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아이들이 밝고 건전하게 성장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보람찬 일이다. 더 많은 이곳 아이들이 건전하게 성장하고 훌륭한 인재로 컸으면 좋겠다. "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것은 평생의 리상이고 개산툰진학교를 고집하는 것은 생명으로 이어진 끈끈한 인연 때문이다. 이곳 아이들이 밝고 건전하게 성장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보람찬 일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룡정시 개산툰진학교 우빙 교원.
룡정시 개산툰진학교 우빙 교원은 향촌교육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 원래 2년으로 예정된 향촌교원직이였지만 그녀는 향촌교육 일선에서 32년을 근무했다. 처음에는 꿈을 위해서였고 그 다음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였으며 지금은 떠나기가 아쉬운 것이 리유이다. 32년이라는 그녀의 교육생애에는 감동적이고 력동적이고 진취적인 이야기들이 깃들어있다.
1992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한 20살의 우빙은 룡정시 개산툰진학교의 교원으로 되였다. 교원부족 상황에 대비해 급하게 이곳에 투입되였지만 2년간 근무한 후 도시학교로 전근하기로 약정된 터였다. 줄곧 도시에서만 생활했던 우빙이 어린 나이에 향촌에서 독립생활과 교직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만만찮은 도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훌륭한 인민교원이 되겠다는 초심을 잊지 않고 허심하게 배우고 착실하게 실천하면서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갔다. 2년 후 학교를 대표해 참가한 시급 교수경연에서 우수상을 받고 같은 해에 ‘우수 지도교원’으로도 선정되며 그는 벌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예를 받아안은 기쁨도 잠시, 아름다운 미래를 동경하던 그녀에게 무정하게도 병마가 엄습했다. 겨우 22살 난 그녀가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백혈병에 걸렸다. 골수이식이라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고 많은 수술비용이 필요했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그 시기에 개산툰진 사람들이 발벗고 나섰다. 많은 이들이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어 수술비를 보태주었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희망과 신심을 되찾은 우빙은 완강한 의지로 병마와 맞서 싸웠고 2년 후 건강을 되찾고 일터로 복귀했다.
이런 독특한 경력은 그녀에게 강인하고 끈질기고 용감한 정신승화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로 하여금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생활을 소중히 여기게 했으며 더우기는 사랑으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우빙은 이곳 사람들의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더우기는 이곳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개산툰진에 남기로 했다.
건강상의 리유로 더는 학급담임을 맡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교원의 의무를 충실히 리행하며 계속해 골간교원 역할을 발휘했다. 하나의 자료를 위해 여러 권의 책을 뒤적이며 확인을 거듭했고 한교시의 수업을 위해 밤을 지새우며 고민을 하면서 드높은 열정으로 교수업무에 몰입했다. 2003년, 우빙 교원은 연변주를 대표해 참가한 길림성 사회과목 수업경연에서 1등 상을 수상했고 성급 ‘교육신예’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도 수여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히 골간역할을 발휘하면서 시급, 주급, 성급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냈고 연변주 어문과 교수골간이라는 영예칭호도 획득했다.
2008년, 14년 동안 학급담임을 내려놓고 있었던 우빙 교원이 다시금 담임을 맡게 되였다. 학교에 담임교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몸이 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연히 담임을 맡겠다고 나섰다. 담임으로 있는 동안 그녀는 학생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내주며 그들의 성장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우빙 교원은 병으로 인해 자식과 함께 하는 천륜지락을 경험할 수 없는 대신 가르친 모든 학생을 자식으로 품었다. 당시 출국로무 열풍이 뜨겁게 불어치면서 개산툰진의 많은 사람들도 외국으로 돈 벌러 나갔고 그녀가 맡은 학급에도 절반이상의 학생이 부모와 떨어져 생활했다. 가정수입은 보장되였지만 아이들의 교육이 큰 문제였다. 우빙은 부모와의 장기 리별로 학생들이 대부분 민감하고 걱정거리가 많으며 자신감이 부족하고 학습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 학생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부추김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라 판단했다.
하여 그는 낮에는 학생들의 선생님으로, 밤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의 엄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방과후에는 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와 무료로 보충강의를 해주고 손수 저녁도 지어 먹였으며 더러워진 옷들도 씻어주었다.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들의 생일을 기억했다가 축하해주었고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자비를 털어 옷과 신발을 사주었으며 소풍을 갈 때면 이 아이들의 간식과 도시락을 전부 챙겼다. 그녀의 따뜻한 관심하에 학생들은 점차 마음을 열었고 학습에서도 뚜렷한 진보를 가져와 학교지도자와 학부모들의 인정과 찬사를 받았다.
우빙 교원은 장기간의 치료약 복용으로 신체가 많이 허약하지만 언제 한번 아이들 앞에서 내색한 적이 없다. 아이들에게 그녀는 항상 열정이 넘치는 담임이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이며 앞길을 훤히 비춰주는 밝은 등불이였다.
“교단에 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곳 아이들과 함께 하겠다. 더 많은 이곳 아이들이 건전하게 성장하고 훌륭한 인재로 컸으면 좋겠다.”
우빙 교원의 가장 큰 바람이다.
전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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