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5세 고령인 김영금 선생은 30여년간 《연변일보》,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기자생활을 해온 언론인이다.
훈춘 오도구 태생인 김영금 선생은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훈춘고중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치다가 1964년부터 《연변일보》에서 17년간 기자생활을 하였고 1980년부터 《중국조선족소년보》 기자부 주임, 문예부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1993년 11월에 정년퇴직하였다.
“1980년대는 조선족 소학생 수만 해도 10만명이 넘었고 어느 촌에나 소학교가 있었어요. 당시 《중국조선족소년보》는 ‘미더운 누나의 우편함’이라는 특집을 내오고 학생들의 고민을 접수했는데 전국 각지로부터 매일 수많은 편지가 날아들었어요.” 엄마와의 갈등, 담임교원과의 오해, 학습흥취를 잃은 아이, 가출하고 싶은 아이… 편지마다 외면할 수 없는 사연이 빼곡이 적혀있었고 심지어 여러 지인을 통해 해외에서 날아온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김영금 선생은 당시 받은 편지만 해도 수천통에 달하고 회답한 편지도 수백통에 달할 것이라며 비슷한 문제는 신문에 실어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방법을 강구하면서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한번은 흑룡강성 녕안현 영산소학교에서 한 교원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17년 도형을 받은 한 청년이 감옥에서 쓴 편지를 철자에 맞게 다시 적어 보내온 편지였다. 지금 감형을 받으려고 노력중이지만 편지 쓰기도 힘든 상황에서 사회에 나가서 무얼 할 것인지 고민이라며 소학교 조선어문 교과서와 참고서적을 부탁하는 내용이였다. 그 편지를 받고 편집일군들은 저마다 여러가지 책을 한권, 두권 가져왔는데 어문교과서는 물론 참고서, 소사전, 명인들의 이야기 같은 것도 여러권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청년의 편지를 받은 후 김영금 선생은 불현듯 연길감옥을 취재할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러한 길을 걷게 되였고 감옥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하여 선생은 한달간 휴식일을 리용하여 전문 연길감옥 취재에 나섰다. 당시 감옥장은 여태껏 기자가 죄수들을 찾아 감옥에 취재를 온 적이 없다고 하면서 무슨 요구가 있는가고 물었고 선생은 20세부터 25세 사이 부동한 류형의 죄수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인차 10명의 죄수가 경찰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취재를 하는 동안 밖에 나가 기다려달라고 경찰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기자의 안전을 걱정해 자리를 지키던 경찰은 절대 문제 없을 것이라며 잠시 나가달라고 간청해서야 자리를 피해주었다.
“동무들, 모두 여기에 와 앉으세요. 나는 동무들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느낌이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구속받지 말고 맘속 이야기를 하세요…”
김영금 선생의 말에 죄수들은 감옥에 들어와 처음으로 ‘동무’라는 소리를 듣는다며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속심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은 당시 감옥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감옥의 별>, <리모의 허리병>, <새벽 2시에 감옥문을>, <철창 속의 사람들> 등 글로 써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1986년 연변은 엄청난 홍수피해가 발생했는데 피해지역 학교들에 지원물품을 전해주고 돌아오던 김영금 선생은 급성맹장염에 걸려 급히 병원에 호송되여 수술을 받게 되였다. 하지만 이튿날 톱기사로 실어야 할 기사 때문에 배를 끌어안은 채로 간호사에게서 용지를 빌어 기사를 작성하다 보니 수술시간을 지체하여 의사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1남2녀를 둔 김영금 선생은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으면 취재를 갈 때 어린아이를 업고 다니기도 했는데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 겪었던 곤난과 애로는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신강 취재 길에 사고로 차에서 5~6메터 뿌리워나갔는데 그번 사고로 주수리국에 근무하던 남편은 신강에 달려가 몇달간 안해의 병간호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 일화를 두고 김영금 선생의 말을 빈다면 “그 시절 편집일군들은 하나같이 신문에 매달려있었고 하나같이 아이들에게 미쳐있었다.”는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는 창이 되기를 자처했던 김영금 선생님은 소년보 일군이라면 아동문학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동화집 《새파란 마음》, 《조선족전통미덕이야기 대전서》(근공검학편), 수필집 《푸른 바다 빨간 노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부모》 등 7부의 작품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집을 안고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였다면서 찾아온 학생, 지금까지도 ‘미더운 누나’로 기억하는 60대에 들어선 그 시절 독자들, 출옥한 뒤 결혼도 하게 되였다면서 전화를 걸어온 청년… 퇴직할 때까지 줄곧 아이들과 함께 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필끝에 담아온 김영금 선생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미더운 누나’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한평생 책과 씨름한 인생을 산 사람이고 작가이고 기자이고 ‘미더운 누나’였으니깐 이렇게 사는 것이 나로서는 의의 있고 가치 있고 사는 멋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였다.
재작년 김영금 선생의 작품집 《락엽으로 가는 길》이 출판되였는데 이는 그의 25번째 작품집이였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인 김영금 선생은 그동안 전국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전국조선문도서 1등상, 연변작가협회 설립 50돐 ‘창작공헌상’ 등을 비롯하여 해내외의 상을 20여차 수상하였다.
85세 고령의 김영금 선생, 분투와 노력으로 수놓은 인생을 돌이켜보면 김영금 선생의 만년은 해 저무는 저녁 하늘의 붉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만 하였다.
조소하 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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