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류녀사는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면서 공원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류녀사는 퇴직 후에 이 공원을 자주 찾는데 매일 오전 8시부터 친구들과 함께 태극권으로 아침단련을 한다. 이와 동시에 공원에는 유모차를 밀고 산책을 하는 로인들도 보인다.
1선도시에 거주하는 류녀사는 부동한 생활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손자를 봐주는 것을 거절하고 퇴직 후의 시간을 자신에게 사용하기로 했다. 요즘 갈수록 많은 퇴직 로인들이 류녀사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고 전통 관념과 현대 가치관의 충돌 가운데서 후대들과 육아문제에 대한 균형을 이루려고 한다.
이러한 ‘신로인’의 퇴직생활은 바쁘고 충실하다. 이들은 젊은이들로부터 배우고 디지털시대에 적극 적응한다. 대부분 ‘신로인’들은 자신이 다망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퇴직로인들의 생활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과 다르다. 물론 이들도 “퇴직 후에 자녀를 도와 아이를 봐주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격대 부양은 의무가 아닌 선택
류녀사는 50년대에 태여났고 매달 퇴직금이 1만원을 넘으며 대출도 없기에 생활이 비교적 편하다. 그의 퇴직 후 생활은 여전히 풍부했다. 로인대학에서 무용수업, 서화협회의 전시활동에 참가하고 동창, 옛 동료들과 모임을 조직하며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관광을 다니는 등이다. 퇴직 후의 몇년 사이에 그는 서장, 신강을 다녀왔고 겨울에는 동북에서 스키를 타고 여름에는 피서하러 운남으로 간다.
이와 동시에 류녀사의 외동딸인 리남은 ‘독박육아’의 상황에 처했다. 시댁에서는 “퇴직 후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리유로 도와주는 것을 거절했고 남편은 창업하느라 집을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온다.
리남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고 리녀사도 딸이 아깝지만 거절했다. 류녀사는 “젊어서부터 직업녀성이였고 한평생 식당의 밥을 먹었기에 료리 재주도 없다. 아이를 봐주는 일은 나한테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이를 보는 면에서 전문인사가 나보다 경험이 있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면 내가 일정한 방조를 줄 수 있다. 나는 로인은 응당 능력이 되는 범위에서 자녀에게 도움을 제공해야지 무조건적으로 모든 걸 바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갈수록 많은 로인들이 다양한 퇴직생활을 선택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신체가 건강하고 퇴직금도 있기에 한창 돈과 시간이 모두 충족할 때이고 새로운 기능을 배우고 새로운 활동에 참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류녀사는 “퇴직은 인생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다. 로인들의 자아실현도 가치가 있다. 우리는 자녀의 아이를 봐줄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육아문제의 장벽
‘85후’인 소맥 부부는 상해에서 생활한다. 그들은 1세대 외자식이고 ‘421’가정 구조에서의 중간층이다.
올해 년초 둘째를 낳으면서 부부의 생활을 더욱 바빠졌다. 남편은 매일 아침 8시 전에 첫째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고 가장 빠른 속도로 8시 30분 전에 회사에 도착해야 한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이들은 첫째에게 방과후 돌봄을 신청하지 않았고 소맥이 첫째의 점심, 오후의 마중을 책임지며 이때 그녀는 태여난 지 반년이 되는 둘째를 데리고 다닌다.
만약 보모를 청하면 매달 7000원에서 1만원의 비용이 증가하는데 이는 부부의 능력을 초과했다. 이들은 또 조기교육중심도 찾아봤지만 1년에 10만원에 달하는 비용에 뒤걸음을 쳤다.
곧 출산휴가가 끝나는 소맥은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큰 근심이다. 생육 녀성의 곤경이 반복적으로 연출되면서 소맥은 다음과 같은 사색을 하게 되였다. “생육을 마친 후 녀성이 직장에 돌아갈 수 있는 가정은 어떠한 가정일가? 첫째는 보모를 청할 경제조건이 되는 가정이고 둘째는 아이를 봐주는 로인이 있는 가정이다. 보모를 청할 능력이 없고 로인의 방조도 없다면 맞벌이 가정은 한사람의 직업을 희생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대부분 경우 이 사람은 바로 녀성이다.”
최종 소맥이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소맥의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상해로 왔다. 그의 어머니는 로인들이 아이를 봐주지 않는 원인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이 있다. 그는 “고부갈등이 보편적으로 있다. 격대 교육의 차이와 모순도 피면하기 힘들다. 시댁에서는 고생하고도 좋은 말을 듣지 못하기에 많은 로인들이 아이를 봐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SNS에서도 ‘아이를 봐주는 로인’과 ‘아이를 봐주지 않는 로인’에 관한 토론이 열렬하지만 집집마다 상황이 다르다는 것에 동의한다. 현재의 로인들이 예전의 ‘무한 련대 책임’에서 실제 정황에 결부한 ‘제한적인 방조’로 변화하고 당연한 헌신으로부터 협상 후의 방조로 변화한 것도 일종의 진보이다.
◆젊은 가정의 두번째 ‘안해’?
로인이 육아를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을 근심하는 젊은이들은 ‘로인이 육아를 도와주는 여부’를 생육 결책의 중요한 변수로 생각한다.
한 전문가는 “육아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원인으로 아이를 낳지 않거나 한명의 아이만 낳는 것을 선택한다. 출생률의 빠른 하락에 맞서 응당 로인인구와 녀성인구의 자원을 충분히 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로인’들은 충분히 리용되는 ‘자원’이 되기를 거부하고 행동으로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선택을 한다. 자녀의 어려움을 분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자신의 생활과 공간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복단대학교 교수 심혁비는 《누가 당신의 집에 있는가: 중국 ‘개체 가정’의 선택》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도시의 맞벌이 가정에서 조부모는 거의 모든 가사를 도맡았고 아들, 며느리, 손군의 생활, 사업 배치에 배합하며 자신의 흥취를 감추고 자신의 수요를 억누르며 완벽한 ‘안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심혁비는 당대 녀성이 가정에서 획득하는 권리와 지위는 남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웃세대 로인의 양도에서 오지만 후자의 희생, 곤경은 자주 언급되거나 중시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신로인’들이 아이를 봐주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가 중시를 받는다는 구현이고 사회진보와 개체의 자아실현 수요의 반영이다. 응당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안도 없다. 사회는 응당 더욱 많은 지지를 제공하여 젊은이들의 육아 수요와 바람을 만족시키고 로인이 자아가치를 추구할수 있도록 방조해야 한다.
신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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