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해림시 신안진 영락촌은 해림시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상거해 있고 신안진에서 남쪽으로 3.5킬로미터 상거해 있는 해란하 북쪽대안의 조선족 마을이다. 영락촌은 영락촌, 화평촌 신안촌(한족마을) 이렇게 세마을이 련결되고 혼합되여 큰 동네를 이루었다.
이 마을 리휘 서기에 따르면 영락촌은 현재 호적상 인구가 737명(그중 조선족이 646명, 한족이 91명), 가구는 190호(조선족 가구 104호, 한족 가구 26호) 그중 외지로무에 나간 430명 중 국외로무자가 300명 된다. 경작지면적은 330헥타르로 그중 수전면적이 330헥타르, 한전이 30헥타르 된다. 현재 촌에서 전부 경작지를 위탁받아 임대해 주고 관리해주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몇해전부터 유기농 쌀기지를 선정해 유기농법의 일종인 오리농법으로 오다농사를 짓고 있으며 신신영락량식합작사를 설립해 상해 등지로 중고가로 판매하고 있다.
이 마을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영락촌은 일제시기에 제1대이주호들이 연변에서 이주해 왔으며 그때부터 수전을 개간하고 조선족마을을 일떠세웠다고 한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에는 마을 주변이 모두 잡초로 우거졌고 사처에 물웅덩이가 널려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곳은 풀밭이 무성한 만큼 승냥이와 같은 야수들이 득실거리였고 물웅덩이에는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헤엄쳐다녔다고 한다.
가까이에 물이 있고 땅이 비옥하기에 전답을 풀기 좋은 우세가 있었고 그렇게 수전농사를 하는 조선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조선족 마을이 형성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반이라는 어구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데 여러 마을들에서 지금도 습관적으로 자기 마을을 몇 번 몇 반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이라는 명칭은 당시 일제가 조선인 마을과 항일련군의 상호 련락을 두절하려고 조선인들을 반 안에 가두어넣고 강제적으로 집단부락을 설치한 순서에 따라 정한 번호이다.
얼핏 보면은 일제의 강압적인 집단부락 조치로 마을사람들과 항일련군과의 련계가 단절된 듯 싶었지만은 이 마을에는 여전히 항일련군들의 발자취가 어려있었다.
단적인 례로 이 마을에서 제일 처음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일제시기에 반일 의지가 강한 사람들과 항일련군가족에서 모금하여 세운 것이다.
당시 조선족중심소학교는 영락촌에 위치해 있었고 조선족중학교는 영락촌과 련결되여 있는 화평촌에 위치해 있었다. 이 학교가 끈끈이 맥을 이어 해방 후에는 더욱 규모가 큰 학교로 발전이 되었고 1960년 이후에는 고중까지 있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지 얼마 안되여 이 마을은 또 토비들의 성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이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산이 있는데 토비들이 이 곳에 웅거해 있어 쩍하면 토비들이 마을에 뛰어들어 재물과 가축을 략탈해 갔으며 지어는 인명 피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후에 해방군 토비 숙청대가 들어와서 토비들을 깨끗이 숙청해서야 마을사람들은 안온한 생활을 영위해 갈 수가 있었다.
마을이 농사가 잘 되고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 조선족 마을과 연변 등지에서 조선족들이 대량으로 이사와서 마을이 점점 커지였느바 인구가 가장 많을 때는 4000명까지 되였다고 한다. 이 촌은 1950년대에 민주촌으로 불리웠고 1970년대까지 신안진 소재지였으며 목단강지구 조선족 운동회를 영락촌에서 개최할 정도로 마을 규모가 컸다.
그러다가 후에 진 소재지를 영락촌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갔다.
그때는 몇년에 한 번씩 하는 신안진 운동회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해마다 마을운동회를 진행하였다.
운동회는 축구, 배구뿐만 아니라 항목이 다양한 륙상 경기가 있었으며 씨름, 그네, 널뛰기 등 전통적인 조선족체육항목이 빠질 수가 없었다.
경기장에서는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치르는 대결을 펼치였고 경기장 밖에서는 응원팀들이 자기 마을 선수들을 응원하느라고 목청을 돋구었다. 당시 북과 징, 꽹과리도 동원되여 그야말로 마을이 떠나갈듯 하였다.
점심 때가 되면은 각 생산소대마다 집체식당에서 소와 돼지를 잡고 맛깔진 음식을 차려놓고 선수들을 배불리 먹였으며 마을로인들과 아이들까지 풍성한 음식상에 마주 앉아 포식할 수가 있었다.
운동회 못지않게 청장년들은 문예공연도 다채롭게 펼쳤다. 해마다 3.8부녀절이나 5.4청년절 같은 명절에는 노래 춤 등 공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각종의 악기를 갖춘 악대까지 동원되어 도시의 문예공연 못지않은 성황을 이루었다.
그 때는 구락부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오늘날의큰 공연못지 않게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영락촌은 지리적으로 저수지 제일 우쪽에 위치해 있기에 관개수의 오염이 기본상 없고 물부족을 느낄 때가 없으며 다른 마을에 비해 우월한 수원우세와 배수우세가 있고 홍수 피해가 가장 적은 마을이기도 하다.
이런 종합적인 우세에 힘입어 영락촌 경작지 임대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아 그만큼 촌민들의 수입이 높다. 1970년대 영락촌에서는 한 공에 2~3원씩 돌아가다보니 다른 지역보다 수입이 높아 외지 처녀들이 시집도 많이 왔다고 한다.
영락촌에서는 이전에 김령감표 입살 브랜드를 신청하여 단맛을 보았으나 후에는 한동안 방치됐다. 최근년에 촌 지도부에서는 그 경험을 살려 2018년부터 입살 브랜드 신청을 하여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현재 영락촌은 유기농기지 1155무, 홍콩, 마카오 수출벼재배기지 4200.263무 보유하고 있으며 유기농기지는 이미 전천후 실시간추종, 디지털관리 등 최첨단 시스템으로 관리하고 있다. 금년엔 국가항목으로 500만원 투자하여 찰옥수수랭동 공장까지 건설해 가동중이라고 한다. 몇년간 촌에서는 또 촌도로 보수, 경작지 보호, 빈곤호 주택건설, 위생청결, 오수처리장, 실내화장실, 문명촌건설 등 기초시설 건설에 500만원 자금을 투자하여 촌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아울러 마을광장 건설공사, 회의실, 구락부, 로인협회 활동실, 문구장과 촌 도서실도 구전히 갖추어 놓았다고 한다.
리휘 서기에 따르면 영락촌에서는 유기농 입쌀 생산 기초시설 건설 등 사업에서 루적한 경험을 총화하고 마을의 경제총량이 적은 단점을 미봉하기 위하여 촌 집체경제발전에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였는 바 그 구체방안으로 유기농 입쌀생산 규모를 원래의 10여 헥타르에서 90헥타르로 늘리고 유기농 입쌀 판매망을 더 넓은 범위로 넓힐 타산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아름다운 마을 건설로 무릉도원의 구상을 무르익혀가고 있다고 밝혔다.
/김동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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