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두만강수석회
【탐석수필】
고문님 하나마나 그 식이 장식
차설 대개 “글쟁이”들이나 “말쟁이”들이 모인 장소면 약국의 감초같이 어김없이 끼여들어 담론좌석을 빛내여주는것이 있으니 그것인즉 다름아니라 육담이다.
우리의 두만강수석회의 멤버들을 쭉 훓어보면 거개가 언론, 예술 분야에서 저마끔의 실력을 과시했던 시인, 수필가, 또는 책임자들이여서 근본을 따져보면 “글쟁이”, “말쟁이”이며 누구의 간곡한 교시나 반짝 빛나는 가르침의 인도도 없이 자발적으로 취미생활을 해오다가 어쩌구려 다리부러진 노루같이 모인 “돌쟁이”들이다. 그러니 강산이 변한들 본성이야 변할손가. 매번 탐석때면 배낭에는 꼭 부인이 정성들여 마련해준 점심밥과 쇠갈구리, 솔, 장갑 같은것을 지참함과 동시에 머리속에서는 한두편 정도의 육담을 잘 가려 입력하여 와서는 쉴참에 “피로제거약”으로 무상공급하는것이 정관에 없는 규칙으로 되고있다. 그때면 아예 무존장아움이 되여 막둥이인 본인에게도 순서에 없는 언권이 돌아오기도 한다.
“수호전”의 량산박에서 36명 천강성과 72명 지살성으로 108명의 장수들에게 별을 달아주듯, 현재 여러 사업단위들에서 고급이니 중급이니 초급이니 하며 직함평의를 하듯 우리의 다재다능한 멤버들에게도 별을 달아주거나 직함을 평의해준다면 별다를 의견이 없이 육담 최우승(고급)에 김대현고문님을 만장일치로 선거할것이다. 그 무슨 지표라는것도 없고 일절 “저리 비켯!”에 찾아가고.
김대현선생은 키는 중키이나 뼈가 굵고 몸집이 실팍하며 둥근 얼굴에 이마는 넓고 머리는 전통적인 하이칼라여서 어떻게 형용을 해본다면 어렸을 때 자주 보아왔던 조선영화들에 나오는 세포위원장 형상이다. 겉보기에 퍽 점잖고 위엄스러워 보이는분이 일단 돌밭에 들어서면 올 때 잘 가려온 육담들을 풀어놓는데 다 자상히 설명해놓으면 비밀루설죄에 지적재산침해죄까자 겹으로 걸려 본인이 수석회에서 축출당할 념려가 있는고로 여기서는 딱 하나만 공개하니 이입 저입으로 무상전파함을 절대 불허한다는것을 선포하는바이다.
옛날에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일따위를 할 때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일을 목욕재계라 일컫는데 김대현선생은 이를 별나게 탐석갈 때면 지킨단다. 즉 탐석하러 가기 한주일전부터 “야간작업”을 중지하고 몸을 깨끗이 거두어야 명석을 발견하는 혜안을 갖춘다나.
그래서 돌밭에 가면 의례 하시는 말씀이
“나는 딱 한주일 굶었어. 자네들은 어제 도랑을 건넜지?”하는 의미심장한 물음이요
“소식을 늦게 받다보니 규례를 못지켰습니다.”하고 비서장 리광인선생을 방패로 내세우고 대답하는 이는 김봉세선생이다.
“제일이 바쁘다나니 소식을 늦게 전했습니다.”
리광인선생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라 뉜들 한바탕 아니 웃어보랴.
“저도 도랑을 건넜습니다.”
열흘에 한마디 하는 한태익선생의 자각적인 검토가 또한 가관중의 가관이다.
“굶었다”느니 “도랑을 건너다”느니 “규례”느니 하는 말은 다들 김대현선생이 발명창조한 “야간작업”을 의미하는 말들이다.
올 4월 수석회에서 도문 신기동에 합동탐석을 갔을 때 김대현선생은 물개같이 생긴 물형석을 얻고 장원한 소감을 얘기할 대 아주 진리인듯 흥분해서 력설한 경험담이 곧바로 일주일간 “굶으면서” 심신을 깨끗이 거둬야 득도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르며 비로서 명석을 얻을수 있다는 이른바 목욕재계설이다.
김대현선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화룡의 어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김봉세선생을 가르쳤는데 김대현선생은 취미생활이 상당히 다양하고 풍부, 지금은 연변에서 둘도 없는 고서수집가인 동시에 민속품수집가이도 하다. 여기에 성차지 않아 근 10년간 수석수집에도 남다른 열과 성을 보여주었으니 2006년 6월 8일 제1회 두만강수석전시회가 있은후 인금이 대뜸 치솟아올라 “연변일보”에서 인츰 그의 사적을 대문짝만큼하게 대서특별한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빙성을 가늠하기 어려운 그의 목욕재계는 보통 도로무공이다. 신체가 튼튼하여 70여근 되는 수석을 지고도 얼굴의 혈색을 바꾸지 않고 3~4리길을 거뜬하게 걷는지라 돌밭에 들어서서도 걸음이 황천왕동이를 가르칠 정도다. 그러니 생밭을 뒤지기보다 김대현선생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삭주이를 해도 좌우간 수확을 할수 있으니 그가 일주일간의 목욕재계로 키운다는 혜안의 강도가 심히 미심하다.
대신 “규례”를 아니 지키는 김봉세선생은 일단 돌밭에 들어서면 눈이 아주 투시경이 되어 아무곳에 가든 헛다리를 짚는 법이 없으며 매번 장원석의 십중팔구는 그의 눈에 걸리고 손에 쥐운다. 김봉세선생은 이미 7~8년전부터 어쩌구려 생판 리광인선생과 짝을 무어 가까이는 부르하통하, 멀리는 돈화의 목단강까지 탐석발자취를 력력히 남기면서 도보로 연변땅을 주름잡았다. 두분 다 하해한 자유의 몸들이라 마음만 먹으면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황차 리광인선생은 조문과출신인데 별스레 본업을 뿌리치고 곁자기학문인 우리 력사에 홀짝 반하여 돌아다니다보니 탐석이 현지답사를 많이 할 기회를 무상으로 안겨준셈이였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고 경험만으로도 탐석에서 타를 아득히 떨어드리는 투시경같은 혜안을 갖출수밖에 없다.
“5.1”련휴때 모처럼 시간을 내여 삼합에서 도문구간의 두만강을 “토벌”했댔는데 동행한 김봉세선생은 산(山)자처럼 생긴 희구한 물형석을 얻고 리광인선생은 말짱 소품 관통석만 네댓개 얻었는데 목욕재계하고 왔다는 김대현선생은 혜안이 흐려졌는지 다리품만 잔뜩 팔았을뿐 성과는 전무했다. 지병으로 허리를 앓은 본인도 이날에는 몸이 말째여서 들놀이를 하고말았다.
“올 때는 뭔가 괜찮은것을 얻자고 극구 도랑을 안건넜는데 도랑을 건넌 당신들보다 못하오.”
“맑은 물에 고기가 아니 놉니다. 수석이란 원체 모래니 망돌이니 썩돌이니 하고 어울려 놀던 몸이라 가재는 게편인것처럼 선생님하고는 격을 두는것입니다.”
김대현선생의 실망에 리광인선생의 원리스런 해석이였다.
김대현선생은 그렇게도 목욕재계를 주장했으나 하나마나 그식이 장식이로 석복이 시종 잘 따라주질 않는다. 올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때 그이 새해석복을 빌며 또다른 “도랑”이야기를 기대해본다.
(2006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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