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천직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누구에게나 타고난 재능이 있고 그 재능이 직업으로 이어질 때 행복을 느낀다. 살아가기 위하여 종사하는 일을 생업이라 한다면 천직은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게 하는 걸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데서 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겠다.
일과 삶이 일치하는 리상적 경지를 일컫는다는 천직, 그런 의미로 리아련씨는 행운아라 할 수 있다. “스토리텔러가 천직”이라 말하는 리아련씨에게 영화의 각본을 쓰고 본인이 직접 쓴 각본을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가는 일상이 즐겁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지금 한창 미국 영화계에서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97년생 조선족 녀감독 리아련씨를 전화로 만났다. 20대의 열정과 패기에 그 나이대 답지 않은 풍부한 경험과 경력을 쌓아올려 그야말로 로련미까지 느껴진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고 사람을 촬영하는 게 천직인 리아련씨지만 정작 본인 사진은 되려 찍은 게 별로 없다며 웃었다.
# 운명적 선택
“엄마가 들려주신 데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저는 그림영화보다는 TV 광고를 보기 좋아했대요. 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TV에서 광고가 나오면 그렇게 집중해 볼 수가 없었다는 거 있죠.”
뭘 알고 봤겠냐며 2, 3세 때 일이라 크게 기억나는 건 없다며 웃었다. 반면 5세 때 봤던 영화는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단다. 그 영화가 나어린 리아련씨에게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라고 지금도 가끔 다시보기를 찾아볼 정도로 저의 인생영화라 할 수 있죠.”
3세 때 TV 광고를 눈여겨 보던 아이가 5세 때 영화 한편을 통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니... 어쩌면 그때부터 마음속에 영화인의 꿈이 싹트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 북경에 가서 살겠다고 선언한 5세 어린이
‘5세 때를 그리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냐’는 의문이 들 법도 한데, 리아련씨는 5세에 북경으로 가서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연길에서 나고 자랐지만 검사인 아버지와 사업을 하던 어머니 슬하 외동딸로 태여나 늘 바쁜 부모 밑에서 일찍 자립심을 키웠던 셈이다. 연길에서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북경 이모집에 놀러갔다가 북경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단다.
“처음 북경에 가보니 5살 아이 눈에도 대도시가 굉장하고 신기했던 거죠. 또 북경에 친척들도 꽤 있었는데 모두 저를 둘러싸고 예쁘다, 예쁘다 해주셨어요. 너무 신나게 놀다보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무작정 북경에 남아 이모와 함께 살겠다고 떼를 썼어요. 그런데 어린 딸아이의 의견도 항상 존중해주셨던 우리 부모님이 저의 ‘떼’에 동의하셨어요.”
간식 먹는 시간이 있고 점심을 먹으면 잠자는 시간이 따로 있는 유치원 생활을 하던 리아련씨는 한족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던 나이에 그렇게 북경의 한 소학교 교실에 앉혀졌다.
“유치원 다니던 습관 대로 저는 수업중 배가 고프니 집에서 가지고 온 사과를 꺼내 먹었어요. 그때 몹시 놀라던 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 선생님이 뭐라뭐라 했지만 한족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리아련씨는 선생님의 몸짓을 보고 대개 이러면 안된다는 뜻임을 어림짐작했다고 한다.
“정확히 1년이 걸렸어요. 제가 소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시간 말이죠. 그 사이에 한족말을 익히고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 국밥이 그립고 집밥이 사무쳤던 그 시절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이 빨랐고 신생 사물에 대한 접수도 남달랐던 리아련씨, 5세 때 북경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던 그 어린이는 소학교-초중-고중 시절을 북경에서 보내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고중시절 또 한번 ‘선언’을 한다.
리아련씨의 류학생활은 이런 결정에서 시작되였다. 초중 때부터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고중 때는 종종 미니영화를 찍으며 영화 제작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대학입시를 치르는 대신 그는 미국의 영화 관련 몇몇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그중 장학금을 가장 많이 준다고 했던 베일러대학교를 최종 선택했다. 목표가 정해지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5세 때 겪었던 소학교 적응기와는 전혀 다른 관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옛날이야기지만 그 당시 리아련씨는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본과를 3년만에 조기졸업한 리아련씨, 그 당시 그토록 힘들고 간절했던 본과생 시절이 돌아보면 많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며 그때를 회억했다.
“대학교가 교외에 있었거든요. 대학교 학생 래원 대부분이 근처 생활권 사람들이다 보니 저같은 류학생이 없었어요. 시내 슈퍼를 한번 나가려면 큰 계획을 세워야 해요. 너무 외곽이라 자가용 차가 없으면 어딜 가기가 엄청 힘들어요. 제가 대학교를 3년만에 조기 졸업했거든요? 어찌보면 너무 힘들어서 빨리 졸업하고 싶단 생각에 공부에만 매달렸던 원인도 커요.”
방학을 리용해 고향에 왔다가 학교로 돌아갈 때면 트렁크에 된장이며 김치를 바리바리 싸들고 가던 이방인 리아련씨는 외로움을 달래는 대신 공부에만 전념했다. 치렬하게 매달린 덕분에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영화 방면 수업을 하면서는 훨훨 날았다.
“당시 교수님이 글씨기와 감독 방면으로 저한테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졸업을 앞두고 저한테 USC영화예술대학교에 가서 연구생 공부를 하는 걸 추천해주셨어요.”
리아련씨의 연구생 졸업작품을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 “나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게 천직”
USC영화예술대학교에서 영화및텔레비죤제작을 전공하면서 리아련씨는 이때 우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또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고 털어놓았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앞으로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본인은 어떤 데 자질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시점이기도 했단다.
“돌이켜보면 대학 3년이 무진장 힘들었지만 저를 많이 성장시켜줬어요. 제가 성장한 만큼 시야가 넓어졌고 덕분에 연구생 시절에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요.”
영화와 관련해서 리아련씨는 어렸을 적부터 영재 소리를 많이 들었다. 영화및디지털미디어 학사, 영화및텔레비죤제작 석사 단계를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감독으로 활동중인 리아련씨는 업계 전문가들로부터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장일백 감독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전격 발탁된 리아련씨.
하여 협회 행사차 미국을 찾았던 장일백 감독의 동시통역을 나섰다가 두시간여 교류 끝에 장감독은 리아련씨의 독특한 시각과 견해를 높이 사 2021년 7월에 개봉하여 1억 5,000만원 흥행수입을 올린 영화 《하늘을 밝히다》(燃野少年的天空)의 조감독으로 전격 발탁하기도 했다.
뿐더러 고중 때부터 미니영화를 찍기 시작했던 그는 꿈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경험치를 바탕으로 이처럼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건 물론, 산타페 국제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서도 제의를 받아 영화제 기획인으로 참여중이라고 덧붙였다.
“고중 때 찍어뒀던 걸 지금 보면 눈뜨고 볼 수 없는 흑력사”라고 본인은 말했지만 그때의 도전이 있었기에 리아련씨는 지금 2개의 미니영화를 발행하여 플래트홈에서 정기적인 수익을 내고 있단다.
# 독특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스토리텔러
“제가 찍은 영상물을 보면 문화에 관련된 작품들이 많아요.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평을 듣는 데엔 어찌보면 제가 여러 문화를 접촉해봤고 많은 경험을 해서이지 않을가 생각해요.”
리아련씨가 보여준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큐멘터리나 관찰자의 립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상물이 주를 이룬다. 독특한 시각으로 여운이 남는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리아련씨의 작품들은 보는 사람들에게 상상하고 사색할 공간을 남겨준다.
중앙텔레비죤방송 국제‘화인지광' (央视国际 ‘华人之光' )프로의 제의를 받아 감독을 맡은 영상도 중국의 문화를 알리는 다큐멘터리이다. 독특한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영화감독에겐 큰 자산이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제‘화인지광' 3월 프로의 감독도 리아련씨가 맡게 된다고 한다.
어떤 성공을 바라느냐 물으니 그는 나지막이 답했다. “많은 다양한 성공이 존재하겠지만 저는 열정 넘치는 프로젝트들을 발굴해 즐겁게 만들어가는 것도 일종의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영화인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트로피를 거머쥐는 성공도 좋지만, 리아련씨는 각본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90분짜리 첫 개인 장편 영화를 준비중인 요즘이 그래서 그 어느때보다 설레인다고 덧붙였다. 이미 각본을 마쳤고 아직 준비단계라 전부 밝힐 수는 없지만 거물급 회사가 접촉해왔다는 희소식도 곁들여 전했다.
‘리아련’이란 이름 석자가 ‘브랜드’가 되여 빛나는 순간도 머지 않았다는 좋은 예감이 든다.
/길림신문 김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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