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심이 습근평에게 만들어준 바느질 쌈지, 그 우에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글자를 수놓아져있다.
1972년 겨울, 제심과 자녀들. 앞줄 좌로부터 제교교, 제심, 습안안, 뒤줄 우로부터: 습근평, 습원평.
습근평 의 사무실에는 그와 가족이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2015년 2월 13일, 습근평은 섬서성 연안시 연천현 문안역진 량가하촌에 내려가 촌민들을 위문하며 탈빈곤 치부 현황을 조사연구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바느실로 먼길 떠날 아들의 옷 지으시네.”
1969년 1월, 16세 미만의 습근평이 행낭을 지고 멀리 섬북 량가하에 하향했다. 먼길 떠나는 아들을 걱정해 모친 제심(齐心)은 손수 바느질 쌈지를 만들고 그 우에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글자를 수놓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바느질 쌈지는 모자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놓았다.
“부모는 아이의 첫번째 스승”
“그 시절,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가장 소박했다.”
“어릴 적부터 교교가 입던 옷은 안안이 물려입고 안안이 입고 나면 근평이 물려입었다. 어느 한번은 근평이 안안의 꽃옷을 입지 않겠다고 그만 울음보를 터친 적이 있다. 당신이 급급히 검은색 잉크로 꽃신과 꽃옷을 물들여서야 그들에게 입혔다.”
남편 습중훈을 그리면서 지은 《중훈, 미소로 당신을 멀리 보내오》란 글에서 제심은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자식을 사랑했으나 절대 어루만져 키우지 않았다.
…
“나는 이 세상에 태여나서 이미 부모와 48년이란 세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리해는 부모님에 대한 감정처럼 날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2001년, 습근평은 집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정은 인생의 첫번째 수업이고 부모는 아이의 첫 스승이였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가정교육을 받는다. 어떠한 가정교육이 있으면 어떠한 자식들이 있기 마련이다.
“열심히 사업하고 열심히 배우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시오.” 제심은 남편이 자신한테 한 이 당부를 좌우명으로 간직하고 자신의 언행으로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시종 검소한 생활습관을 유지했으며 종래로 남편의 직권이나 영향력을 리용해 일자리를 집과 가까운 곳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으며 가장 어려웠던 그 시절 달마다 제때에 당비를 납부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 습근평의 누나 제교교는 비록 자신과 동생들이 어릴적 화려한 옷은 없었으나 “모두 공부를 잘하고 마음이 충실했으며 정신이 건강했다”고 회억했다. 또 “가장 힘들고 차별시를 당하던 세월에도 여전히 락관을 유지하고 존엄 있게 살았다”고 말했다.
2023년 새해를 앞두고 습근평은 국가주석의 신분으로 열번째 신년사를 발표했다. TV 화면 속 습근평 의 사무실에는 그와 부인 팽려원 이 모친 제심를 부축하고 있는 사진이 놓여있었다. 사진 속에서 모자는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모자간의 깊은 정은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습근평은 지금까지도 어릴적 어머니의 등에 업혀 서점에 그림책 《악비전》을 사러 간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어머니는 그에게 악비의 어머니가 ‘정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악비의 등에 새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습근평은 그 때를 회억하며 “당시 내가 글자를 등에 새기면 얼마나 아픈가고 얘기하자 어머니는 아프지만 가슴에 아로새겨졌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회억했다. 그때부터 ‘정충보국’이란 네 글자는 습근평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평생의 추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오히려 더 기쁘다”
“어느 한번 근평과 함께 앉아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산지의 한 농민이 현지 사법 부문의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후 도처에 신고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 내용을 보고 근평이 긴 한숨을 쉬며 ‘인민들이 참 쉽지 않네요!’라고 한탄했다.”
제심은 이 에피소드를 자신의 글에 적어넣었다. 그는 “근평이 인민들의 일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 큰 위안을 느낀다고 했다. 습중훈의 비서를 력임한 적이 있는 유혜욱은 “제심 녀사는 근평의 심성이 아버지를 많이 닮고 어떤 일은 아버지의 처리방식과 똑같다고 말했다”고 회억했다.
십여살 나이 때 습근평의 념원은 “마을 사람들이 고기를 경상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이였다”. 30세 좌우에는 “아늑한 삶만 바라는 것은 평범한 추구입니다. 나는 ‘고생’을 할 준비가 되였습니다.”라고 주변의 동료들과 속마음을 터놓았다. 60세 되던 해에는 한 로인의 손을 잡고 “나는 인민의 근무원입니다”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황토고원, 섬북의 한 작은 마을 촌당지부 서기에서 대국의 최고지도자, 억만인민이 애대하는 수령으로 되기까지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습근평의 일상이다. “관리가 되면 그 지역을 위해 복된 일을 하리라”는 뜻을 세운 습근평은 사업 때문에 어머니의 곁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다.
2001년 음력설, 습근평은 멀리 복건에서 부모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충정》은 모자간 한차례 통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설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그래. 괜찮아… 아들, 사업이 바쁘고 사업이 수요한다니 어머니는 오히려 기쁘구나.”
습근평이 사업 때문에 설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제심은 오히려 위안을 느낀다며 “사업을 잘하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최대의 효도”라고 얘기했다.
제심은 아들이 온 마음으로 일에 몰두하고 ‘중책’을 짊어지길 바랐다. 습근평 또한 어머니의 기대를 한시도 잊은 적 없다. 그는 자신은 “인민을 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며” “자신의 부모님을 사랑하듯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의 리익을 도모하며 인민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이끌 것”이라고 했다.
흐르는 세월, 산천의 증명
섬북에 하향한 시절, 그는 마을사람들 인상 속에 “고생을 두려워 않는 좋은 젊은이”였다. 그가 정정(正定)을 떠난 지 수년 후에도 정정 사람들은 그를 “우리의 서기”라고 친철히 불렀다. 또 복건에서 근무할 때 현지인들은 그를 “인민의 성장”이라고 불렀고 총서기를 력임한 후 한 마을의 로서기는 엄지를 치켜들며 “정말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집은 가장 작은 나라이고 나라는 천만개의 집으로 이루어진다. 좋은 가풍 속에서 자라나고 인민들 속에서 성장한 습근평은 시종 인민을 마음속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있다. 그는 수천만 가정의 행복과 억만 인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밤낮으로 분투하고 있다. 그는 인민을 저버지 않았고 어머니의 마음을 저버지 않았다.
/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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