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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충북으로 가다 8
2012년 05월 21일 07시 47분  조회:2802  추천:0  작성자: 구름바다
9. 이상설 사당과 생가
 
우리는 리상설(1870-1917) 사당앞에 숭엄히 모였다. 이 세상에 민족의 자존심과 얼을 휘뿌리며 필생의 정력으로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존엄을 위해 분투해온 리상설의 얼을 가슴깊이 새기였다. 우리는 리상설동상앞에서, 리상설숭모비앞에서, 그리고 그가 탄생한 곳인 초가앞에서 수없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상설은 1894년에 문과에 급제한뒤 한림학사, 의정부 참찬 등을 지냈었다. 이상설은 왕조관인이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근대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여 구미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섭취하였고 스스로 영어, 프랑스어, 로씨야어, 일어를 구사할수 있었다. 그보다도 국가정치와 섹계대사를 인식하여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밝힐수있는 당대의 동량으로 추앙되였고 또한 스스로 앞장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의 뜨락에서 우리는 그의 숨결이 지금도 맥맥히 굽이치는 가마뚜껑이며 온돌이며 그리고 모래불로 되여있는 앞마당가며를 마주하며  실로 리상설님의 모든것이 되살아나 우리한테 민족을 강의하시고 자존심을 력설하시는상 싶었다.
나는 리상설사당안에 있는 자료에서 중국연변룡정시 실험소학교의 현모습도 찾아보게 되였고 당시 현임교장인 정금석과 진천군관계자들이 함께 리상설기념모임준비에 서두르는 사진도 찾아보고 감개가 무량했었다.
 
룡정시실험소학교의 전신은 서전서숙인데 중국에서는 제일 초기의 우리 민족학교중 하나였고 리상설이 자기의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라는데서 더욱 유명하게 되였다..그때 이상설은 서전서숙을 세우고 얼마안되여 황제의 밀사로 리준등과 함께 네델란드(화란) 헤이그에서 소집된 만국회에  주요 조직자로 참가했었다…
그때 리준이 비참가국가에 몰쫓기우게 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자결로서 대항하였었다..그후에도 리상설은 순국할때까지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었다. 후에 리상설은 비분의 마음을 억누루며 리준을 당지에 안장하였다가 후에 충북으로 모셔 지금의 사당을 앉힌걸로 전해진다…
 
이제 룡정에서 있게 된다는 중한리상설기념모임은 더욱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아쉬운 발길을 옮겼다.
 
10. 송강정철사당
 
우리를 실은 봉고차는 또 정송강사에로 흘러갔다…
송강정철이라고 하면 우리는 중국조선족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송미인곡”, “사미인곡”을 돌이키게 된다.
“관동별곡”은 우리가 중학시절에 그렇게도 애독하고 외우기까지 한 가사였으며 우리 민족에게 둘도없는 천하명작임에 틀림없다.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 삼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지낸후에 좌의정에까지 오른송강정철이다….
 
송강사당은 정면 3칸, 옆면두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1665년에 묘소를 이장한후 창건되였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으로 곧추 가파로운 산록에 있는 정철묘소로 올리달렸다. 나와 시인 최룡관씨, 장백산잡지사 부주필 리여천씨, 종합신문 주필 양은희씨는 헐레벌떡거리며 진땀을 빼서야 겨우 높은 언덕우에 있는 송강정철묘소에 이르렀다. 온통 푸른 수림이 우거지고 잔디가 쭉-깔린 잠풍한 정철의 묘쇼가 조용히 우리를 맞아주었다. 양은희씨와 리여천씨는 묘비를 마주하고 비문의 내용을 메모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최룡관시인님은 묘우에 막 엎드리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렌즈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참 우리 모두는 거대한 옛문학신선의 뜨락에서 아이들처럼 몸과 맘을 들뛰며 거침없이 활랑이였다.
 
잠시후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더없이 흥분된 상태로 정연히 서서 송강정철의 묘쇼에 절을 올리고 경모의 심정을 휘뿌렸다. 나에게는 아마 이 순간이 내가 문학을 사랑해서 제일 숭엄한 심경을 안았던 때이리라…
일대 문학의 거인앞에서 옷깃은 여며지고 가슴이 솟구치도록 세차게 일렁임은 당연한 일이 아닐가?
송강사당남쪽 100메터 지점의 산록에 위치한 정철묘는 높이 1.6메터, 둘레 20메터의 봉분과 상석, 묘비, 문인석과 망부석으로 되여있었다. 묘는 조선 현종 6년에 송시렬선생이 지금의 자리로 묘지를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하였단다..
 
날거든 뛰지마나
섰거든 솟지마나
부용을 꽂았난닷
백옥을 묶었난닷
동명을 박차난닷
북극을 괴왔난닷
… …
 
나는 천고의 명구인 송강가사를 소리내여 읊으며 자주자주 송강정철의 묘소를 돌아보았다. 진짜 일대기를 주름잡아 굵게굵게 금을 긋고간 대작가의 묘소를 뒤에 두고 발길을 옮기자니 누가 뒤에서 자꾸 잡아당기는것 같은 느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아래에서 봉고차의 경적소리가 울리기에 그냥 아쉬운대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2005년 종합신문에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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