김치만으로도 만족스런 밥상이 되니깐.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이세상에 또 있을까. ♡
 
편집︱흥경선비
 
2016년10월27일 하나로
 
 
      장꼬박
 
장꼬박?
혹시 밤을 꼬박 새가며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하는가,아니면 누구의 별명인가?
아예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장독대!
이렇게 말하면 장독대면 장독대지 무슨 장꼬박인가?하고 눈을 흘길 것이다.
집마당에 된장을 담은 크고작은 항아리들을 돌이나 널판자로 받쳐 올려놓는 장독대.
지금은 도시생활을 하면서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손쉽게 된장이랑 구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거의 집집마다 집에서 된장을 만들었고 집마당에 들어서면 장독대가 보였다.어렸을 때 나는 장독대 뒤에 숨어 애들과 숨박꼭질도 했고 올망졸망 모여앉은 항아리들 위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장난질도 했다.여름이면 마당에 심어놓은 풋고추며 오이들을 뜯어 된장에 찍어먹기도 하고 눈 내린 겨울아침이면 장독대 뚜껑 위에 눈이 몇 센치나 쌓였는가 재보기도 했다.할머니가 장독대를 장꼬박이라 불렀기에 나는 그런 줄로 생각했는데 장독대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생이 되어 홍명희의《임꺽정》을 읽고나서였다.
어느 날, 옆집에 사는 형님이 마루에 앉아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있기에 가만히 뒤에 다가가서 책속을 들여다보았다.

...돌석이는 장독대에 뛰어올라가 작은 항아리 하나를 번쩍 들어 내던졌다.된장을 담은 항아리가 김씨의 머리에 맞아 깨지면서 된장물이 쏟아져나왔다...

"아이구. 깜짝이야!"
인기척에 놀란 형님이 책으로 나의 머리를 가볍게 쥐여박는다.
"형님, 무슨 책이요?"
"오. 임꺽정이라는 소설책인데 너같은 애들은 봐도 몰라."
"형님, 그 책을 빌려주면 안되겠어?"
"내일 또 봐야 한다."
"그럼 내일 돌려줄게."
나는 이튿날 아침까지 책을 다 읽고 형한테 가져다주었다.
"벌써 다 읽었어? 엇저녁 자지 않고 읽었어?"
"아참, 형님, 이전에 할머니가 장꼬박이라 했는데 이 책 보고 장독대라는 걸 알았어. 왜서 장꼬박이라 했을까?"
"장꼬박이라? 음...글쎄다. 너처럼 밤을 꼬박 새웠다는 꼬박인데..."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장꼬박을 그만 까먹고 있던 며칠 전이었다.
경주에서 번역컨설팅을 하는 친구가 출장차 연길에 왔다. 일본에 함께 유학하면서 중국에서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만 먹는가 했다며 된장찌개를 맛나게 먹는 나를 놀란 눈길로 쳐다보던 친구였다.
친구가볼일을 마친 날, 우리는 시교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겨울철이라 음식점 마당에 들어서자 담장아래에 눈 덮힌 장독대가 줄지어 서있는것이 보였다.
"아, 장꼬박!"
장독대 쪽으로 뛰어가며 친구가 외치는 것이었다.
"장꼬박을 여기서 다시 보네!"
장독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친구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장꼬박. 허허. 여기서는 이런 말을 안하지?"
나는 시무룩이 웃으며 친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아까 한 장꼬박 말인데 이젠 수십년동안 들어보지 못했네. 이전에 할머니가 그냥 장꼬박이라 하셨거던."
"그래? 장꼬박은 경상북도 사투리인데 그럼 할머니도 경북출신인가 보네."
"그렇네. 근데 장꼬박이 경상북도 사투리였어? 왜서 장꼬박이라 부르지?"
"글쎄 말이네. 방언이라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 경북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네. 80고령의 어머니도 가끔 장꼬박이란 말을 쓰고 계신다네. 언젠가 아버지한테 물어봤더니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는 흙덩이라고도 하던데..."
"흙덩이라고?..."
그날 저녁 나는 장꼬박을 검색해보았다.
장독대의 경상북도 방언이 맞았다.
헌데 왜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꼬박"을 붙혔을까?
"꼬박 밤을 새웠다.", "꼬박 며칠이 걸렸다.", "꼬박 이틀이나 잤다.", "꼬박꼬박 챙겨먹다.", "매년 꼬박꼬박 상위권에 오른다." 등등의 꼬박을.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각지에서 사용된 우리말 방언의 진의를 알 수는 없었지만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여기저기서 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지방에 따라 장꼬박, 장꽝이, 장뚝간, 장독거리 혹은 장독곳 등 방언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옛날 궁궐에서는 "장고" 라고도 불렀는데  "장고마마" 라고 하는 장을 담는 일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상궁도 따로 있었다 한다.
비록 그럴 법한 해석은 찾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시골집 장독대를 보고 친구와 함께 포근한 옛 고향집 된장 냄새를 서로 다시 떠올린 것만으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된장은 잘 발효시킨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이며 조상들의 지혜이다. 맛있는 된장을 만들려고 메주를 써서 장독대에 넣고 매일이다싶이 뚜껑을 열어 햇볕을 쪼이고 바람이 들게 하고 비가 올까 싶으면 빨래보다 장독대 뚜껑을 먼저 닫던 할머니의 정성과 물 한 그릇 떠넣고 춧불 한 대 켜놓고 천지신명님께 자식들이 잘 되라고치성을 드리던 어머니의 숨결이 어려있는 장독대가 아니던가?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 할머니들의 오랜 전통과 정성을 이어받고 이어가는 오늘 날,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각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치고 된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오래 먹어도 평생 먹어도 싫증 나지 않고 세월이 흐를수록 새록새록 정이 드는 된장은 항상우리의 식탁에서 빠질줄 모른다.
이튿날 나는 귀국하는 친구에게 우스개를 건넸다.
"한국 가서 장꼬박의 유래를 잘 알아보시게."
그러자 친구도 농담조로 대답한다.
"알았어. 박형도 밤을 꼬박 새지 말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잘 알아보시게."
"하하하."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온 시내가 들썽하게 웃었다. 하늘의 햇님도 장꼬박의 얘기를 들으며 오늘도 구수한 된장 맛을 내느라 서로의 마음이 모여 빛을 반짝이는 장독대에 눈부신 햇살을 한껏 비춰주는듯 했다.
 
2016년12월18일 서울동북아신문



                                작아지는 공간
 
기차가 홈에 들어서자 나는 호주머니 안의 담배를 매만졌다. 네시간 남짓한 고속철에서 담배생각이 무척 났었다. 소리도 크게 없이 미끌어오던 조용한 차안과는 달리 밖에 나오니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새해의 첫눈이다.나는 흡연장소를 찾아 담배를 피우려다말고 려객들을 따라 출구를 나와 자그마한 커피솦을 찾아들어갔다.이제 갈아탈 고속철시간까지 한시간이나 남아있기 때문이였다.커피 한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아까부터 쉴새없이 울리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담배 피워도 되나요?"
마담한테 물어보려는데 금방 올라온 뜨거운 커피에 하고싶던 말을 삼켜버렸다. 코끝에 피여오르는 너무 좋은 커피향이다.커피를 마시며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흘러간 세월을 돌이켜보는 기분 또한 멋져 보인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고 몰라도 좋을것은 일찌감치도 배워버린 우리 시대가 아니였던가? 아버지 담배를 한대 가만히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변소에서 피우다가 옆집 아저씨한테 발각되여 아버지가 알면 어쩌랴 두려웠던, 담배에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찼던 중학시절은 참 우습기도 하다.
대학에 입학한 첫날 저녁, 열명씩배치된 침실에서 익살쟁이 ‘남도치’ 동창생이 담배는 이렇게 피워야 한다며 코구멍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시범동작까지 해보였다. “칙칙폭폭-“ 하고 기차가 석탄연기를 길게 내뿜는 모습 같기도 하고영화에서 멋진 동작으로 뭔가를 사색하던 명배우가 련상되여 그 친구가 얼마나 우러러 보였던지.
결혼하여 첫아이가 태여나 부엌에서 불을 지피면서 아이한테 담배연기가 날려갈가 봐 아궁이에 후- 하고 담배연기를 불어넣던 모습은 지금도 새록새록 안겨온다.
오전 첫수업을 마치고 아침밥을 거른 허기찬 몸에 주임선생님이 준 담배를 한대 피웠다가 그만 머리가 윙 하고 어지러워나며 얼굴까지 벌개지면서 기침을 깇던 일을 생각하면 그때 왜서 진작 담배를 끊지 않았던가 싶다…
비록 골초는 아니지만 담배와 인연을 쌓은 몇십년 사이에 여러번 담배를 끊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남자가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 너무 쫀쫀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담배를 끊지 않고 출장길엔 꼭 담배 한갑은 지니고 다녔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실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어디를 가나 거의 모든 장소에서 흡연이 가능하였다. 말그대로 흡연자들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았고 눈치 볼 일도 없이 아주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뻐스나 기차에서는 물론 심지어는 비행중인 기내에서까지도 꺼리낌없이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들도 있었다.한번은 비행기에서 어느 손님이 담배를 피운 것을 모르고 좁은 화장실에들어갔다가 미처 빠지지 못한 매캐한 담배연기와 지독한 냄새에 그만 화장실에서 뛰쳐나오고말았다. 그 순간,문득 내가 피웠더라면 다른 손님들한테 얼마나 피해를 주었을가 하는 생각이 호되게 뇌리를 때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축구장이거나 뻐스정류소에서 바람에 날려오는 담배연기는 나도 여간 싫은 것이 아닌데 옆에 있는 아주머니들과 어린애들은 어떨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축구경기가 있은 날 저녁, 친구들과 홈장승리를 축하하고 집 울안에 들어섰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닌 여름 밤중에 우리 집 창문 옆에 웬 반디불이 반짝이고 있지 않는가? 자세히 보니 옆집에 살고있는 아저씨가 창문을 빠금히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였다. 새로 장식한 집안이 연기에 그을릴까 봐서일가 아니면 바가지를 긁는 안해가 두려워서일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럴것이 요즘 들어 많은 공중장소가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여있어 흡연장소를 찾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애간장을 태우고있지 않던가? 간접흡연이 몸에 더 해롭다는 집식구들의 인식으로 집안에서 피울 수가 없어 창문 밖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뀌였으니 그 심정인들 오죽하랴!
"밖에서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데 제집에서까지도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면 어쩌란 말인가?"
옆집 아저씨의 불만에 가까운 목소리가 담배연기를 타고 귀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촌놈"은 촌에서 살았다고 "촌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작년 가을 고속철이 개통된 지 얼마 안되여 한 려객이 화장실 안에서 가만히 담배를 피워 어느 차량에 화재가 발생하였는가 하여 기차가 중도에서 정차하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로 하여 얼마나 많은 려객들이 시간이 지체되여 안달복달했을가?
시대가 발전하고 공중문화도덕수준이 날따라 제고되여감에 따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작아지거나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다.
외국은 물론 지금 큰 도시에서는 전면금연까지 시도하고 있다.
커피솝을 나오면서 나는 아까 호주머니 안에서 매만지던 담배를 다시 생각해보았다.눈이 내려 한결 깨끗해보이는 광장, 높다란 간판들, 새해의 하늘 향해 치솟은 빌딩들,실북 나들듯 오가는 차량들… 탁 트인 바같에 나오니 작아지는 공간속의 담배가 더없이 초라해보였다.
 
<청년생활>2017년1월호
 
 


                           미역국을 끓이며
 
 오늘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딸애의 열아홉살 생일날이다.
 아침 일찍 미역국을 끓이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흐르는가 보다. 딸애가 언제이렇게 훌쩍 컸을가?
  8년전 딸애의 생일날 아침이였다.
  "엄마, 일어나 이 죽을 드세요."
  병원식당에서 죽을 사가지고 병실에 들어온 딸애가 침대에 누워있는 안해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 이쁜 딸, 생일 축하한다. 엄마 미안해. 생일날에미역국도 끓여주지 못하고..."
  딸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안해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있다.
  "괜찮아요.미역국은 엄마가 다 나은 다음 명년에 맛있게 끓여줘요."
  뜨거운 죽을 호호 불며 한숟가락 한숟가락씩 안해의 입에 떠넣어주는 딸애를 지켜보던 나는 그만 가슴이 찡 하게 저려왔다.
  명년 생일날에 너의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제 곧 엄마를 잃게 될 이 불쌍한 것아! 
  그래도 엄마를 위안하느라 이런 야무진 말까지 다 하다니.
  작년에 페암말기 진단을 받은 안해가 요즘 들어 병세가 위급해졌다. 이제 얼마동안이나 엄마 곁에 있을지 두려움과 불안에 쌓인 눈길로 하루에도 몇번이나 나의 귀에 대고 가만히 물어보는 딸애, 밤이면 엄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나오는 울음을 참고저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물을 틀어놓고 한참동안 서있고는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다시 엄마 곁에 다가가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주던 딸애이다.
  제일 기뻐해야 할 생일날 아침에 어린 딸애는 미역국 한모금도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러는 딸애를 생각해보니 마음 한 구석에 바위만한 멍울이 응얼져 좀처럼 내려가지를 않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몹시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둘쳐메고 뻐스정류소로 달려가며 눈굽을 훔치는 딸애의 뒤모습을 지켜보고서야 머리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녁에 집에 가서 미역국을 끓여가지고 병원에 가자!
  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간은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무슨 양념을 넣어야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어 한식경이나 조리하다보니 뜨거운 열기에 얼굴은 땀으로 흥건하였다.
  보온병에 미역국을 담아가지고 병실에 들어서니 마침 대학입시를 몇달 앞둔 아들이 와있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안해에게 들려주는 딸애도 함께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 네 식구는 병실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안해는 맛있다는 말은 몇번이나 하면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냥 주체하지 못한다. 옆에서 엄마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를 부르는 딸애를 안해는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모녀간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혈육과의 리별의 시각을 하루하루 기다려야만 하던 딸애의 열한살 생일날이였다.
  그로부터 어언간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마다 딸애의 생일날이면 나는 안해 대신 이른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왔다. 
  딸애가 중학교 1학년이던 그해 생일날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사무가 분망하여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놓고 오후시간을 타서 미리 딸애의 저녁밥을 집에 가져가고는 다시 회사로 나갔다.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식탁을 보니 오후에 사다놓은 케익과 햄버거는 남아있고 아침에 끓인 미역국은 다 먹고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 전등을 켜고보니 딸애는 몇해전에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꼭 끌어안고 자고있는 것이였다.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사진을 안고 자고 있을가? 딸애의 두 눈은 퉁퉁 부어있고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는지 얼굴에는 눈물자욱이 선명했다. 생일날 밤 엄마를 그리며 울다가 잠든 것이였다. 이튿날 오후 반주임선생님한테서 딸애의 작문을 반급에 공포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하도 궁금하여 저녁에 귀가한 딸애에게 물었더니 딸애는 수줍게 웃으며 작문을 꺼내놓고는 방에 들어가 흐느끼는 것이였다. 작문제목을보니 "아빠의 미역국"이였다. 엄마가 병환에 계실 때 나는 생일날에 미역국도 먹지 못하는가 생각되여 혼자서 서럽게 울었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여가지고 병원에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미역국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돌아가신후부터 아버지는 매일 나를 어떻게 키울가 끼니를 어떻게 맞출가를 념려하신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가 끓여주신 맛나는 미역국을 먹으며 아버지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려고 이제부터 집안일도 도와드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중점고중과 중점대학에 입학하겠다는 내용이였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미역국을 끓이며 언제면 딸애가 클가 언제면 대학에 갈가 근심과 조바심으로 한해두해 보내왔는데 오늘은 왠지 예전과는 달리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을 이루다 형언키 어려워진다.
  딸애가 나의 곁을 떠날 날이 꼭 올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어도 정작 이제 언제 다시 미역국을 끓여주랴 생각하노라니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여오며 속이 휭하니 비여버린다.
  그 사이 딸애를 친척집에 맡겨두고 큰 도시나 외국에 가서 사업하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딸애의 장래가 걱정되여 오늘 이때까지 묵묵히 딸애의 옆을 지켜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딸애가 공부에 열중하도록 한 선택에 나는 조금만한 후회도 없다.
  구수한 미역국 냄새가 풍겨온다. 
  비록 별다른 음식은 아니지만 오늘은 딸애에게 뜨끈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다. 
  나는 미역국 한 그릇을 먼저 식탁에 떠다놓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는 딸애를 깨우려고 방에 들어간다.
  우리 이쁜 딸,생일 축하한다!
  미역국을 맛있게 먹고 이제 다가오는 대학입시를 잘 맞이하거라!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여 내 곁을 떠나게 될 딸애를 오늘은 한번 안아주리라!
  지금껏 너무나 잘도 자라준 딸애가 이 시각 더없이 고맙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사랑한다. 나의 딸아!
 
  2017년3월17일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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