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①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며 흐뭇이 즐거운 상태 ② 좋은 일이 많고 복이 많이 차례 져서 부러운 것 없이 즐겁고 만족한 상태”라고 내리고 있지만 세상에서 행복에 대한 정의가 어찌 한두가지 뿐이랴? 행복이란 객관 상에서 정해진 기준도 있겠지만 주로는 인간 개체가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감성에 많은 비중을 두게 되므로 어느 한두가지 정의로 통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C.폴록은 “행복이란 넘치는 것과 부족한 것의 중간쯤에 있는 조그마한 역이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이 작은 역을 못보고 지나간다.”는 명언을 남겼고 스톰 제임슨은 “행복이란 깊이 느낄 줄 알고 단순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삶에 도전할 줄 알며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는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사실 행복이란 일종의 감수이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 나의 한 친구는 퇴직 후에도 그냥 자전거를 타고 질주하거나 높은 산을 톺아오르는 강렬한 운동을 좋아하는데 그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 자전거운동이나 등산운동이 제일 멋진 운동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나의 한 이웃은 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데 구슬땀을 휘뿌리며 일하는 그 모습을 보면 무척 행복스러운 모습이다.
행복 감수에는 부자와 빈자의 구별이 없다. 백만장자와 넝마주이군 가운데서 누가 더 행복하다고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그들의 행복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기에 백만부자는 돈 만원을 앞에 놓고 아무런 행복도 느끼지 못하지만 넝마주이군은 백원을 앞에 놓고도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 큰 숟가락으로 국을 뜨면 언제나 모자라는 느낌이고 작은 숟가락으로 국을 뜨면 언제나 넘쳐 나 보이는 도리와 마찬가지이다. 타이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일본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보다 훨씬 높다.
이미 로년기에 들어선 사람들의 행복 감수 기준은 낮출수록 좋다. 미국의 마크 월리엄이라는 25세의 청년은 암으로 마비가 전신에 퍼져가는 과정에서 “구두끈을 매고 옷 단추를 채우고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신을 신고 해볕이 좋은 마당으로 걸어나가는 등의 가장 간단한 일들, 그것들이 사람 생활의 가장 중요한 행복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행복 감수 기준은 너무도 소박하고 성스럽다. 그의 행복 감수 기준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이 스며 있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든 순간마다에는 수많은 행복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열살전까지 전기가 없는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복은 일종의 감수라고 우에서 밝혔다. 마음이 가장 즐거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럼 우리는 언제 가장 즐거웠는가를 돌이켜보면 된다. 그 다음은 그런 즐거운 일을 찾아 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즐기는 일을 찾아서 즐겁게 해나가면 된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다. 우리 모두 부지런히 행복을 느끼자.
/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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