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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반부활론
---한국에서 불거지는 '창씨개명'식의 우리 동포 민족과 지명, 인명표기 참황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옥편(玉篇)으로 한자 한자 풀어보면 [創]의 훈음은 [비롯할 창]이며 뜻풀이로는 ‘비롯하다’, ‘시작하다’, ‘만들다’, ‘상하다’, ‘다치다’ 등등이며 유의자로는 [始], [作], [初] 등이다. [氏]의 훈음은 [각시 씨/ 성씨 씨]이며 뜻풀이로는 ‘각시’, ‘성씨’, ‘호칭’, ‘존칭’ 등이며 유의자로는 [姓]이다. [改]의 훈음은 [고칠 개]이며 뜻풀이로는 ‘고치다’이고 유의자로는 [變]이다. [名]의 훈음은 [이름 명]이며 뜻풀이로는 ‘이름’, ‘공적’, ‘사람’, ‘글자’, ‘이름 나다’, ‘이름 짓다’ 등이다.
낱말 그대로 풀이해보면 ‘창씨(創氏)’란 곧 ‘성씨를 만들다’이고 ‘개명(改名)’이란 곧 ‘이름을 고치다’이다.
우리 민족 반만년 력사에선 물론, 기나긴 인류 력사에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은 없었던 성씨를 많이도 만들었고 고금중외로 이름 또한 많이도 고쳐왔다.
성씨와 이름뿐만 아니라 나라명(國名)도 만들고, 바꾸고; 국기(國旗)의 모양과 이름도 만들고 바꾸고; 당파(黨派) 이름도 그냥 새로 만들고 바꾸어온 세월에 어찌 보면 ‘창씨’와 ‘개명’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문명개화현상이며 력사의 변천과 발전 및 진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난세기 기나긴 일제강점기를 겪어온 우리민족에게는 ‘창씨’와 ‘개명’이 ‘창씨개명’이라는 하나의 합성어(合成語)를 이루면서 다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문명개화현상이나 력사의 발전과 진보의 상징이 아니였다.
낱말 ‘창씨개명’이라는 단어에는 식민지통치를 받은 설움과 수치로 얼룩진 가슴 아픈 상처를 함께 하고 있다.
한국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표준국어 대사전』에서는 낱말 ‘창씨개명’을 “일본식 성명 강요”라고 풀이한다.
다시 “일본식 성명 강요”를 찾아보면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일. 1940년에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실시하였으나, 광복 후 1946년 조선 성명 복구령에 따라 무효가 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문제는 이 시기의 ‘창씨’와 ‘개명’은 더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자원(自願)으로 취해진 문명개화현상이 아니라 침략자 일제의 강요(强要)에 의해 감행된 전 사회적, 전 민족적, 전 국가적인 피해와 재난인 것이다.
문제의 핵은 일제침략자에 의해 억지로, 강제의 요구로 강구(强求)된; 인권 박탈과 탄압, 민족말살정책 음모를 전제로 한; 하늘에 사무치는 식민지통치를 영구화 하려는 무서운 죄악을 바탕으로 한; 국제 공법을 무시한 고금천지, 전대미문의 범행으로 우리의 해내외 모든 동포들이 수난을 겪도록 한; 삼천만 우리 동포를 겨냥한 일제의 일방적이고 강박적인 ‘창씨개명’이라는 점이다.(일제시기 우리 민족에게 강요한 ‘창씨개명’을 맞선 우국지사(憂國志士)의 시말과 참황 약함)
력사는 인류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70여 년 전의 이른바 '창씨개명'을 탈바꿈시켜 다시 재생, 재현시켜 등장토록 하는 듯싶다.
다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를 뿐이다.
무릇 우리 동포며 우리 겨레라면 광복을 맞은 삼천리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무상의 긍지로, 무상의 영광과 기쁨으로 여길 것이다.
그 열광 속에는 그에 못지않은 가슴 아픈 상처를 가시는 통감도 함께 하고 있다.
기나긴 일제 강점 35년간의 식민지통치를 받은 설움과 수치를 잊지 않고 있다면 그 암담한 세월 일본식 성명 강요로 실시된 일명 ‘창씨개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옛날의 '창씨개명'은 악착같은 일제가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하려고 갖은 탄압과 강박으로 우리 겨레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요하여 삼천만 해내외 동포들이 거국(擧國)적의 수난을 당하도록 하였다면; 오늘은 오히려 그 피해를 입었던 한국이 중국의 200만 우리 동포들로 하여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姓)과 부모가 지어준 이름(名), 지어는 오랜 세월 뿌리내려 정착한 정든 고장의 명칭도 모조리 버리고 바꾸도록 핍박하고 있다.
중국의 우리 동포들은 광복 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에 수난을 겪었다면 새천년 오늘에 와선 고국에서 불어온 느닷없는 ‘창씨개명’의 피해를 입고 있다.
이중 삼중으로 거듭되는 참황에 시달리고 있다.
70년 전에 일제가 강요한 우리 겨레의 인명은 일본식이였지만 오늘 한국이 강요하는 우리 겨레의 인명, 지명은 중국 현지음-원지음이란다.
필자는 국제 통용관례에 따라 세계화에 따르자면 외국의 인명 지명은 객수주편(客隨主便), 명종기주(名從其主)의 원칙으로 손은 주인에 따라야 한다는 통념(通念)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한자문화권에서의 한문 또는 한자, 한자어로 명명된 지명, 인명은 국제통상(國際通常)과 달리 우리 문화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피력하고자 한다.
한자와 한자어, 한자음에 대한 개념을 새로 재정립, 규회(規誨)하고 우리 한자의 관적(貫籍)과 본향(本鄕)을 찾아 옳고 바른 우리말과 우리글로 우리 력사와 우리 문화를 지켜가야 할 것이다.(필자의『우리 한자 규명과 바른 우리 말과 글』- “필자가 보는 한자, 한자어, 한자음” 참조)
아래 한국판의 ‘창씨개명’을 살펴본다.
2007년 10월 12일자 한국『문화일보』의 인터넷뉴스(전자신문)에 “제4회 ‘홈타민컵’ 전국조선족어린이방송문화축제”라는 기사가 올랐다.
아래는 기사에 오른 우리민족(조선족) 인명이다.
‘장숴저우’, ‘진위화’, ‘진제’, ‘진후이전’, ‘퍄오샹스’,
……
우리 동포들의 인명이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둔갑되었다.
한자명 ‘張碩宙’ → ‘장석주’ → ‘장숴저우’로,
한자명 ‘金玉華’ → ‘김옥화’ → ‘진위화’로,
한자명 ‘金杰’ → ‘김걸’ → ‘진제’로,
한자명 ‘金慧珍’ → ‘김혜진’ → ‘진후이전’으로,
한자명 ‘朴香實’ → ‘박향실’ → ‘퍄오샹스’로 ……
고향이 경상북도 예천이며 본이 안동인 필자 ‘장석주(張碩宙)’가 ‘장숴저우’로 불리고 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01201033224072002 웹페이지 참조.
“중국 길림성교육대표단, 도교육청 방문”이라는 제목을 한『한국교육신문』웹 사이트(2006-09-27)에서는 중국 연변대학의 조선민족 ‘김병민(金柄珉)’ 총장이 ‘진빙민’으로 올랐다.
http://www.edum21.com/paper/news/view.php?papercode=news&newsno=2293§no=1§no2=0 참조
『한국대학신문』웹 사이트(2008-07-25)에는 ‘연변대학’ ‘김병민’이 ‘옌벤대’ ‘진빙민’으로 올랐다.
인명뿐만 아니라 지명까지도 모조리 ‘개명’하고 있다.
한국의『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국민일보』들은 앞 다투어 해외 우리 동포가 가장 많이, 또 가장 오래전부터 살아온 중국 ‘연변(延邊)’을 ‘옌볜’으로, ‘연길(延吉)’을 ‘옌지’로, ‘룡정(龍井)’을 ‘룽징’, ‘도문(圖們)’을 ‘투먼’이라고 별명지어 부르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6/2010091600097.html 등 웹페이지 참조.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457412 참조.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920304178&code=41121111&gstatus=no 참조.
한국의 민중서림에서 최근에 펴낸『국어대사전』(2006)의 2689쪽에도 낱말 옌볜과 옌지 그리고 옌볜대학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올랐다.
한국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낱말 지명 ‘연변’과 ‘연길’, ‘도문’이 ‘옌볜’과 ‘옌지’, ‘투먼’으로 올랐다.
지난 2008년 7월 12일 15시(한국시간) 한국의 ‘국민의 텔레비전중심채널’이라고 자부하는 ‘KBS’에서 “중국−대만 59년 만에 열린 하늘 길”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송 되었다. 방송에서 ‘베이징쇼우두 공항’이라는 자막과 함께 해설이 수차 거듭 되었다.
그 다음 달 같은 방송국의 ‘2008북경올림픽’ 소개 화면에 오른 ‘서우두공항’이라는 자막을 보면서 필자는 ‘쇼우두’와 ‘서우두’가 도대체 무슨 말이며 두 낱말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여 사전까지 뒤지며 그 뜻을 헤아리려 했었다.
방송화면을 유심히 살펴보니 글쎄 ‘수도공항’의 ‘수도(首都−shoudu)’를 한문자발음을 본 따느라고 ‘쇼우두’, ‘서우두’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 같은 방송에서 “제5의 도시”라는 표제로 중국의 “漢王科技”회사를 소개하는 화면에서는 ‘한왕커지’라는 자막이 여러 번 흘렀다. ‘과학기술’이라는 준말(약어) ‘과기(科技-keji)’가 우리말로 ‘커지’로 둔갑되었다.(한나라 왕이 크냐고 문의하는 듯하다)
2007년 9월 3일자 “Daum아고라”(Daum한메일) 웹 사이트와 2008년 5월 17일자 한국『전국경제인연합회(FKI)』를 비롯한 일부 언론과 책자들에서는 ‘조선족(朝鮮族)’을 ‘차우센주’, ‘초센주, 초우센주, 센주’로 표기하고 있다.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K161&articleId=8987 등 웹페이지 참조.
한국의『chosun.com라이프』웹 사이트에서는 2010.01.11자로 “[중국의 소수민족]⑨ 차오시엔족(朝鮮族)”이라고 제목 한 기사는 “최고위 인사는 소수민족 정책 총괄했던 장관급 리더주(李德洙)”……“한반도계 중국인을 뜻하는 차오시엔족은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독특한 존재다”라고 서두를 떼고 있다.
조선민족 ‘리덕수’가 ‘리더주’로, ‘조선족’이 ‘차오시엔족’으로 둔갑되고 있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1/2010011100452.html 참조.
참으로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마치도 한국이 70년 전의 피해자로부터 오늘의 가해자로 군림 되어 일제의 ‘창씨개명’을 본받아 그 때를 답습이라도 해보고 싶은 듯이, 무고한 해외동포들과 동포들이 뿌리내린 고장의 인명, 지명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벌하게 마구 ‘개명(改名)’을 강요, 감행하고 있다.
인명, 지명은 물론 보통명사와 수사(數詞)에 이르기까지도 마구 ‘개명’을 감행하고 있다.
례하면:
뎬신(点心)(270쪽), 지우지아(酒家), 러우와이러우(樓外樓),
지우뎬(酒店), 상뎬(商店), 구러우(鼓樓), 바이훠(百貨),
거우우중신(購物中心)(219쪽), 원우상뎬(文物商店)(219쪽),
와이탄(外灘)(186쪽), 우이판뎬(五一飯店)(368쪽)
……
지어는 외국의 국가 명칭과 종교 이름도 중국어 표기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마구 고친다.
례하면:
‘러시아(俄羅斯)’가 ‘어루어쓰’로(136쪽)
‘기독교회(基督敎會)’가 ‘지두지아오후이’로(152쪽)
……
(한국 시공사 편『해외여행 가이드북』⑥ )
한국의 시공사에서 2007년 3월에 펴낸 이『해외여행 가이드북』⑥ 책자가 얼마나 많이 탐독되었으면 2007년 3월 9일 개정판으로 7쇄 인쇄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자로 7쇄 발행 될 만큼 인기가 높다는 것에 마음이 더 무거워 진다.
문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에 이미 정착되어 굳어져 있고 오래전부터 익히 써오던 한자어 인명, 지명을 모조리 버리고 대신 말을 하는 이(화자・話者)와 말을 듣는 이(청자・聽者) 및 그 말을 글로 적는 이(寫者)와 옮기(전달자・傳者)는 이들 모두에게 아리송한 ‘창씨개명’으로 이른바 신형의 외래어를 무더기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하는 이나 듣는 이, 또는 적는 이나 옮기는 이 모두가 우리 동포가 아니면 우리말을 배워 우리말을 기준으로, 우리들 사이에 주고 받아야함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알고도 모를 조어(鳥語・造語)로 지껄거려야 할 리유가 무엇인지 못내 궁금하다.
지난 세기말부터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과 『한글 맞춤법』의 ‘두음법칙’으로 하여 금이 생긴 한자 문화가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 한자, 한자어의 빙소와해(氷消瓦解)와 균열(龜裂)의 진통을 겪다가 끝내는 이른바 ‘외래어’를 몰고 온 해일(海溢)로 하여 풍비박산이 되어가고 있다.(필자의『우리 말과 글의 백흑 보고서』제10절 “두음 법칙에 일그러진 우리말과 우리글” 참조)
우리 반도에서 시단(始端)된 한자와 한자어의 변탈(變脫)과 붕괴가 동북아를 넘어 환태평양으로 번지어질까 적이 불안하다.
일제는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삼키고 동화시키려는 속셈으로 우리 겨레들에게 일본식 인명을 강요했었다.
하다면 복수로, 분풀이로, 앙갚음으로라면 피해자였던 한국은 가해자였던 일본을 겨냥해야 했을 것이고, 가령 일본이 아닌 누구를 상대로 했든지 간에 우리 겨레말 보급을 추진했어야 할 텐데 하필이면 전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재외동포들보다, 그리고 그 어느 민족들보다 자기 력사와 문화 내지 겨레말과 글을 으뜸으로 잘 지켜온 두만강, 압록강을 사이에 둔 우리 겨레들만을 선택하여 겨레말을 버리도록, 피나는 상처에 소금을 퍼부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혹여 힘없는 해외동포라고 얕보거나 업신여기거나 귀찮아서가 아닐 터인데 어찌하여 구국간성(救國干城)을 그대로 지키며 겨레의 얼과 독립 혼을 그대로 물려받은, 해외동포들의 생명으로 지켜온 동족어(同族語)를 깡그리 말살하려 하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오리무중, 가슴이 뭉개지는듯하다.
력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해외 우국단충(憂國丹忠)의 뜻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한자(漢字)의 시조(始祖)와 정초(定礎)와도 같은 동이문자(東夷文字)의 발상지(http://d.wanfangdata.com.cn/Periodical_zyww200202008.aspx www.hanja-edu.com/renew/education/necessity_3.htm참조)에서 온 중국의 조선민족들이 한국에서 국적이나 영주권 또는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거나 발급받을 때에 받는 가장 큰 충격과 심한 자극은 우리말과 우리글의 성명(姓名)을 급기야 버려야하고 더구나 집안 족보(族譜)나 가보(家譜)에 오를 때에도 자기 성과 명이 아닌, 한자어도 고유어도 아닌, 영어도 로마자도 아닌 자기도 모를 이름(이른바 영문부호조합)으로 취급당하는 수모를 격을 때이다.
례하면;
본관은 밀양 박(朴)씨이건만 ‘박수운(朴秀云)’이 ‘퍄오슈윈’으로,
본관은 김해 김(金)씨이건만 ‘김대환(金大煥)’이 ‘진다환’으로,
본관은 안동 권(權)씨이건만 ‘권오송(權五松)’이 ‘췐우수웅’으로,
본관은 수원 백(白)씨이건만 ‘백태봉(白泰峰)’이 ‘표타이펑’으로,
본관은 신안 주(朱)씨, 상주 주(周)씨인데 불현듯 ‘저우’로 변하고,
본관은 광주 모(毛)씨, 함평 모(牟)씨인데 불현듯 ‘마오’로 변하고,
……
동족 간의 지역시기(地域猜忌) 내지 열등차별보다 더한 모욕(侮辱)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잉태하고 움튼 이른바 새로운 외래어 기형아가 일제의 ‘창씨개명’보다 더 앙탈을 부리며 해내외에서 우리의 굳어진 한자어 인명, 지명을 좀먹고, 삼키며 가족과 혈육상봉에마저 끼어들어 마구 제멋대로 길길이 자라고 있다.
필자는 상술한 기형아의 산실(産室)은 우리 한자와 한자어를 도외시하고 외면하고 뭉그러뜨린 한국의『외래어 표기법』, 그 중에서도 “중국어의 표기”와 “동양의 인명, 지명 표기” 규정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잉태와 생산(生産)이 가능토록 여건을 지어줌은 바로 우리 한자와 한자어 한자음에 대한 개념과 풀이에 문제가 있고 한국과 조선 및 해외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모든 우리말 사전들의 해당 낱말에 대한 주석(새김)에 문제가 있으며 아울러 그로인한 한자 문화권에 대한 이해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사전에서의 잘못된 ‘한자, 한자어, 한자음’ 주석; ‘한자 문화권’에 대한 리해와 역할에 대한 진술은 생략함, 필자의『우리 말과 글의 백흑 보고서』-상편 참조)
아래 한자의 유래를 간추려 본다.
한자(漢字)는 한어(漢語)를 기록하는 문자이다. 세계적으로 아주 유구한 문자의 하나로서 이미 600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보존하고 알아 볼 수 있는 문자는 3000여 년 전의 은(殷), 상(商)나라의 갑골문(甲骨文)과 그 뒤로 발굴된 금문(金文)이라고 한다.
최근 한자의 기원이 고고학연구가들로부터 새로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 산동성 정부 웹 사이트 ‘山东省情网(WWW.infobase.gov.cn)’의 ‘省情网’으로 서명한 글 ‘东夷及其文化发展(2007-07-31)’을 방문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뚜렷이 눈에 띈다. “最早的文字,当是东夷人的创造。《潜夫论·五德志》有“少皞始作书契”,的说法。这一说法得到了考古发现资料的证明。” 필자의 얕은 수역(修譯)으로 그 뜻을 헤아려보면 “최초의 문자는 동이사람들이 창조하여 ‘소호시작서계(少皞始作书契)[적을 少, 밝을 皞, 처음 始, 지을 作, 글 書, 새길 契 -어려서부터 사리에 밝아 시작부터 부절(符節)을 새겼노라]’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중국의 ‘齐鲁晚报’ 2008년 10월 27일의 글 ‘神秘东夷甲骨文现山东-疑比殷墟甲骨早千年’, 또는 산동성사회과학원(山东省社会科学院) 방진호(逄振镐) 연구원의 글 ‘从图像文字到甲骨文-史前东夷文字史略’(2002年 02期 中原文物 Cultural Relics of Central China
http://d.wanfangdata.com.cn/Periodical_zyww200202008.aspx 참조)을 보면 골각문자(骨刻文字)인 동이문자(東夷文字)가 지금까지 알려진 은허(殷墟) 갑골문자(甲骨文字)보다 무려 1000년 내지 1500년 전으로 알려져 산동대학 고고미술학연구소 류봉군(劉鳳君)소장은 얼마 전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력사를 지금보다 천여 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력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지극히 중요한 것은 은허 갑골문자 이전에 동이문자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자는 동이문자의 맥을 이어 발전되어왔다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 문자의 시조(始祖)와 같은 [새길 契], [집 家]에 대한 원초(原初)적 연구로 동의문자의 정초(定礎)를 잡고 있는 한국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진태하회장의 주장을 찬성하며 본문에서는 략한다.(www.hanja-edu.com/renew/education/necessity_3.htm참조)
동이문자를 파고들자면 우선 ‘동이’라는 낱말을 바로 리해해야 한다.
중국 대사전『辭海(사해)(1979년 판)』제46쪽에 “東夷”라는 낱말을 보면 ‘見 “夷”(“이”를 보라)’라고 올랐다. 다시 제644쪽에 오른 낱말 “夷”를 보면 “中國古代對東方各族的汎稱…舊時亦往往用以称外國人。)라고 풀이하고 있다. 뜻인즉 ‘동이’란 바로 ‘중국고대에 동방의 각 민족들을 두루 일컫는 범칭…옛적에 또한 외국인을 일컫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말 사전 낱말 풀이대로 “동이”라면 “동쪽의 오랑캐”, “동쪽지방에 사는 미개한 종족”이라는 뜻으로이고 “동이문자”라면 바로 “동녘의 오랭캐문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한국의 모든『국어사전』,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조선말사전』1992’ 참조)
중국의 한문(중어)사전들에서보다 우리말 사전들에서 “동이”를 “동쪽의 오랑캐”니 “동쪽지방에 사는 미개한 종족”이라니 하며 그 옛날 발해만(渤海灣)에 뿌리내린 조상들을 욕보이고 있다.
‘동이골각문자’를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동이(東夷)’라는 낱말을 한국의 우리말 사전들에서 바로 새겨야 할 것이며 특히 옥편에서 [夷]를 [오랑캐 이]로 한 훈(訓)을 고쳐야 할 것이다.
실은 한문자 [夷]는 [클 大]와 [활 弓]의 합자(合字)로서 사람이 활을 들고 있는 모양을 본 뜬 글이며 ‘화험위이(化險爲夷)’에서 ‘夷’자 마냥 ‘온화’, ‘평탄’, ‘안온’, ‘기쁨’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력사를 바로 잡고 비록 늦었지만 당대발복(當代發福)으로 조상을 정히 모시면서 급격물실(急擊勿失)로 명분을 되찾아야할 것이다.
필자는 “동이・東夷”를 “동방의 큰 활을 쏘는 어진 민족”, “동방의 큰 활을 쏘는 슬기로운 민족”으로 칭하고자 한다.
아울러 [夷]의 훈과 음은 [夷 = 활 이]로 새기고자 한다.
(사전(辭典)에서의 한자, 한자어, 한자음 주석(註釋) 규명과 규회 및 한문자의 력사와 그에 앞선 인류력사에서 문자의 출현은 필자의『우리 말과 글의 백흑 보고서』-상편 참조)
여기서 잠시 한국에서 ‘창씨개명’ 수단으로 중국의 이른바 ‘차우센주’, ‘초센주, 초우센주, 센주’로 일컫는 조선족과 이른바 ‘옌지’, ‘옌볜’, ‘옌볜대학’이라 일컫는 연길, 연변과 연변대학을 간략히 소개한다.
중국 조선족은 ‘인터넷 다국어 백과사전’이라 일컫는 ‘위키백과’에서 풀이한 것처럼 ‘한국계 중국인’도 아니고 ‘조선계 중국인’도 아니며 더구나 많은 재일동포들처럼 국적이 없는 섧은 ‘조선’인이 아니다.(일본의 ‘조선인’, ‘제일동포’, ‘무국적 장기거주인’ 등 력사와 현황 생략)
중국의 조선족은 우선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의 당당한 일원이다.(호칭 ‘조선인’, ‘조선민족’, ‘조선족’, ‘한국인’, ‘한민족’, ‘배달민족’의 구별; 민족 기원설, 민족 전이설과 민족 변천 설 생략)
중국의 조선족은 결코 한국 일부에서 보는 눈높이의 헐벗고 굶주린, 품 팔고 약 파는, 귀숙 할 곳 없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고달프고 불쌍한 시골뜨기 불법의 ‘초우센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의 대상이 아니라 단군의 고조선과 근세조선의 피를 물려받은, 적장(嫡長)의 정통(正統)과 대통(大統)을 이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발해의 옛터에 뿌리를 내려 반만년 찬란한 력사를 지키며 오늘에 와서 고국의 남북과 해내외 어디와도 다른, 남다른 철학과 우수한 문화 내지 근면한 성격과 아름다운 품행, 훌륭한 인격을 갖춘 조선민족의 략칭−조선족으로서 조선어를 자랑스럽게 쓰며, 동이문화(東夷文化)와(http://baike.baidu.com/view/1605857.htm 웹페이지 참조) 동이문자(東夷文字)(http://baike.baidu.com/view/1798462.html참조)의 맥을 이은 한자문화권에서 드넓은 마음에 산과 바다를 담고 13억과 어울려 친구로, 형제로 사귀며, 정정당당히 중국 및 동아시아와 세계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제반 무대에서 큰 꿈을 이루며 머지않아 세계의 주축에서 주류를 주름잡을 억만 장자들이다.
중국 길림성민족연구소 차철구 연구원은 중국의 조선족 현황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다.
“중국조선족들은 글로벌경제 추세와 대외개방의 유리한 시기에 지연상근, 친연상련, 문연상통한 독특한 우세를 활용하여 해외에 가 로무에 종사하고 실업회사(현대공업과 상업을 망라)를 세우고 도시에 거주하는 등 대외개방의《3부곡(三部曲)》을 성공적으로 연주하여 바야흐로 개방민족으로, 산업민족으로, 도시민족으로 힘차게 발전하고 있다.
2008년 세계지식출판사에서 출판한《동북아시대의 조선족사회》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목전 전국 조선족들이 설립한 중소기업은 이미 2만 여개에 달한다.
연변지구에는 조선족이 경영하는 기업이 대략 2000개 된다. 주요하게 특산물, 제조업, 복장업, 오락음식업 등 각종 서비스업을 경영하고 있다.
연변지구외의 길림성내에는 조선족기업이 또 800여개 된다. 그중 부동산개발, 자동차부품, 광전자산업과 서비스업은 길림성 조선족기업의 주류이다.
흑룡강성에는 조선족기업이 2000여개 된다. 그중 기계생산, 급수설비, 보이라 등 제조업이 200여개 된다. 대 한국, 대 조선, 대 러시아, 대 일본 등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기업도 있다.
료녕성에는 조선족기업이 약 3000여개 된다. 주로 심양, 대련 등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중 총 자산이 1억 원 이상 되는 기업이 10여개, 1000만 원 이상 기업이 50여개 된다.
북경, 천진 지구에는 조선족기업이 약 3000여개 있고 산동성에는 조선족기업이 약 400O여개 있다. 주요하게 청도, 위해와 연태 등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중 청도조선족기업협회에에 등록한 기업만 해도 1170여개나 된다.
그들이 경영하는 주요항목으로는 제조업, 수출입무역, 수출입대리, 화물운수대리, 수산물가공 등이다.
상해, 절강 등 화동지구에도 조선족기업이 2000여개, 광동성에도 조선족기업이 2000여개 있다. 그중 총자산이 1000만 원 이상 되는 기업이 200여개 있다.
조선족들이 중국의 서부지구에 들어가 창설한 기업도 100여개 된다.
조선족들은 또 운남성, 중경, 성도 등지에서도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정신으로 기업을 창설하고 창업의 길에 들어서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의 조선민족은 역동의 동포사회를 이끌어 산업민족으로 궐기하고 거듭날 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국의 평화통일을 이끌 선구자들이기도 하다.
조선과 한국을 한눈에 바라보며, 분단된 남과 북의 허와 실을 누구보다 환히 알며, 고국의 남과 북을 누구보다 배려하며, 남북의 겨레들이 항시 함께 편히 만날 수 있는 따뜻한 품을 마련해드리며, 그로 하여 고국의 평화통일을 누구보다 갈망하며, 자주통일을 장만하며, 어쩌면 고국의 통일을 먼저 잉태 할런지도 모를 연변과 중국의 조선민족은 세계 모든 해외동포들의 부러움과 긍지를 갖는, 마음으로 따르고 배워야 할 본보기 겨레들이다.
연변과 중국 조선민족의 꿈과 희망은 해외동포사회의 찬란한 내일과 미래다.(중국 조선민족의 수백년 력사와 변천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중국조선족사료전집』참조)
연길(延吉)은 2,000년이 넘는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1860년 이래 조선북부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1869년에는 재해가 더구나 심하여 살길이 막힌 조선농민들은 두만강북안으로부터 부르하통하, 가야하 류역으로 몰려들었다. 1885년 청(淸)정부는 두만강이북 길이 7백여리, 너비 40∼50리 지역을 조선이민특별개간구로 정하고 월간국(越墾局) 일명 간무국(墾務局)을 설치, 때문에 국자가(局子街)라고도 불렀다. 1902년 연길청(延吉廳)이 설치되고 1909년 부(府)가 되었으며 중화민국 수립 후 현(縣)이 되었다.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많은 우리 동포(당시 당지인구의 76.6%로 9만 8천여명)들이 이주하여 연길과 그 주변 지역을 개척하였다. 1931년에 이르러 우리 민족인구는 40만 6천명, 1944년엔 무려 63만 1700명에 달하여 중국 동북3성 조선민족인구 총수의 38%를 점했다.
이 고장은 조선반도(한반도)와 력사를 같이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활약했으며 그로 하여 청산리항일전승지(靑山裏抗日戰勝地), 봉오동(鳳梧洞)항일승지, 일송정(一松亭) 등 유적지가 많다.
연변(延邊)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략칭으로서 중국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여 러시아, 조선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은 4만 3547평방킬로미터, 인구는 219만 여명 정도이고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조선족이 40%이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로 설립되였고 1955년 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되였다. 산하에 연길(延吉), 도문(圖們), 돈화(敦化), 화룡(和龍), 룡정(龍井), 훈춘(琿春) 등 6개 시와 왕청(汪淸), 안도(安圖) 등 2개 현으로 구성되여 있다.
하천으로는 송화강(松花江), 목단강(牡丹江), 수분하(綏芬河) 등이 있고 두만강 류역에는 “동북아 금삼각주(東北亞金三角州”라고 불리는 국제 개발구, 훈춘경제개발구가 있다.
2009년 9월 중국 국무원이 비준한 “중국 두만강지역 개발규획 개요”로 선행선제(先行先制) 시험권을 부여받게 된 장춘·길림·도문개발개방선도구(長·吉·圖開發開放先導區)는 연길·룡정·도문(延·龍·圖) 일체화를 비등(沸騰)시키고 있다.
연변대학은 산하에 19개 학원, 10개 학과류, 70개 본과전업에 재학생 2만 6,000여명, 학교 종업원은 2,700여명에 교수와 부교수 750여명, 18개 나라에서 온 류학생 500여명, 박사지도교수 56명에 박사연구생이 130여명, 석사지도교수 378명에 석사연구생이 2,490여명, 건교 이래 10여만 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배출한 규모로 2001년 중국 교육부로부터 서부개발 중점건설 대학으로 확정된 명문대학이다.(2009년 10월 통계)
지금 중국교육부에 등록된 중국 복단대학, 중앙민족대학, 북경대학 그리고 흑룡강, 산동, 상해, 절강 등 성과 시의 대학교의 본과, 단과, 사립대학의 조선・한국어학과가 80여개소가 있는데 이들 학과의 교사들 절대 대부분은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중국국가급중점학과와 국가급 특색전업−조선언어문학학과, 조선어전업)을 졸업한 학생들이거나 그 학생을 스승으로 모신 학생의 학생들이다.
연변과 연길, 연변대학의 우리 동포들은 세세대대로 우리 민족의 문자와 언어를 우선적으로 잘 씀으로써 세계 그 어느 나라의 해외동포들보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잘 지켜왔다. 하여 세계 방방곡곡의 우리 동포들에게 연변과 연길, 연변대학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중서림에서 최근에 펴낸『국어대사전』(2006)의 2689쪽에는 낱말 옌볜과 옌지 그리고 옌볜대학이라는 단어가 올랐다.
한국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낱말 지명 ‘연변’과 ‘연길’이 ‘옌볜’과 ‘옌지’로 올랐다.
전대미문이고 금시초문이다.
기절초풍으로 환장(換腸)할 노릇이다.
천둥소리에 놀라 어리둥절하다가 불시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이제 ‘옌볜’, ‘옌지’와 같은 관형어(규정어)를 앞세운 단어들이 정든 우리의 ‘연변’, ‘연길’은 물론, ‘연변’, ‘연길’을 앞세운 부지기수의 인명, 지명 내지 차차 모든 우리말과 글로 된 호칭과 단어를 소멸하고 ‘옌볜(연변)’을 발판으로 숨 가쁘게 더 넓은 ‘젠다오(間島)’와 ‘만저우(滿洲)’벌판의 우리 동포가 사는 방방곡곡을 샅샅이 훑으며 우리말과 글을 무차별로 무자비하게 침입(侵入)할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중국에 예나 지금이나 우리말과 글로 ‘옌지’라는 지방이나 지역이 없다.
그런데 난데없는 ‘옌지’라니?
아마 연변을 ‘옌볜’으로 둔갑시켰으니 200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연길도 졸지에 ‘옌지’로 둔갑이 되고 따라서 1949년에 설립된 ‘연변대학’도 그 ‘세례’를 입어 예순 환갑에 즈음하여 ‘옌볜대학’으로 딱지를 붙였을 것이라고 짐작이 간다.
필자가 연변대학을 졸업했고 필자의 대학 동기 동반생이 지금 현재로 연변대학의 총장임에도 필자도, 현임 연대 총장도 ‘연변대학’이 급기야 ‘옌볜대학’으로 둔갑한 것을 모르고 있으니 하긴 한국의『외래어 표기법』과『국어대사전』이 귀신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도깨비의 조화(造化)라고 해야 할까?
중국의 조선민족에게 보이는 학교 간판은 분명히 지금 오늘 이 시각에도 세종대왕님께서 만드신 한글・조선글로 또박또박 박아 쓴 ‘연변대학’이고, 중국 연길시 공원거리 상공에 펄펄 휘날리는 교기(校旗)는 어제도 오늘도 우리글 ‘연변대학’ 그대로이며, 연변대학 교사(校舍)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청사와 가지런히 푸른 하늘 아래 두만강 기슭에, 백두산과 함께 마냥 거연히 솟아있다.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우리 동포 학도들의 뜨거운 가슴에 단 흉장(胸章)・마크도 ‘연변대학’이며 60년간의 모든 졸업증, 학사증, 박사증에 찍은 관인(官印)보다 소중한 대학공인-교인(校印)도 당당히 세계의 인증을 받고 있는 ‘연변대학’이다.
이 고장 우리 동포들에게는 자랑찬 60성상(星霜)을 이어온, 마음의 거룩한 성상(聖像)인 ‘연변대학’임에도, 연변대학의 장래가 곧 중국과 해외동포들의 민족교육의 자랑이고 희망임에도 글쎄 한국의 일부 어학자들의 눈에는 그 것이 불현듯이 ‘옌볜대학’으로 보이니 참으로 그들의 두 눈을 안과의에게 정밀 검진을 맡기든가 아니면 정신질환으로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고국의 외래어 제정 대감들의 심기(心氣)를 건드려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저지를지라도 ‘옌볜’은 얼토당토 안은 망발(妄發)이고 망언(妄言)이라고 지적하련다.
연변대학은 중국 조선민족교육의 간판이며 해외동포 교육의 간판이고 자랑이다.
한국에서 함부로 동포 교육의 간판−재외동포의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상처 난 가슴을 도려내고 에어내고 거기에다 소금을 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이 우리 연변대학 예순 돌에 축하문은 보내지 못할망정 장장 60년간 우리 동포들이 애지중지 정으로 목숨으로 잘 키우고 지켜온 ‘연변대학’의 성스러운 성씨와도 같고 명줄과도 같은 ‘연변’을 뿌리 채로 뽑아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다 대신 입에도 올리기 거북한 ‘옌볜대학’을 등극시켜 염병으로 우리의 ‘연변대학’을 일조에 짓뭉개버리려는 것은 아닐 터인데.
있지도 않을, 또 있어서도 아니 될 폐교식에서나 쓸 조문(弔文)마냥 ‘연변’을 영결(永訣), 영별(永別)시키려 하고 ‘옌볜’이라는 알고도모를 조어(鳥語)(사전에서는 낱말 ‘조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지껄이는 말소리”라고 풀이하고 있다)로, 초상(初喪)의 조화(弔花)마냥 불미하고 불길한 ‘옌볜대학’ 딱지를 보내어 민족대학의 민족정기(精氣)와 겨레정기(正氣)를 꺾고 모름지기 수정주의(修正主義)마냥 중국어발음을 본 딴, 다시는 우리의 민족대학과 별로 관련이 없는, 다만 ‘옌볜’에 자리 잡은 ‘대학’이라는 의미로 ‘옌볜의 대학’ 즉 ‘옌볜대학’으로 치부하려 함이 아니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어떻게 하든 름름한 연변대학의 기강을 그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연변대학(延邊大學)’의 략칭(略稱)을 ‘연대(延大)’라고 친절히 부른다. 하다면 한국에서 별명을 달아 선물하려는 ‘옌볜대학’의 략칭은 ‘옌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옌다’, ‘옌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략칭이란 대저 한자어에만 통하지만 고유어도 한자어도 아닌 ‘옌볜’은 간사(奸邪・奸詐)하고 암특(暗慝)하게 한자어 ‘대학’을 둘러업고 어떤 수로도 략칭, 략어로 둔갑되어 더더욱 기구망측한 신조어로 창씨개명을 하려고 설칠 것이다.
해당 학교나 이 지역 동포들은 바라지도 않는데, 아니 오히려 반감을 쌓고 있는데 고국에서는 무슨 영문인지, 어떻게 된 감투끈인지 괜히 연변대학을 뿌리 빼고 따돌려 ‘옌따’로 만들려 하고 있다.
만약 낱말 ‘연변대학’이 우리글의 맞춤법에 어긋나기에 옳게 바로잡으려고 한국이 새로운 개명이나 개칭을 시도했다면 모르지만 우리 한자어 낱말 ‘연변대학’은 우리 겨레의 같은 문자로, 같은 우리 한자음으로 조선어나 한국어의 맞춤법에 추호(秋毫), 일호(一毫)의 어김이 없음에도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한자어 ‘연변’을 버리고 ‘조어’와 같은 혐의를 받으면서까지 ‘옌볜’이라고 개명, 개칭할 리유가 무엇일까.
연변대학을 중국어로, 영어로, 러시아어로, 일어로, 불어로 또는 그 어떤 국가나 민족의 문자와 언어로 어떻게 표기하고 호칭함은 전적으로 연변대학의 관련 기준에 따라야 한다. 세계 각국과 각 민족은 반드시 연변대학의 자기 학교명 호칭에 관한 결정과 결의 및 의사에 따라야 할 것이고 혹여 혹자가 별다른 명으로 호칭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선 연변대학의 동의를 거치고 연변대학과 합의서를 체결하거나, 또는 연변대학에 서약서를 바쳐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도 한국의 수도 ‘서울’을 중국에서는 ‘漢城’이라고 부르고 표기하던 것을 한국의 요구에 따라 ‘서울’을 한국어로는 ‘ㅅㅓㅇㅜㄹ’로, 영어로는 ‘SEOUL’로 발음하니 중국도 중국어로 ‘서울’ 발음에 가까운 ‘首爾(수이)−SHOUER−서우얼’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여, 중국에서 ‘오냐 알았다’는 식으로 그리하고 있지만(필자의『우리 말과 글의 백흑 보고서』 “서울-SEOUL-수이-首爾-shouer-서우얼에 대한 단상” 참조) 수도명 ‘서울’을 제외하고는 기타 한국의 ‘서울’을 앞세운 공관, 기관, 학교, 병원, 협회, 회사, 회관, 공원, 호텔, 거리 등의 호칭은 해당 부서나 부처 및 단체나 단위들에서 중국어로 개명, 개칭을 요구하지 않는 한 원래의 호칭을 원칙으로 지키는 것과 같은 리치고 도리이다.
례하면: 한국의 많은 관광지도나 려행안내문에는 오늘에도 중문(中文)으로 ‘漢城市政廳−서울시청’, ‘漢城大學−서울대학’, ‘SBS漢城廣播電視台−SBS서울방송’, ‘漢城中央郵局−서울중앙우체국’, ‘漢城中華靑年會議所−서울중앙청년회의소’ ‘漢城海關’, ‘漢城酒店’, ‘漢城高速客運站’…… 등등으로 일컫고 있는데 모두 ‘서울’을 ‘서우얼-首爾’이라고 고치지 않고 여전히 ‘한성(漢城)’이라고 명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연변’을 ‘옌볜’으로, ‘연길’을 ‘옌지’로, ‘연변대학’을 ‘옌볜대학’으로 크나 큰 국어대사전에 낱말로까지 주석을 달아 새겨 ‘창씨개명’식으로 올렸다 할지라도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위치한 연변과 연길의 행정도시 명칭과 관공부서 명칭을 비롯한 모든 명칭은 그 지역의 정부나 관계부서에서, 그리고 그 고장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부르고 있는 한, 그리고 대외적으로 중국어발음으로 고쳐 불러달라고 간청하지 않는 한 여전히 변함없이, 동요 없이 원래대로 영원할 것이다.
‘연변대학’을 ‘옌볜대학’으로, ‘연길’을 ‘옌지’로 일컫게 됨은 단순히 학교와 지명의 개명(改名)과 개칭(改稱) 문제가 아니다.
‘연변’과 ‘연길’은 한자어이고 ‘옌볜’과 ‘옌지’는 한국의 현행『외래어 표기법』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중국의 지명이라는 해석과 같은 약은 수로 얼버무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너무도 심각하고 엄숙한 시비(是非)와 조백(皁白), 백흑지변(白黑之辨)이 있다.
력사적인 지정학(地政學)적 시비, 어학적인 시비, 한자어와 외래어간의 선택우선 시비, 신조어 원칙과 기준의 시비, 동일민족 타국적(他國籍)의 인명, 지명 기준과 원칙 및 규범에 대한 시비 등등 많은 시비는 그만 두고 다만 같은 민족 한 겨레의 정감(情感) 하나만이라도 ‘연변’이냐 아니면 ‘옌볜’이냐 함에 백흑이 분명하고 리치가 충분하다.
아무리 남의 나라라고 하지만 그 고장의 해외 동족, 동포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서라도 이른바『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같은 겨레가 반세기전에 벌써 명명한 행정도시의 명칭과 관공부서 명칭, 명문대학 명칭을 함부로 굳이 자기네만의 ‘규정’에 따라 제 비위(脾胃)에 맞추어 바꾸려거나 고치려 드는 것을 무례(無禮)와 무정(無情), 무식(無識), 무모(無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가벼운 질책이다.
‘연길’과 ‘연변’, ‘연변대학’은 지명이나 학교명으로서 보다 우선 중국 조선민족의 력사이고 미래이며, 자존심, 자부심, 자긍심이기도 하기 때문에 중국의 조선민족은 우리의 뼈를 갈며 지켜오고 피와 살로 가꾸고 키워 온 우리 연변의 지명과 인명을 지킴에 그 누구와 한 치의 타협도, 양보도, 아첨도, 아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로 태어난 그날부터 수십년간 줄곧 최고 관원(官員)인 자치주 주장(州長)은 물론 각 시와 현의 시장, 현장 및 행정기관의 모든 부처(部處)의 주요 책임자 모두가 우리 민족이고 모든 관인(官印)과 공문서(公文書), 관공부서(官公府署)와 행사장, 공공장소며 길거리 안내문도 모두 우리글-조선글이 당당하게 위에 있고 먼저 있다.
이는 한국이나 고국에서 중국정부와 교섭(交涉)해서 챙겨준 대우(待遇)가 아니라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이고 중국의 조선민족이 한 세기의 피와 땀으로 노력하고 쟁취한 결실이고 보람이다.(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편찬한『연변조선족사』참조)
이는 세계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전례(前例)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나라에 있기 힘든 전례(典例)일 것이다.
연변은 이제 단순한 중국 길림성의 어느 지명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이 고장 200만 중국 조선민족 동포와 겨레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사랑과 애정을 넘어 가슴깊이 간직한 ‘마음의 고향’이며 연변은 ‘중국의 조선족’을 상징하는 대명사와도 같다.
연변은 이제 더는 한국 일부에서 보는 눈높이의 가난하고 락후한 중국 변강의 산간벽촌이 아니라 고풍 찬연한 우리의 민족전통과, 구국, 독립을 위한 선철, 선현, 선렬, 선구자의 넋과 얼을 전승(傳承)함과 아울러 오늘은 창의력으로 차 넘치는 정신(鼎新)과 혁신으로 웅비(雄飛)하는, 미래지향(未來指向)을 의식하며 발전하고 약동하는 고장이다.
“공 든 탑이 무너지랴”고 200만 중국의 동포겨레가 주축이 되고 십억이 어울려 한 세기를 넘어 피와 땀으로 쌓고 쌓은 탑인데, 하늘높이 쌓은 탑에 새겨진 비문(碑文), 비명(碑銘), 비지(碑誌)가 빛나는 ‘조선족’임을 뉘라서 감히 헐뜯고 마구 헐어버리고 대신 당치도 않을 이른바 ‘차오시엔족’, ‘차우센주’, ‘초센주’, ‘초우센주’, ‘센주’로; ‘연변’, ‘연길’을 이른바 ‘옌볜’과 ‘옌지’로 허수아비마냥 내세우려 하는지 참으로 망연자실(茫然自失), 통탄(痛嘆)과 비탄(悲嘆)을 금할 수 없다.
고국의『외래어 표기법』“중국의 인명, 지명 표기”를 정한 대감들은 동근련지(同根連枝)와 동족동포(同族同胞)임은 인정하면서도 오늘날 마치도 동질이상(同質異像)이나 동질다상(同質多像)으로 된, 흡사 정적(正籍)을 이어가는 정실(正室)의 적자(嫡子)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배타(排他)적 정서에서 기인된 소실(小室)의 의자(義子)나 서자(庶子), 얼자(孽子)나 별자(別子)를 얕보며 경계(警戒)하듯이, 또 그 옛날 량반(兩班)어른이라도 된 듯 한 기분으로 상놈을 취급하듯이 마지못해 사돈의 팔촌 대접보다 못한 별명(別名) 비칭(卑稱)으로 폄박(貶薄)한 ‘창씨개명’을 락으로 삼고 있다.
한국은 조선족과 연변이 있음으로 하여 응당히 무한하고 무상한 자랑을 느끼고 보람을 가져야 할 대신 ‘조선족’과 ‘연변’을 에누리 없이 파헤쳐버리고, 송두리채로 뿌리 뽑아 버리고, 력사의 폐허 속에 무참히 던져버리고, 대신 자타(自他)에게 아무른 도움도 없는, 만민의 질타 속에 만신창이가 된 조어(鳥語) ‘차오시엔족’과 ‘옌볜’을 꼭두각시로 내 세울 연유가 과연 무엇일가.
한국의 현행『외래어 표기법』의 제4장, 제2절 동양의 인명, 지명 표기, 제1항을 한 번 베껴 본다.
“중국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 한다.”(‘과거인’과 ‘현대인’ 구분 생략. 필자의『우리 한자 규명과 바른 우리 말과 글』제7절 참조)
바로 이 조목이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글을 무리로 말살하는, 너무나도 무서운 ‘창씨개명’을 부추기고 강요하는 주목받는 문제의 한 법적 대목이다.
법칙이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범을 뜻한다.
부당한 법으로 하여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개울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봇물로 터져 홍수로 번지여지고 있다.
한국의『외래어 표기법』은 지난날 괴나리봇짐 하나로 떠돌아다니며 류랑인생으로 살아온 고조나 증조부모의 찾기 힘든 출생서류를 확인하고서야 그 인명을 한자음으로 써야 하는지, 아니면 한국의 중국어 표기법으로 원지음(현지음)으로 써야 하는지를 가려낼 수 있게 시달구고 있다.
지난날 타향, 타관, 타국에서 리산가족의 떠돌이 신세로 생존만도 어려웠었는데 언제 그때의 그 시절 의원(醫院・醫員)을 찾고 의관(醫官)을 찾고 의사(醫師)를 찾아 출생서류를 갖추며 족보, 가보를 챙기랴.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러한 한국의『외래어 표기법』은, 아니 ‘한국어의 중국어표기법’은 그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라 해야겠다.
출생년도나 사망년도는 잠시 그만 두고 만약 부모 중에 어느 한 쪽이 다른 민족일 경우에는 또 어느 기준을 따라야 할까?
진뢰(陳雷) 중국 흑룡강성의 전임 성장과 리민(李敏) 전임 흑룡강성정치협상위원회 부주석은 가렬 처절한 항일투쟁의 참호 속에서 우정과 사랑을 맺어 부부가 되었다.
진뢰는 1911년 후의 중국인(한족)이고 리민은 조선민족이다. 그렇다면 진뢰는 중국 현대인이니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한다는 규정에 따라 ‘陳雷’의 중국어 발음은 ‘chen lei’이니 우리 글로 ‘천래이/천레이/처언례이’로 표기하고 리민은 조선민족이니 우리 한자음으로 표기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한국의 현행 두음법칙으로 인명 ‘리민(李敏)’을 ‘이민’으로 표기하고 발음해야 할 폐단은 생략함)
진뢰・리민 금혼식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들, 며느리, 딸과 사위, 손자, 손녀들의 이름을 한국에서는 어떻게 부를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필자는 상기 한국의『외래어 표기법』규정에는 중국 국내의 조선민족을 포함한 기타 민족에 대해서는 별도의 표기 기준을 정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문제는 중국 국적으로 된 중국의 조선민족은 한족(漢族) 및 중국의 기타 소수민족과 함께 광의(廣義)적으로 보면 모두 중국 공민(公民), 중국 사람이다.
때문에 상기 규정대로라면 중국의 조선민족에 대한 인명표기도 구분과 구별 없이, 가차 없이 “중국 인명은 …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는 기준에 따라야 할 것이다.
례하면 ‘김(金−jin)’씨는 ‘진・지이인・찐’씨로, ‘박(朴−piao)’씨는 ‘피이아오・퍄오・표’씨로……
한국의『외래어 표기법』의 중국어 표기 기준은 괜스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격이 되어 이제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일 마다 여간 심각하고 복잡하지가 않다.
례하면:
①광복 전 중국에서 활동하거나 머물러 산(주거) 중국 국적이 아닌 조선인(한국인)의 인명 표기,
②광복 후, 중국 국적으로 된 소수민족으로서의 200만 중국 조선민족의 인명 표기 기준 문제,
③부모 중에 아버지가 조선민족이며 아버지 성을 따른 자식의 인명 표기,
④부모 중에 어머니가 조선민족이지만 조선민족이 아닌 아버지 성을 따른 자식의 인명 표기,
⑤아버지가 조선민족이 아니지만 조선민족인 어머니를 따라 호구(호적)에 조선민족으로 된 인명 표기,
⑥아버지가 분명 조선민족인데 자식은 호구에 조선민족이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라 한족(漢族)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올렸을 때의 인명 표기, 또는 한족이 아닌 아버지의 민족으로 올렸을 때의 표기.
⑦먼 조상은 분명히 조선민족・한민족인데 호구에 조선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올랐을 때의 인명 표기,
⑧한국(조선) 국적을 소지한 분이 중국 경내에서 한국인(조선인, 조선민족)이 아닌 중국인이나 기타 민족과 혼인하여 태어난 자식의 인명 표기 기준,
⑨한국인이 중국 조선민족과 혼인하여 태어난 자식이 중국 국적으로 올랐을 때의 인명 표기 기준,
⑩중국인이 한국인에게 시집을 갔거나 한국인이 중국인에게 시집을 갔을 경우 우리 겨레의 피가 반으로, 또는 네 등분의 일로, 여덟 등분의 일로 섞여 출생한 후세가 중국 국적으로, 또는 한국 국적으로, 또는 중국도 한국도 아닌 다른 나라의 국적으로 오른 사람들의 인명 표기 기준은?
그리고 한국인이 중국 국적에 입적하여 중국정부의 관원, 중국의 외교관이 되어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기타 중국인과의 인명 표기 기준과 구별은…
그리고…… 그리고……
위의 실례에서 인명 표기 기준과 규정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엄숙한 출생 성분뿐이 아니라 국제 혼인과 그에 따른 민족 성분과도 관련되어 문제가 몹시 심각하고 복잡해져 인권문제에 까지 치닿고 있다.
같은 중국 사람인데도 오래 전에 한국에 가 정착해 있는 화교는 대접을 달리 해서 성과 명을 분명하게 나누어 주민 등록증을 보면 모두 한자어로 되어있고(비단장사 왕서방까지) 최근에 한국에 시집을 가면 외국 이름(초지민・焦芝敏・쟈오즈민)이 따라 붙는다.
그렇다면 한국인 안재형과 혼인한 중국인 쟈오즈민의 자손들이 어느 국적을 택하고 어디에서 살며 또 그 자손의 자식이 누구와 혼인하고 어느 나라 국적을 지니며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인명 표기 기준이 다를 텐데 이처럼 끝없는 수수께끼만 남기는 표기법의 과학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중국은 한국의 경우와 많이 다르다. 한국은 워낙 단일 민족(최근 국제 혼인으로 다문화가정이 늘긴 하나)이여서 구태여 꼭 민족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에 주민등록과 호적에 민족 성분이 제시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은 호구책은 물론이고 주민신분증 내지 학적 등록, 취직 등록, 사망 등록에 이르기까지도 민족 성분을 꼭 밝혀야 하는 공란이 있다.
때문에 중국을 알려면 우선 56개 민족의 풍속습관과 례의범절에 대한 파악도 중요하지만 22개 성, 4개 직할시, 5개 자치구의 혼인을 통한 많은 가정은 다민족과의 혈연관계를 맺어 다문화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정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중국을 알려면 먼저 31×56(31개성, 직할시, 자치구×56개 민족)부터 시작해보라는 권설을 아끼지 않는다.
한자로 명명된 인명, 지명은 한자문화권에서의 상호 리해와 공통된 문화요소의 핵인 한자의 공용과 공유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그 공유 력사는 세월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한문을 배워 한자를 알게 되였고 우리 한자로써 한문을 통하는 지름길을 갖고 있다.
이 역시 세종대왕께서 후세에 물려준 소중한 무형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외래어 표기법』의 중국어 표기가운데서의 인명, 지명의 표기법이 몰고 온 또 하나의 ‘창씨개명’의 현상을 파헤쳐 본다.
2008년 북경올림픽경기에 참가한 중국 선수들 명단을 실례로 보자.
야오밍, 왕즈즈, 정제, 허커신 등이 姚明, 王治郅, 鄭潔, 何可欣 등이란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요즘 중국 인명 표기에 회오리바람마냥 새로운 붐이 일고 있다.
징징 궈, 민샤 우, 하오 왕, 리친 왕, 난 왕,
위에 궈, 이닝 장, 옌칭 천, 셰샤 천, 잉 천,
……
위의 인명을 뉘라서 郭晶晶, 吳敏霞, 王皓, 王勵勤, 王楠, 郭躍, 張怡寧, 陳艶靑, 陳燮霞, 陳穎이라고 감히 련상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이의 성씨가 이름 뒤에 붙어 있다.
성명(姓名)이 아니라 명성(名姓)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중국인들의 한문자 인명 표기는 성(姓)과 명(名)이 아주 분명하고 성이 앞서고 이름이 따라 붙는 것이 법이다.
한국・조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요즘 중국인들의 인명 표기를 어디까지가 성씨이고 어디까지가 이름인지 분간키 어렵게 표기 하거니와 이제 와서는 똑 마치도 잔뜩 양기(揚氣−洋氣)를 뽐내는 양키(Yankee)들 마냥 중국인들까지 양(洋)무리에 가두어 넣고 ‘미스터 장’, ‘미스 왕’ 하는 식으로 폼을 잡는 품이 마치도 조상 때부터 영어권에서 물젖어 있은 듯싶다.
하기야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대통령의 성명도 영어명으로 생감(省減)시켜 제법 우리 이름처럼 만들어 잘도 부르고 있다.
례하면 리명박은 ‘M・B’로, 김대중은 ‘D・J’로, 김영삼은 ‘Y・S’로, 김종필은 ‘J・P’라는 별명으로 잘도 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조상 무덤 비석의 비명(碑銘)과 족보(族譜)도 ‘M・B’, ‘D・J’, ‘Y・S’ 등 영문 생감 식으로 모조리 고쳐 새길 수 있거니와 또한 당금 돌아간 이들과 돌아가게 될 이들의 비명과 령위(靈位), 위패(位牌), 명부(冥府)에도 위에서처럼 낯 선 자로 새기든가 등록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 중국의 인명이 ‘징징 궈(郭晶晶−곽정정)’, ‘민샤 우(吳敏霞−오민하)’, ‘하오 왕(王皓−왕호)’… 이런 식으로 류행이 되어 번지다 보면 머지않아 성명이 명성으로 순서가 바뀌어 다음과 같은 해괴한 현상이 범람하게 될 것이다.
례하면:
孫文→ 손문→ 쑨원→ 원쑨
魯迅→ 로신→ 루쉰→ 쉰루
毛澤東→ 모택동→ 마오쩌둥→ 쩌둥마오
周恩來→ 주은래→ 저우언라이→ 언라이저우
蔣介石→ 장개석→ 장제스→ 제스장
……
‘孫文’이 ‘원쑨’으로, ‘魯迅’이 ‘쉰루’로, ‘毛澤東’이 ‘쩌둥마오’로, ‘周恩來’가 ‘언라이저우’로 ‘蔣介石’이 ‘제스장’으로 요신일변(妖神一變)하여 표기(둔갑) 된다는 것인데 참으로 전대미문의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문자로 똑 같은 성씨가 우리글 표기로는 다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례하면 한국에서는 중국 선수 ‘劉子歌’를 ‘리우쯔거’라고 하고 ‘劉翔’을 ‘류샹’이라고 한다.
여기서 두 사람의 한문자 성씨는 모두 ‘劉’자이지만 전자는 성씨를 ‘리’, ‘리우’, ‘리우쯔’ 등 여러 가지로 짐작(착각)할 수 있게 하고 후자는 ‘류’씨로 하고 있다.
보통명사 ‘수도(首都)’가 ‘쇼우두’ 또는 ‘서우두’로 혼란스럽게 표기되는 실례와 마찬가지이다.……
한국의『표준국어 대사전』에서는 낱말 ‘창씨개명’을 “일본식 성명 강요”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위의 례는 실로 “일본식 성명 강요”를 뺨칠 정도로 경발(警拔)하게 혁개(革改)하고 변개(變改)하여 왜놈들이 무색해 울고 갈 지경으로 고약하고 괴팍하니 이제 이를 이대로 묵과하고 내버려 둔다면 장차 또 어느 식의 무슨 형태의 ‘창씨개명’이 생겨날지 보통 고민이 아니다.
한국의 한 두 학자가 중국 대만에서 싹 틔워 만들었다는 한국의 이른바 ‘중국어 표기법’이 중국의 대륙에서도 신통하려니 함은 오산이다.
만약 그 것이 오산이 아니라면, 필자가 너무 무식해서인지 한국의『외래어 표기법』의 중국어 표기가운데서의 인명, 지명의 표기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국에서 중국의 200만 동포를 겨냥한 ‘창씨개명’은 삭풍(朔風)마냥 혹한(酷寒)으로 우리 발해력사와 동이문화(東夷文化)를 송두리째 삼켜 랭동시켜버리고, 사악한 암류(暗流)마냥 해외 동포들의 동족어와 동포들의 민족적 일체감과 동질성(同質性) 및 유구한 문화를 삼켜 뭉개고 좀 먹이고 있다.
말이나 글이나 력사나 문화나 모두 지키지 않으면 잃기 마련이다.
우리가 지키지 않는데 남이 지켜줄리 만무하고 우리가 주장하지 않는 것을 남이 인정해 줄 리 만무하다.
때문에 사라지고 소실되기 전에, 있을 때 찾고, 있을 때 굳게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우리 한자, 한자어와 한자음을 비롯한 우리의 문자, 우리의 말과 글로 이어온 우리의 문화유산은 이제 우리가 지키지 않아 주인 없고 임자 없고 거처마저도 없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령마냥, 귀숙을 모르는 망령마냥 어둡고 찬 구천에서 헤매고 있다.
우리 동포가 개척하고 우리 겨레가 이름 짓고 수백 수천 년 말 달려 주름잡고 지켜왔던 광활한 대지, 훗날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태어나고 활동한, 오늘도 수백만 우리 겨레가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이 유서 깊은 고장의 지명, 인명이 다만 오늘의 지경이 다르다고 하여 최근 고국에 의해 외국어도 아니고 외래어도 아니며 중국어도 아니고 오랑캐말도 아닌, 귀신이 곡해도 모를 소리로 불리고 있다.
워낙 우리의 것임이 분명하여 이역만리에 뿌리내린 지명, 인명으로 력사를 밝히고 명분을 지키기도 힘겨운데 오늘날 나와 상관없다며 되는대로 이름 지어 팽개쳐버리고, 달라고도 않는데 공물마냥 두 손 들어 공손히 누구에겐가 바쳐드리려 하다니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세세만년 살아온 이 고장 저 동네, 예나 지금이나 항상 정다운 푸른 산과 맑은 내, 크고 작은 신작로며 굽이굽이 오솔길, 우리 동포들이 몸소 세운 기관, 단체, 학교들이 마냥 우리 몸으로 낳고 우리 손으로 키운, 우리 피와 땀으로 살찌운 애지중지 어린애와 같고 대를 이어갈 소중한 씨앗과도 같아 그 하나하나가 우리 동포들의 뼈이고 살점이로되 그 많은 우리 산촌수곽, 정든 동네며 고장들, 길거리며 학교, 회관도 모두 낯선 이름에 외롭고 적적하여 스산하다 못해 쓸쓸하고 한산하고 삭막하기가 그지없게 되였다.
고국에서 퍼 붓는 불문곡절 불벼락에 급기야 우리 해외 동포들의 삶의 터전은 황폐되고 대를 이을 씨는 말라버리여 수백만 해외동포는 줄 끊어진 풍연의 신세가 되여가고 있다.
성도 설고 이름도 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면목까지 설고 마음마저 설다보면 서로 남남이 따로 있으랴, 마침내 ‘재외동포’가 ‘제외동포’로 전락되여버리고 고국의 해외 적자가 부모 잃은 고아신세로 되여버리고, 효자 렬녀가 장차 고국도 조상도 모를 후레자식으로 번져 질까 심히 우려된다.
필자는 우리 한문자(漢文字)의 시조(始祖)와 원초(原初), 정초(定礎)와도 같은 동의문자(東夷文字)의 발굴(發掘)과 고고(考古) 및 인증(認證)과 전승(傳承)에 힘 다하여 동이의 맥락(脈絡)을 이어온 우리의 력사적인 위치확립(位置確立)은 하지 못할지언정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원체(元體) 우리의 인명, 지명, 명사(名詞), 지어는 모든 품사(品詞)까지도 마구 고쳐 력사와 미래, 자타(自他)와 안팎, 상하(上下)와 내외(內外) 모두에게 해(害)와 악(惡)만 끼치는 무모(無謀)를 당장 멈추라고 질호(叱號)하고자 한다.
중국도 만약 한국의 현행『외래어 표기법』의 “중국 인명 표기”와 “중국 지명 표기” 규정과 원칙을 본받고 인용하여 “한국어의 한문 표기법”을 제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규칙으로 될 것이다.
“한국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한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고 한국의 력사 지명으로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한자음대로 하고, 현재 지명과 동일한 것은 한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한다.”
중국도 한국마냥 상술한 원칙과 기준을 따른다면 력사 기준을 어느 시대 어느 년대로 가를지는 몰라도 아마 ‘세종대왕’은 력사인물로 취급이 되어 ‘世宗大王’이라고 표기할 것이지만 광복 후의 현대인들에 한에서는 한국에서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을 이른바 ‘마오쩌둥’이라고 중국의 원지음으로 표기하는 것처럼 중국도 한국의 전임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아마 한국의 원지음인 한국어발음으로 ‘ㅂ+ㅏ+ㄱ, ㅈ+ㅓ+ㅇ, ㅎ+ㅢ’를 흉내 내여 중국식으로 ‘怕正黑’로나 ‘pakzenghi’로,마찬가지로 ‘노무현(盧武玄)’은 ‘孬母和恩’으로나 ‘鬧沫恨’, 또는 ‘nomuhen’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의 인명 ‘박정희’를 한국어 발음으로가 아니라 한문자 ‘朴正熙(piaozhengxi)’로, ‘노무현’을 한국어 발음으로가 아니라 한문 그대로 ‘盧武玄(luwuxuan)’이라고 표기하고 부르고 있다.
더구나 유엔의 현임 사무총장 ‘반기문’의 경우 영어권에서는 모두 "Ban Ki-moon"으로 표기하지만 중국에서는 영어발음 ‘ㅃ ㅏ ㄴ, ㅋ ㅣ, ㅁ ㅡ ㅜ ㄴ’식으로가 아니라 한국인 외교관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인명표기의 전통 관용(慣用)에 따라 반기문이 한국에서 써오던 한자명 그대로 ‘潘基文’이라 표기하고 한문 한자음 ‘panjiwen’이라고 발음하고 있다.
위의 실례로 한국인 인명 ‘朴正熙’, ‘盧武玄’, ‘潘基文’ 등 표기에서 한국・조선에서의 한문자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성(姓) 따로 이름 따로 형태와 체면을 다 봐주고 있다.
일본인의 인명도 과거 ‘이토히로부미’를 일본어 발음으로가 아니라 한문으로 ‘伊藤博文’이라고 표기하고 중국 발음‘yitengbowen’ 그대로 읽으면 그만이고, 지금 현재 인명도 ‘고이쯔미 쥰 이찌로’라고 하느냐 아니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라고 하느냐며 논쟁하지 않고 ‘小泉純一郞’이라고 쓰고 중국 문자 그대로 발음하고 ‘아베 신조’ 역시 ‘福田’이라고 표기하면 그만이다.
역시 일본의 한문자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베트남의 고인 ‘호지명(胡志明)’, 현임 주석 ‘원명철(遠明哲)’, 싱가폴의 ‘이광요(李光耀)’ 전임 총리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우리말 방송과 우리글 신문, 출판도 ‘胡志明’을 ‘후치민’이 아니라 한자어 그대로 ‘호지명’으로, ‘阮明哲’을 ‘응우옌 민 찌엣’으로가 아니라 ‘완명철’으로 표기하고 ‘李光耀’는 ‘리광요’로 표기하고 있다.
지명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중국의 지명 ‘북경(北京)’을 ‘베이징’으로, ‘상해(上海)’를 ‘상하이’로, ‘연변(延邊)’을 ‘옌볜’으로 표기하는 기준과 원칙을 본받는다면 중국에서도 으레 한국의 지명 ‘인천(ㅇ+ㅣ+ㄴ,ㅊ+ㅓ+ㄴ)’을 한국의 이른바 원지음을 기준으로 ‘淫沉’으로나 또는 ‘陰沉’, ‘陰塵’, ‘因臣’,‘銀沉’, ‘飮晨’, ‘因沉’, ‘淫晨’, ‘淫臣’ 등 한국어 발음에 따르거나 아니면 아예 중국어 병음‘ yinchen’으로 표기해야 좋으련만 중국은 한국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항상 중국어, 중국 음 그대로 ‘仁川(renchuan)’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일본의 ‘本州’, ‘仙台’, ‘大阪’ 등, 베트남의 ‘河內’, ‘海防’, ‘提岸’, ‘順化’, ‘歸仁’, ‘榮市’ 등, 러시아의 ‘海參葳’, ‘双城子’, ‘海蘭泡’ 등, 미국의 ‘眞珠灣’, ‘舊金山’ 등, 호주의 ‘黃金海岸’, ‘金島’, ‘東南角’, 등등 한문자로 된 지명이 부지기수인데 일본 또는 베트남, 러시아, 미국, 호주의 지명이 각자 그 나라마다 나름대로 어떻게 발음 되든 지간에 중국은 아랑곳 하지 않고 중국 나름대로 쓰고 부르고 있다.
중국 대사전『辭海(사해)(1979년 판)』1919쪽에는 ‘아메리카합중국・유에스에이(USA)’를 ‘美利堅合衆國’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외교적 특례를 제외하고 13억 중국인은 다만 ‘美國’으로만 부르고 있다.
이미 관용으로 명명된 지명을 구태여 새삼스레 외국어니 외래어니 고주알미주알 따지지 않고 부르던 대로 그냥 편히 부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가 국제화폐기금조직을 ‘IMF’로, 세계 무역기구는 ‘WTO’로, 국제연합기구는 ‘United Nations’로, 또는 ‘UN(유엔)’이라고 하지만 중국만은 영어발음으로가 아니라 자체로 명명한 단어로 각각 ‘國際貨幣基金組織(국제화폐기금조직)’, ‘世界貿易机構(세계 무역기구)’, ‘聯合國(련합국)’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NBA’, ‘CBA’, ‘F1’, ‘DNA’, ‘GDP’, ‘WHO’, ‘FTA’, ‘CPI’와 같은 영문략어도 반드시 규범 된 중국어 명칭인 ‘美國職業藍球聯塞’, ‘中國男子藍球職業聯塞’… 등으로만 쓰도록 되여 있다.
중국어에 ‘United Nations’, ‘UN’, 또는 ‘유엔’이라는 단어를 외래어로 받아들이는 음과 문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UN’이라는 영문과 그 발음보다는 여러 나라의 모임조직이라는 뜻으로의 중국 단어 ‘聯合國(련합국)’이 더 알기 쉽게 머리에 쏙 들어오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자기 나라 사전 속의 순 중국어 단어로서의 역할, 자기가 지은 이름으로 력사에 영원히 남기려는 그 무게가 가늠할 수 없으리만큼 크고 사려와 웅심 또한 너무도 깊다.
다만 한국의 수도 ‘서울’을 지금까지 ‘한성(중국어발음으로는 한청−漢城hancheng)’이라고 불러오다가 몇 해 전에 대한민국의 서울시가 ‘서울’에 대한 한문(漢文)표기를 ‘수이(首爾)’로 정하고 중국에서 한문 발음 그대로 ‘首爾(shouer→서우얼)’로 써줄 것을 요청해 중국도 쾌히 받아 들였다고 한다.
중국의 인명, 지명을 모조리 중국어의 한글 표기법에 따라 바꾼 한국의 엄청난 대가에 중국이 한국의 도시명 하나 바꾸어 불러 베푼 대접이리라.
그러나 서울 지명 ‘한성(漢城)’을 제외하고 ‘漢城海關’, ‘漢城酒店’, ‘漢城高速客運站’…… 등등의 ‘한성(漢城)’은 ‘서우얼-首爾’이라고 고치지 않고 여전히 ‘한성(漢城)’이라고 명하고 있다.(본문 위의 실례 참조)
중국은 저희들의 글과 발음으로는 [박], [희], [현]…과 같은 음을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워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 외국의 인명, 지명 표기 원칙을 고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은 ‘朴正熙’, ‘胡志明’ 같은 인명과 한국의 ‘仁川’, 조선의 ‘新義州’, 일본의 ‘東京’ 등; 베트남의 ‘河內’, ‘榮市’ 등; 러시아의 ‘海參葳’, ‘双城子’, 미국의 ‘眞珠灣’, ‘舊金山’ 등, 호주의 ‘金島’, ‘東南角’, ‘黃金海岸’ 등등을 외래어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문자로 이미 함축된 뜻을 갖춘 특정되고 인정된 인명, 지명을 품사로서의 기능과 형태로서의 소임뿐이 아니라 오래오래 불리며 특유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고 있다.
인명, 지명 그것이 자국이든 타국이든 그 곳이 내국이든 외국이든 그 이름을 내가 지었든 남이 지었든 일단 한문자의 뜻을 갖고 명명이 되었다면 중국은 외래어가 아니라고 본다.
이 견해의 핵은 인명, 지명을 비롯한 한자어 단어는 그 낱말을 이루는 최초부터 한문으로 결합(합성)되었고 또한 오로지 한문화로만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뿐이 아니라 한문화권에 포괄(포함)된 한자 문화권인 한국(조선)도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준칙이라고 본다.
중국은 옛날도 그렇게 쓰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며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냥 그렇게 쓰고 부를 것이다.
이는 중국의 한자문화권의 영향이 짙기 때문인 것도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력사적인 혈연, 줄곧 내 것 네 것이었던 령토, 또는 령역을 의식하고 과거와 오늘, 미래를 갈라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뿌리 의식을 자손만대로 키워가고 이어가자는 속셈, 오늘은 천리만리 타향, 타국에 멀어진 지명이지만 버리지만 않고 지켜 간다면 그 언젠가는 종당에 내 품에 돌아오리라는 그 철심석장(鐵心石腸)에 오히려 마음이 경건해진다.
참으로 웅심이라고 해야겠는지 야심이라고 해야겠는지 아니면 꿍꿍이셈이라고 해야겠는지는 두었다 평가하고 한국도 다른 나라의 무엇이나 크게 보고 멀리 보며 넓게 보고 깊이 보는 넉넉한 마음가짐은 비교해 볼 바라고 여겨진다.
중국은 외국어와 외래어를 귀화와 순화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아울러 자국의 낱말 ‘茶(차)’, ‘陶器(도기)’, ‘武術(무술)’, ‘京劇(경극)’과 같은 무수한 단어를 문물과 함께 수출해 기타 나라, 다른 민족이 널리 차용하도록 한다.
남들은 이처럼 자국의 지명, 인명은 물론, 바다 너머 수 천리 다른 나라의 지명에도 자기의 문자와 언어로, 자기의 독특한 문화로 이름 지어 흔들림 없이 자기의 것으로 잘도 지키고 키우는데 우리 고국(한국)은 워낙 우리의 것이었음에도 불고하고 나와 관계없다고 도리질하며 왜 스스로 부셔버리고 무너뜨리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는 남들(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심계고산(深計高算)을 부러워만 하지 말고 마땅히 우리로서의 연모지책(淵謨之策)으로 우리의 것을 찾고 지켜야 할 것이다.
해내외의 모든 동포들의 마음을 모아 당장 무모한 ‘창씨개명’ 불장난을 멈추라고 대성질호하고 아울러 하루 빨리 잃어버린 것, 바수고 부수고 버리고 던진 것, 낡고 헤어진 것이라도 무릇 우리의 력사와 현실과 미래에 유조하고 유리하다면 에누리 없이 모두 다 구조하고 복구하고 수선하여 우리말과 글의 아름다운 원형을 되찾을 것을 간절히, 간곡히 간촉하고자 한다.
수천 년의 문화유산이 우리 세대에 와서 아차 실수와 불찰로 영영 사라지고 소실되여 국맥이 끊어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액운이 없도록 우리 해내외 동포들도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위기일발인 시각에 어찌 태만히 관망만 하랴. 고로 필자는 비록 고국의 시민권자도 아니요, 영주권자도 아닌 한 해외 동포 3세에 불과하지만 보잘 것 없는 필부의 힘으로나마, 우리 고국의 휘황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의 소실과 류실을 막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을 구국의 횃불로 지펴 두려움과 송구함을 무릅쓰고 이 한 몸을 태우면서 감히 이글을 간간(懇諫)의 진정(陳情)서로 사랑하는 고국에 삼가 드리는 바이다.
*** 『음운법칙과 어음순화를 무시한 한국의 ‘중국어표기법’』, 『‘현지음-종잡을 수 없는 중국의 원지음’ 원칙(주장)의 중국어 인명지명 표기의 폐단』, 『‘두음 법칙’에 일그러진 우리말과 우리글』 등은 생략 함--필자
2011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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