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에 한자를 섞어쓰자>와 그 <재론>에서 필자는 ‘한자는 우리민족의 글, 한자문화는 우리민족의 문화’라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그 론거를 상세히 제시하지 못하였다. 본문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론술하고자 한다.
한어의 력사分期에는 고대한어(五代이전)와 현대한어(宋代이후) 2개 단계로 획분하는 설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현대한어의 기본 구도는 宋代 때 이미 형성되였기 때문에 2단계설도 도리가 있다. 우리민족이 쓰는 한자는 形, 音, 義 3개 면에서 모두 고대한어를 지키며 조심스럽게 변화, 발전시켜왔지 현대한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대한어의 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례: 國국/궈 合합/허 多다/둬 등. 고대 한어의 음도 우리민족의 어음 체계와 발음 습관에 편리하도록 개조하였다. 례: 達닫/달 勃받/발 溪켸/계 哭콕/곡 등.
현대한어에 새로 생긴 글(形, 音, 義 포함)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례: 吗 妈 嘛 骂 奶 哪 氖 钠 呐 啦 垃 旯 噶 嘎 尬 旮 这 你 呢 那 등.
고대한어에 있던 글에 부여한 현대한어의 새로운 음과 뜻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례: 的de 地de 得de 着zhe 了le 등.
고대한어에 없는 단어도 우리절로 창조하여 써왔다. ‘却說’의 고대한어 원 뜻은 ‘말을 이미 언급했던 화제로 돌려’이다. 우리말에 ‘각설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장타령군’의 뜻을 부여하였다(‘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 않고 또 왔네’ 참조). ‘看過(보다가 소홀히 빠뜨리다)’는 고대한어에 없는 단어를 우리가 만들어 쓰는 것이다. 현대한어에 ‘看過(본 적이 있다)’라는 단어결합이 있지만 의미가 우리말과 완전히 다르다. 그 외에도 우리절로 만든, 한어에 없는 한자어들이 아주 많다. 례: 우왕좌와(右往左往) 비일비재(非一非再) 오리무중(五里霧中) 흐지부지(諱之秘之) 등.
이 외에 우리절로 만든 한자도 있지만 성공적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한어와 한자어간의 이런 차이점이 얼마나 되는가? 필자가 통계한 바로는 현대한어 문장에 나타난 단어와 그에 대응되는 한자어간의 차이점은 어음은 100% 다르고 어휘(단어의 품사 포함)는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이 약 55%밖에 안 된다. 즉 한자어는 어음, 어휘상 한어와 크게 다른 별개의 언어체계이다.
한자를 중국에서 입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2천년 정도 써왔고 훗 단계의 1천여년간은 우리 독자적으로 변화, 발전시켜 별개의 언어체계화 했다고 할 때 한자는 우리의 글, 한자어는 우리의 언어로 보아야 한다.
이상은 중국인이 창제한 한자를 우리가 배우고 입수하였다고 가정해 놓고 한 말이다. 그러나 한자를 중국인이 창제했다고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夏나라 때까지 중국에는 문자가 없었다. 한자는 商나라 때 창제한 것이다. 商나라는 東夷족이 中原으로 쳐들어가 세운 나라이므로 우리민족의 조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 력대 문헌에 중원지역을 華夏라 불렀고, 그 동쪽의 사람을 東夷로 불렀다. 지금의 황하 하류로부터 시작하여 그 동쪽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여러가지 민족, 부족을 東夷라 총칭한 것이 아니라 우리조상의 나라와 민족만을 동이라 불렀다. 우리 조상의 나라를 <史記>, <漢書>에는 ‘朝鮮’이라 했고 <後漢書> 이후는 동이라 칭하며 그 안에 부여, 예맥, 숙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넣었다. 이로 보아 동이는 우리민족의 조상이며 적어도 우리민족이 동이의 주체 성원이였다.
商이 망하자 箕子가 조선으로 갔다고 하는에 이를 信史로 보기에는 근거가 미비하 다. 그러나 상나라 많은 遺民이 자기 민족의 발원지인 동쪽--조선반도로 피난 갔다고 보기에는 충분하다. 마치 원나라가 망하자 대부분의 몽고족이 자기의 발원지 북으로 피난 간 것처럼 말이다. 이 역시 상나라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세운 나라라는 증거의 하나로 될 수 있다.
상나라 문화 중 특출한 것이 거북이 뼈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쑥을 넣어 태워 점을 치는 것이다. 뼈에 쓴 점괘 甲骨文이 바로 한자의 최초 문헌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거북’이란 단어는 이 동물의 이름 ‘거←구(龜)’에 점을 치다의 ‘북←복(卜)’을 합쳐 부르니 이는 기적적인 현상이다. 같은 시기의 다른 민족에는 이런 문화가 없었다고 할 때 같은 동이민족인 우리민족의 조상과 商나라 민족은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같은 민족이면 언어도 같아야 한다. 한어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우리말과 근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래에 그 례를 들어보자.
한어의 ‘ㄷ’ 받침이 후세에 우리말의 ‘ㄹ’받침으로 변했다. 그러면 ‘섣달’, ‘설쇠다’ ‘나이 다섯 살’의 섣, 설, 살은 다 ‘歲’자와 관계된다.
때/時: 2,000여년전 한어에서 ‘時’자를 ‘때’처럼 읽었다.
좀/蟲: 2,000여년전 한어에서 ‘蟲’자를 ‘좀’처럼 읽었다(‘좀벌레’ 참조)
되놈/夷戎: 2,000여년전 한어에서 ‘夷戎’을 ‘되놈’처럼 읽었다.
금/躬: 2,000여년전 한어에서 ‘躬’자를 ‘금’처럼 읽었다(몸을 의미하는 ‘오금’ 참조)
이상은 체언의 례이고 용언의 례를 살펴보면 고대한어에 교착어의 흔적이 보이며 특히 우리말의 종결토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종결토와 그 발음이 거의 대응된다.
‘也’자를 2,000여년전에는 ‘댜’처럼 발음했다. ‘댜’가 ‘다’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언어현상이겠다. ‘是’자를 [zi]처럼 발음했으며 탁음 [z]는 우리말에서 잘 탈락되므로(마슬/마을, 가슬/가을, 구시/구이 등 참조) ‘이’처럼 읽기 일쑤다. ‘矣’는 2,000여년전 ‘디’처럼 읽었다. 우리말의 종결토 ‘지’는 그 원형이 ‘디’다(평안도 방언에 종결토 ‘지’를 ‘디’로 발음). 이런 인식으로 아래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상기의 례문은 몽땅 <맹자>에서 뽑은 것이다. 결속어가 우리말의 종결토와 그 음이 얼마나 흡사한가!
우리민족이 한자를 입수한 력사를 1,500-2,000년으로 보는데 이 정도의 력사로는 상기의 언어현상을 해석하기 어렵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상나라는 우리말과 비슷한 동이말을 썼고 동이족은 한자 창제의 주역이였다. 周가 商을 대체하며 중국은 기초방언 지역을 서쪽(鎬京-長安)으로 1,000킬로 정도 옮겨갔고, 상의 유민은 동쪽(조선반도)으로 2,000킬로 정도 옮겨갔으며 2,000여년간의 ‘平和演變’을 거쳐 두 언어의 간격이 점점 멀어진 것이겠다.
후세에 변화된 중국어를 다시 입수하며 상나라때 쓰던 말은 혹은 소실되였고 혹은 우리말의 고유어에 스며들었다. 위에 필자가 든 예(체언, 용언 포함)들이 바로 고유어에 스며든 것들이며 잘 찾으면 아주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은 夏商周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200여명의 학자를 동원하여 5년간 연구한 끝에 하, 상, 주 3개 조대의 건립 년대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정확한 確定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 一介 草民인 필자의 한어발달사 지식으로 내 놓은 상기 정도의 론거도 하상주공정이 내놓은 론거 못지 않다.
‘상을 세운 동이민족은 우리민족의 조상일 것이다’, ‘상나라 때 생긴 한자의 창제에 우리민족의 조상이 주역을 했다’. 이 두 명제에 대해 그래 ‘절대 허황한 말이 아니다’, ‘일리가 있다’라는 평가마저 내릴 수 없단 말인가!
우리는 종종 ‘廣州起義에 우리민족이 참여했다’, ‘天津 해방에 우리민족의 공로도 있다’라는 말을 하며 민족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광주기의나 천진 해방에 참여한 우리민족이 100분의 1도 될까 말까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민족이 한자를 창제한 주역이라고 하는데 ‘No!’ 하는 것이 된 말인가!
우리민족의 적지 않은 사람이 출판물에 한자를 쓰기 싫어하며 심지어 한자어 자체도 배격하려 하는데는 다른 민족의 글과 말을 쓰면 민족 자존심이 꺾인다는 저의가 깔려 있는 원인도 있다. 필자의 이 글은 이런 견해를 부정하고자 하며 소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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