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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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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그 여름날의 소낙비
2020년 01월 11일 16시 00분  조회:1119  추천:0  작성자: 살구나무
<연변문학>2019년12월호 


단편소설

그 여름날의 소낙비 

박명선 

1.


아침해살이 낡고 칙칙해보이는 입국관리국 청사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저 대문은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의 불안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눈꼴사납게 지켜보고 있을가.저 청사 안에는 수갑을 찬 외국인들이 몸서리치는 철창이나 감옥 안에 갇혀있는 게 아닐가?
도꾜 쥬죠(十条)에 있는 입국관리국은 출입국관련업무를 취급하는 여느 지방입국관리국들과는 달리 불법체류외국인들이 자진출국수속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고 불법체류외국인들을 감금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찰차 몇대가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대문 안에서 달려나오고 있었고 피부색과 복장색이 각양각색인 외국인들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대문 앞에 포로병들처럼 줄지어 서있었다.
"이젠 너희들은 돌아가라.나 혼자 들어갈게."
병호가 나와 상준이를 멈춰세우고 혼자서 스적스적 앞으로 걸어갔다...


2.

그 날은 룸메이트인 상준의 생일이였다.상준이는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좀 앞섰다.우리 모두 작년 가을에 일본에 왔으니 일본에서 처음 맞는 상준의 서른살 생일인 것이다.
요꼬하마는 6월 중순부터 련며칠째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였다.바깥에서 몇분만 걸어도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고 보면 적삼은 허연 소금기에 얼룩져있었다.금년은 작년보다 더 덥다고 한다.엇저녁 뉴스에서 한 젊은 녀성이 점심시간에 어린 아기를 차안에 두고 빠찐꼬점에 들어가 십여분간 게임을 놀다가 불쑥 아기생각이 떠올라 주차장에 달려가보았더니 아기는 이미 차안에서 질식사했다고 보도했다.제일 더운 점심시간에,그것도 차안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을 어떻게 보낼가.추위보다 더위에 약한 체질인 나의 머리 속으로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퇴근길에 집 부근 패밀리마트에서 상준이가 좋아하는 기린맥주를 사가지고 집대문에 들어서자 웬 남자의 웃음소리가 2층에서부터 들려왔다.
"하하.조선족이라고?"
최형은 아니고 누구일가?
최형은 우리 집에 세번 놀러 왔기에 알고 있었다.최형은 상준의 고중선배인데 상준이가 최형,최형이라고 불렀기에 나도 최형이라고 따라 불렀다.최형은 재작년에 도꾜공업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 전자회사에 취직했는데 한국의 부인과 일곱살 난 딸애를 일본에 요청하여 지금 도꾜 니혼바시에서 살고 있었다.
집문을 열자 최형이 방에서 달려나와 맥주를 받으면서 경기도 한고향사람이고 상준의 소꿉친구라며 약하고 키가 작은 남자를 나에게 소개했다.아까 패밀리마트에 들어가려 할 때 큰길 건너편 골목에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던 남자였다.
"신병호입니다."
히죽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하는 병호가 처음부터 눈에 거슬려 보이고 아니꼽기까지 했다.나는 례의적인 인사를 하고 상준이와 같이 신할머니가 주신 김치와 엇저녁에 사놓은 통졸임,쏘세지,마른 안주 등속으로 술상을 차렸다.
이윽고 넷은 술상에 둘러앉았다.
대낮의 열기가 빠지지 못해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다다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군 했다.하지만 다다미 냄새도,땀냄새도 아닌 고약한 냄새가 나의 옆에 앉은 병호한테서 풍겨왔다.
나는 가만히 상 밑을 내려다보았다.
헉!병호의 발가락 사이에 까만 때가 가득 끼여있지 않는가.아까 신을 벗으면서 보니 며칠이고 씻지 않은 듯한 회색 양말이 전복된 고기배처럼 뒤엎어진 운동화 옆에 나자빠져있었었다.
그의 발에서 냄새가 풍겨왔던 것이다.
더러운 발이나 씻고 술상에 앉으면 좋지 않느냐.너깟 자식이 아까 조선족이라고 웃어댔단 말이냐!
나는 속으로 병호를 꾸짖으며 냄새를 피해 좀 옆으로 옮겨앉았다.
최형이 먼저 맥주를 따르고 생일축하한다며 잔을 추켜들었다.꿀꺽 하고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옆에서 울려왔다.최형과 상준이가 절반 마시고 잔을 내려놓기 바쁘게 병호는 단숨에 잔을 굽냈다.
"연변은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에 시가지의 하늘이 새까맣고 비가 내리면 장화를 신고 다니고 사람들은 예나 응이 아닌 양이란 방언을 쓴다던데...양,양 하고...하하."
짐작 대로 병호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너 연변을 잘 아는구나."
나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반말이 흘러나왔다.
"저와 반말 했어요?"
병호가 어리둥절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와 반말 못할 게 뭐냐?"
나는 병호를 째려보며 목소리 톤을 높혔다.
"그래,우리 셋이 동갑이니 서로 말을 놓아라."
성격이 과격한 나를 잘 알고 있는 상준이가 수탉처럼 싸우고 있는 우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자 병호는 나에게 힐끗 눈을 흘겼다.
"그럼 그러지 뭐.헌데 말이야.재작년에 인천에서 같이 일해봤는데 지린과 하얼빈에서 왔다는 조선족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더라.그리고 일본에 온 중국 류학생들은 돈이 아까워서 우동도 사먹지 않는다더라."
짜증이 잔뜩 어린 투로 나에게 한마디 더 내뱉더니 병호는 저가락을 들고 김치를 집었다.
"음,이 김치가 참 맛있네.이렇게 맛있는 김치는 처음이야.재일한국인들이 만든 김치겠구나."
상준이가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왜 웃어?아니야?그럼 일본사람들이 만든 거겠다."
"재일조선인이 만든 거야."
"뭐?방금 뭐라 말했지?"
상준의 말에 병호가 뜨악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상준이가 내가 지금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가게주인인 재일조선인 할머니도 성이 신씨이며 그 가게에서 파는 김치라고 설명하자 병호는 들고 있던 저가락을 탁 소리나게 밥상 우에 내려놓았다.
"중국 조선족이니깐 재일조선인 가게에서 일하겠지.안 그래?"
"너 말 조심해!"
아까부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형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일본에 와서 한민족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나 아직 중국에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회사 부장의 말에 의하면 매번 출장갈 적마다 중국은 몰라보게 변한다더라.일본과 한국은 지금 중국처럼 변하고 있나?앞으론 중국이야."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는 병호가 곁눈으로 보였다.
나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최형이 아니면 병호에게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 했다.저 자식이 대놓고 조선족들을 괄시하다니?일본에서 같은 민족한테 수모를 당하긴 처음이였다.중국에서 온 내가 만만하게 보였단 말인가?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밀어올랐다.지금이라도 방에 뛰여들어가 귀뺨 한대 갈겨놓았으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방에서 최형이 낮은 소리로 병호에게 뭔가 귀속말을 하고 있었다.주방에 오래 서있기 무엇하여 랭장고에서 맥주를 더 꺼내가지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좀 있더니 병호가 다시 방에 들어와 앉았다.발을 씻고 왔던 것이다. 
병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한테 다가앉으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가게 주인도 성이 신씨라고?헌데 그런 가게는 어떻게 찾았어?일자리 찾기 힘든데..."
나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지금 어디서 살고 어디서 일하며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고 되물었다.
"아,저...아까바네에서 살고 지금...세븐일레븐에서 일하고 있어.그리고...일본어학교..."
"자,우리 다시 건배!"
병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형이 술잔을 다시 들고 나를 보며 웃었다.이상한 느낌이 맞혀왔다.아까와는 달리 머뭇머뭇 대답하는 병호의 말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지만 술상 분위기를 봐서라도 더 따져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화제를 월드컵에 돌렸다.제15회 FIFA월드컵이 미국에서 열리고 있었다.오늘 새벽에 있은 스페인과의 첫 소조경기에서 홍명보와 서정원이 한꼴씩 넣었다고 내가 말할 때 병호가 다급히 물었다.
"오늘 한국이 찼어?어떻게 됐어?나 요즘 일이 바빠서 축구경기도 못 봤어.혹시 한국과 중국이 차면 넌 어느 팀을 응원하나?"
나는 중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한국과 일본이 차면..."
"물론 일본이지."
병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자 최형과 상준이가 큰소리를 내서 웃었다.
"너 롱담 하는 게 아니냐?"
병호가 게면쩍게 웃으면서 맥주를 따랐다.
잠간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병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밖에 나갔다오겠다던 그가 한식경이 되여서야 들어왔다.
그 사이 최형한테서 병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병환에 계신다는 것과 고중을 졸업하고 인천 어느 물류회사에서 일하던 병호가 일본인과 결혼한 누나의 신원보증으로 작년 봄에 일본어학교에 류학왔는데 비자가 만료되여 지금 불법체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였다.
아홉시가 되자 최형이 거나하게 취한 병호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웠다.주방 창턱에 놓여있는 한국수입제 진로소주도 가져와 혼자서 다 마셔버린 병호였다.
최형과 병호가 돌아간 다음 나는 신할머니를 떠올려보았다.오늘따라 반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반년 전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나와 같이 대련외국어학원 일본어교원연수센터에 연수를 갔던 심양친구가 사이다마대학 연구생으로 온 지 석달이 된다면서 집에 놀러오라 하기에 오오미야(大宫)에 가게 되였다.전차에서 내려 개찰구 쪽으로 가려던 나는 계단 옆에 있는 가게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여러가지 장식품들로 실내를 깔끔하게 가꾼 가게에는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60세 좌우의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팔고 있었다.가게에 다가선 나는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했다.
김치,떡국,평양랭면,신라면 그리고 고추가루도 있지 않는가!
손님이 가자 할머니가 가게를 나와서 진렬장 앞에 놓여있는 상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나는 고추가루 한봉지를 들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미안합니다.이 고추가루 얼마인가요?"
나는 고추가루를 일본어로 말하지 않고 우리 말로 말했다.
"한국 류학생인가요?"
책가방을 멘 나를 보더니 할머니도 일본어로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중국 류학생입니다."
"중국 류학생인데 고추가루는 어떻게 알아요?"
나는 다시 일본어로 대답했다.
"중국 조선족입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습니다."하고 우리 말로 말씀하시더니 나의 손을 덥썩 잡아주시는 것이였다.순간,나는 뜨거운 난류가 전신으로 흘러퍼짐을 느꼈다.할머니는 가게 안으로 나를 안내하면서도 두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와서 나는 할머니와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성이 신(申)씨이고 재일조선인 2세인데 남편은 도꾜 고다이라시에 있는 조선대학 교수이고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었다.할머니는 며칠 후에 요꼬하마역에 지점을 오픈한다면서 요꼬하마역 근처에 살고 있는 나를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는가고 물어보시는 것이였다.당시 나는 상준이와 같이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선뜻이 대답했다.
이렇게 나는 반년 전부터 재일조선인 할머니가 경영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였던 것이다.
나는 신할머니를 어머니라고,오오미야 본점을 맡고 있는 신할머니의 따님을 누님이라고 부른다.간혹 신할머니가 나오지 못하는 날이면 내가 오전부터 가게에 나갈 때도 있고 누님이 애들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날이면 내가 누님 대신 본점을 봐주기도 한다.신할머니는 내가 토요일과 일요일 밤이면 공장에서 일한다는 걸 알고 전번주부터는 토,일도 가게에 나오도록 해주셨고 상준의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저녁 무렵에 일찍 교대하러 와서 김치도 나의 가방에 넣어주셨다.
중국 조선족이라고 나를 친아들처럼 사랑해주시고 관심해주신 할머니는 참말로 고맙고 영원히 잊지 못할 분이시다.
신할머니를 다시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렸다.



3.

요즘은 지도교수가 학술연구회에 참석하여 한주일에 두번 뿐인 수업도 없었다.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에는 수업도 많지 않았다.여름방학도 거의 다가왔다.그러니 지금부터 방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kiosk(키오스크).
전철역 출입구나 프래트홈에서 신문,잡지,텔레폰카드 등을 파는 역전 가게인데 도꾜,우에노,요꼬하마와 같은 큰 전철역에는 역사 안에 스시점,도시락집,케익점 등 특수한 kiosk들도 많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신할머니의 가게도 요꼬하마역 역사 안에 있었다.본점과 지점에서는 모두 우에노에 있는 제일물산(第一物产)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김치,고추가루,고추장,새우젖,창란,평양랭면,떡국 그리고 한국물산점을 운영하는 재일한국인 민사장을 통해 들여온 한국의 신라면,너구리라면,홍삼차,돌김,인삼드링크 등 식료품들을 팔고 있다.
서남구 개찰구 쪽에 위치한 가게는 저녁 아홉시가 지나면 전차를 갈아타기 위해 가게 앞을 총망히 오가는 사람들은 많아도 정작 물건을 사는 손님은 별로 없기에 아홉시면 보통 문을 닫는다.
이튿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아홉시가 되여 가게 문을 잠그려고 할 때 등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반갑지도 않은 병호였다.
"여기구나.요꼬하마역이 너무 커서 겨우 찾았다."
"여긴 왜 왔어?"
나의 입에서 말이 곱지 않게 나왔다.
"누나 집에 왔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들렸다."
내가 대꾸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놓으려 하자 병호가 나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 밖에 나가 술 한잔 하자.오늘 내가 살게."
내가 너 따위 자식과 술 마실 줄 알았어!
나는 병호를 가게 앞에 세워둔 채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병호가 살고 있다는 아까바네는 도꾜 북구에 위치해있다.여기서 오오미야로 가는 게이힌도호꾸센(京浜東北線)을 타고 5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이다.그의 누나가 진짜 요꼬하마에서 살고나 있을가?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고 일부러 찾아온 거지.
나는 속으로 병호를 다시 욕하며 전차에 올랐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그 이튿날 저녁은 손님들이 있어 아홉시 반을 넘어서야 상자들을 정리하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미안합니다.김치를 사러 왔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손님들이 가게에 왔기에 나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김치 한봉지 주세요."
"네."
나는 포장한 김치 한봉지를 가게전용봉지에 넣고 녀성손님이 건네주는 천엔짜리 지페를 받았다.그런데 남자손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아닌가.
이게 누구인가!
작년 11월 중순,지인의 소개로 쯔루미에 있는 레스토랑에 면접 보러 갔다.
"우리 가게에서는 일본인 명찰을 달아야 합니다."
"그럼 저한테 어떤 성씨를 주나요?"
"이미 준비했습니다."
사무상 우에 놓여있는 기노시다(木下)라는 명찰을 보고 나는 점장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중국에서 교원을 하다 보니 이런 일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는 가게를 나와버렸다.
비록 아르바이트이지만 내가 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일본인으로 가장해야 한단 말인가! 
쯔루미역 부근에 있는 레스토랑 가나이점장이 가게에 온 것이다.
"박상?"
kiosk 종업원 복장에 달린 나의 명찰을 보며 가나이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나는 못들은 척 거스름돈 100엔과 김치를 녀성손님에게 드리며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고는 계산대에 눈길을 돌렸다.
가나이가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신상 오늘 안 나왔어요?"
그제서야 나는 대답했다.
"네.오늘 안 나왔습니다."
와이프로 보이는 녀성손님이 가나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들이 개찰구 쪽으로 가서야 나는 적잖게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나이가 나를 알아봤구나.헌데 가나이가 왜서 여기에 왔을가?신할머니를 아는 걸 보면 이 가게의 단골손님일가?김치가 맛있다며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은 많았지만 가나이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그럼 내가 없는 사이에 자주 왔을가?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가면서 나는 입가에 랭소를 머금었다.
가나이가 나를 알아본들 어찌랴.내가 레스토랑이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할 가게가 없으랴.나의 명찰을 보고 얼마나 무안했으랴!
그 다음날 점심 무렵,할머니가 도시락통을 보자기에 싸들고 가게에 들어섰다.슈퍼에서 사온 오니기리(주먹밥)로 점심을 에때우군 하는 나에게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하면 자주 가져다주는 할머니이시다.
"소고기장졸임을 했어.밥도 듬뿍 담았어.나 지금 누나를 교대해주러 갈게.그럼 수고!"
"잠시만,어머니!"
나는 문을 나서려는 할머니에게 가나이가 어제 가게에 왔더라는 얘기를 꺼냈다.할머니는 대뜸 알아차리는 것이였다.
"이전에 도꾜 닛뽀리에서 같이 살았어.헌데 가나이를 어떻게 알어?"
나는 작년에 레스토랑에 면접 갔던 일을 말씀드렸다.
"그런 일 있었어?가나이의 어머니는 나와 동갑인데 지금도 가끔씩 와서 김치를 사가군 해."
내가 아무 말도 없자 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으셨다.
"가나이가 민사장을 소개해주었어.여기는 장사하는 가게이고 가나이가 나쁜 사람도 아니니 앞으로 만나면 반갑게 대해줘."
"네,알겠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왠지 밥과 소고기장졸임이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가 가게를 나간 후에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보았다.
가나이가 이제 가게에 다시 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가?가나이가 저번 일 때문에 나한테 복수라도 하지 않을가?야꾸자들을 시켜 나를 혼내지 않을가?
어제와는 달리 어느 날 귀가중 길거리에서 큰 봉변이라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등골이 서늘해났다.



4.


폭염의 기세는 전기세 걱정까지 몰아버리고 밤새껏 에어컨을 가동하게 만들었다.
며칠이 지난 아침,상준의 휴대폰이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터졌다.
"오,병호구나.아침부터 웬 일이야?"
상준이가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나는 그만 일어나 욕실에 들어갔다.
상준의 말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왔다.
"...너도 잘 알잖아?나한테 지금 없어..."
뭐가 없단 말일가?혹시 병호가 돈을 빌려달라는 게 아닐가?
상준이는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달마다 한국에 송금하고 있었고 두주일 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갔다오기도 했다.그의 수중에 돈이 얼마 없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그런 상준이한테서 병호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단 말인가?학교도 다니지 않고 불법체류하고 있으니 학비는 이젠 지불할 필요가 없을 테고 부지런히 일만 하면 돈은 엄청 모아질 게 아닌가.
나는 상준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누님이 한주일간 쉬기에 누님 대신 래일부터 오오미야에서 일하게 되여 그 날 저녁은 일찍 퇴근하게 되였다.
광장 부근 백화점에서 적삼을 사가지고 요꼬하마역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공교롭게도 가나이점장과 맞딱뜨렸다.잘못한 일도 없는데 갓 낚아올린 물고기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가나이점장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걸 집에 손님이 와있다고 둘러댔다.불법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으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말에 병호가 피끗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저 알았다고 대답했다.언제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자는 가나이점장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보니 호 하고 안도의 숨이 나왔다.
집에 들어오니 상준이가 장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한국에 갔다온 후부터 주유소에서 새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준이도 오늘은 일찍 퇴근했다.저녁을 먹으면서 상준이한테서 병호의 근황을 알게 되였다.
"병호가 혹시 경찰에 잡히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글쎄다.잡히면 강제출국이라더라."
"그래?근데 누가 신고라도 하겠나?"
"거야 모르지.일본인들이 가만히 신고한다더라.병호 누나도 속상해서 나한테 몇번이나 전화왔더라."
비자가 만료된 병호는 일본인인 매형이 소개한 제과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어느 휴일날,같이 일하는 일본인과 경마장에 갔다가 의외로 짭짤한 수입을 맛본 병호는 그 후부터 아예 공장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우고 낮이면 경마장에 달려가고 밤이면 빠찐꼬점에 뛰여들었다.요즘은 돈을 퍼그나 날려버린 모양이였다.누나와 매형이 기미를 알아차리자 누나 집에는 감히 얼씬도 못하고 있다가 상준의 생일날에 최형의 전화를 받고 우리 집에 왔던 것이다.
아직 결혼 전이고 불법체류로 있는 병호이지만 상준의 얼굴을 봐서라도 앞으로는 병호를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말아야겠다고,친구도 별반 없는 여기서 최형의 말 대로 한민족끼리 사이좋게 지내야겠다고 나는 생각을 고쳤다.
한주일간은 오오미야에 있는 친구 집에서 가게를 다녔다.친구도 요즘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었다.
요꼬하마에서 다시 일하게 된 날은 국제교류기금센터에 오신 대학은사님께서 중국에 돌아가시기에 은사님을 배웅하려고 오전에 청가를 맡았다.친구 집에서 하루밤 더 묵고 이튿날 아침에 기다우라와(北浦和)에 갔다.기다우라와는 오오미야에서 두 정거장 거리인데 친구가 다니는 사이다마대학과 국제교류기금센터가 있는 시였다.오오미야에서 나리다공항까지 가는 리무진뻐스가 있었다.은사님을 모시고 택시로 오오미야까지 와서 공항뻐스터미널에서 은사님께 인사를 올리고 나서 누님을 한번 뵙고 가려고 역사 계단을 올라왔을 때 나는 깜짝 놀라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방을 둘러멘 병호가 사이꾜센을 타는 방향으로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병호가 왜서 오오미야에 왔을가?가게는 반대방향에 위치해있었다.혹시 나를 또 찾아온 게 아닐가?
나는 그를 부르려다가 가게에 가서 누님과 잠간 얘기를 나누고 다시 요꼬하마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한주일간 뵙지 못했을 뿐인데 가게가 눈앞에 보여오자 나는 막 뛰여갔다.
"어머니,돌아왔습니다.잘 보내고 계셨죠?"
"그래,그래.수고했어."
할머니도 반가워서 나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
"오전에 가나이점장이 가게에 와서 한참 앉아있다가 갔어.가나이점장과 얘기를 나눌 때 성이 신씨인 한국남자가 찾아왔어.친구라 하던데 어떻게 알았어?"
병호가 가게에 다시 찾아왔던 것이다.
"상준의 고향친구입니다.상준의 생일날에 처음 만났습니다.뭐라 하던가요?"
"박상이 언제 나오는가고 묻기에 요즘 오오미야에서 일한다고 했지.오후부터 여기에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오오미야가 어디에 있는가고 다시 묻기에 사이다마현에 있다고 알려줬어.오오미야를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는데 말이야.걸상에 앉아있던 가나이점장이 그 친구를 안면이 있는 사람 같다고 하던데...그리고 모레부터 누나가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하니 다음 달 10일부터 이 가게는 그만두기로 했어.교통이 불편하더라도 나를 도와 오오미야에서 그냥 일해줬으면 고맙겠어.다른 알바생은 찾지 않겠어.그럼 래일은 마지막으로 여기서 일하고 모레부터 다시 오오미야에서 일해줘.더위에 주의하고 앞으로도 수고!"
"네,알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 다른 아르바이트라도 구해놓았던 걸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한시간도 넘는 전차를 타고 아르바이트하러 갈 필요까지 있겠는가.하지만 할머니의 말씀 대로 오오미야에서 계속 일하리라 속다짐했다.
절주가 빠른 사회에서 래일 해고당하거나 회사가 파산되더라도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팽이처럼 돌아치는 일본인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였다.  




5.

이튿날은 요꼬하마역에서의 마지막 아르바이트였다.
비록 짧디짧은 반년이였지만 그동안 이웃 케익점과 스시점 점장들과는 물론 일본인 알바생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왔었다.손금 보듯 환한 가게 곳곳을 마지막으로 청소해놓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상준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나는 개찰구를 지나면서 역사 종업원들한테도 인사를 하지 않고 부랴부랴 전차에 올라탔다.병호가 집에 찾아온 것이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병호가 세수를 하는지 발을 씻는지 화장실에 있었다. 
"병호가 래일 쥬죠입국관리국에 가겠단다."
상준이가 나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왜서 불시에..."
불시에 화장실 문이 벌커덕 열리더니 눈알이 째빨개진 병호가 방에 들어왔다.나는 다급히 병호에게 물었다.
"너 무슨 일 있나?"
"한국에 돌아갈란다.나 같은 사람이야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지."
"그건 무슨 말이야?"
병호가 나의 두손을 꼭 쥐여잡았다.물기 있는 손이 싫긴 했지만 나는 손을 빼내려 하지 않고 그와 같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 작별인사 겸 사죄하러 왔다.오오미야에도 찾아갔는데 네가 없더라.전번엔 미안했다.마음에 두지 말라."
"너 왜 이래?"
병호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무슨 말을 다시 할듯 말듯 병호는 입술만 실룩거렸다.
"불법체류라 해도 우리와 같이 있으면 좋잖아.너 이렇게 가면 다신 일본에 못 온다."
나의 말에 병호가 웃음을 터뜨렸다.고개를 젖히고 웃는 모습이 마치 실밥 터진 부대자루 같았다.어떻게 그런 웃음이 나오는지 놀랍고 어이없었다.
"까짓 일본에 다시 못 오면 말지.일본인들한테서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진다.돈이 뭔지 내 더러워서..."
"누군들 여기에 있고 싶어 있나?나와 상준이도 다 참고 산다."
병호가 정작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앞서면서 어떻게 하든 그가 일본을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고 싶었다.
"같은 처지에 놓여봐야 안다고 한국에 와서 막일을 하는 조선족들이 이제야 리해된다.그리고 나처럼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는 조선족들도 이젠 알만 하다."
"...?!"
병호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다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입을 하 벌리고 병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리 알아주니 감사하다.나 슈퍼에 가서 맥주를 사올게.오늘은 우리 셋이서 실컷 마시자.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일어서려 하자 병호가 나를 눌러앉혔다.
"아니야.전차가 끊기기 전에 빨리 집에 가야겠다.나 이만 간다."
병호가 벌떡 일어나서 출입문 쪽으로 가더니 잽싸게 신발을 껴신고 집문을 나갔다.
"병호야!"
눈 깜짝할 사이였다.나는 맨발바람에 뒤쫓아가려다가 슬리퍼를 찾아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어느새 집대문을 나갔는지 병호는 마침 집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저 멀리 사라져갔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오기에 그만 돌아섰다.집에 들어오자 상준이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구나.래일 아침에 병호와 같이 입국관리국에 갈게.아까바네에서 사이꾜센을 타면 쥬죠까지 한 정거장이다."
"래일부터 오오미야에서 일하게 되였다.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보자.근데 병호가 왜서 이렇게 불시에 떠난다니?"
"경마장과 빠찐꼬점에서 손을 씻고 한주일간 일자리 찾으러 다녔다는데 일본어도 잘하지 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았나 봐.방세도 다음 달 5일 전으로 반년치를 지불하기로 되였단다.전번날 아침에는 전화가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라."
그런 일이였었구나.
"그렇다고 훌쩍 한국에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게임을 하면서 돈도 많이 날렸다는데 불법체류인 바엔 조심히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 말이다.”
"오늘 일을 누나와 매형과 상론했겠지?매형한테 그 제과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말하면 좋잖을가?그러면 소개한 매형도 기뻐할 거고 매형과 사이도 좋아질 거고... "
"그들한테 알린 것 같지 않다.사실 그 공장은 매형이 아니라 매형의 친구가 소개했다더라.어느 레스토랑 점장인데 소개비도 줬다더라."
레스토랑 점장?
어제 가게에 찾아온 병호를 가나이점장이 안면이 있는 사람 같다더라고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어디 레스토랑 점장이라더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병호가 올봄에 그 공장에 면접 보러 가니 그 사람이 사무실에 와있더란다.매형과 친구라며 공장장과 말해놓았으니 근심 말고 면접 보라면서 자리를 피했다고 하더라."
“그래?병호가 잠시 우리 집에 와있어도 괜찮잖어?"
"친구라 해도 불법체류하고 있으니 두렵기만 하구나.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별수가 없다."
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나 오늘은 좀 피곤하니 먼저 자야겠다."
자리에 누운 나는 벽에 걸려있는 카렌터에 눈길이 갔다.
오늘이 1994년6월29일 수요일.래일은 6월 마지막 날.그저께 한국이 2:3으로 독일에 패하여 16강진출에 좌절했으니 이젠 월드컵도 볼거리가 없게 되였다.



6.


병호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나와 상준이는 쥬죠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땡볕에서 세차도 하는 상준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수척해보였다.나를 보고 서글프게 웃는 그의 눈시울에 처음 보는 이슬 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전차가 아까바네에 왔을 때였다.
난데없이 차창 밖에서 후두둑 비방울이 떨어졌다.전차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 마다에는 한차례 소낙비가 련며칠째 지속되던 무더위를 시원히 가셔준다는 희열의 미소가 담뿍 어려있었다.차창으로 흘러내리는 비물을 바라보며 나는 병호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몇번 만나지도 못하고 헤여지면서 우리는 왜서 원쑤라도 만난듯 다툼질까지 했던가.서로 마음에 두고 오래오래 후회할 것을.그리고 왜서 오오미야역에서 그를 보고 부르지 않았던가.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씁쓸한 위액이 되여 목구멍으로 차올라왔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구야,잘 가거라.나도 오늘을 잊지 않을게.
전차는 어느새 도꾜와 사이다마현을 이어놓은 철교를 지나가고 있었고 하늘에는 또다시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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