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염유섭 인턴기자] #1997년 미국, 채 서른도 안 된 중국 출신 유학생 한 명이 글로벌 금융ㆍ경제정보 전문업체인 다우존스의 문을 두드렸다. 이 유학생은 뉴욕 주립대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지난 3년 간 검색엔진 개발에 몰두했다. 성과도 있었다. 웹 관련 기술로 미국 특허도 따 놨다. 그러나, 유학생은 사실상문전박대 당했다. 당시 다우존스 관계자는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야" 라며 입사를 거절했다. 15년이 지난 2012년, 이 유학생은 미국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최고 기업인’ 에 뽑혔다. 바로 리옌훙(李彦宏) 바이두(百度)회장이다. 순 보유자산만 140억 달러에 달하는 리 회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자수성가(自手成家) 기업인’이다.
제2 ㆍ제3의 리옌훙은 중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 세계에 퍼져있다. 세계 200대 빌리어네어 중 134명, 67%가 이른바 자수성가 형 슈퍼리치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으로만 그들을 분류하기엔 왠지 부족하다.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이들의 일(業) 자체다. 단순한 자영업이 아니었다. 우리가 해왔던 것과 다른 분야, 새로운 일을 통해 엄청난 부(富)를 일궜다.
그들은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사업은 어떤 환경에서 커 온 것일까.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리옌훙’들이 대중에게 건네는 조언은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하다.
“부자가 되려면, 옆집도 하는 치킨가게(자영업)는 하지마라”다.
▶그들은 치킨집 사장 아닌 ‘슈퍼기업가’=자본주의 세계에선 리옌훙 같은 이들을 ‘슈퍼기업가(Super Entrepreneur)’라고 정의한다. 바로 창조적 파괴자(creative destroyer)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낡은 것은 깨고 새 것을 만드는 혁신작업”이라고 규정했다. 기존 산업을 사양길로 내몰아 수많은 직업을 없애고, 그 만큼의 새 업종을 ‘창조’한단 의미다.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부는 덤이다. 슈퍼기업가를 ‘자기 힘으로 새 회사를 세운 글로벌 부자’라고 규정하는 이유다.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제니퍼 루빈은 슈퍼기업가의 성격을 끊임없는 모험 속에서 스스로를 감내한 고(故) 스티브 잡스에 빗댔다. 루빈은 “잡스는 지난 20년 간 ‘가장 창조적인 파괴력’ 그 자체였고, 죽은 후에도 산업계 전체를 뒤흔들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슈퍼기업가는 ‘창업가’란 점에선 자영업자와 같을 수 있으나, 근본부터 다른 존재다. 영국의 주요 싱크탱크 ‘정책연구센터’는 세계 슈퍼기업가들을 분석하며 “모험적 기업가는 변화를 일으키는 경제적 기능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자영업자는 법적으로 그저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엔 “택시기사ㆍ건설업자ㆍ배관공ㆍ구멍가게 사장(한국의 경우 ‘치킨집’)ㆍ정원사ㆍ미용사가 포함된다”고 센터는 덧붙였다. 심지어 변호사, 의사, 회계사 같은 화이트칼라 업종도 자영업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슈퍼기업가, 어디에 얼마나 있나=포브스 집계 등에 따르면 1996∼2010년 간 최소 한 번 이상 순 자산 보유액 10억 달러 이상을 찍어 본 빌리어네어는 전 세계 1723명이다. 정책연구센터는 이 중 33개국(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및 대만ㆍ싱가포르ㆍ홍콩 포함) 722명을 슈퍼기업가로 선정했다. 이들은 새 회사를 자기 힘으로 세워 빌리어네어가 됐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글로벌 대기업 절반을 일궈냈다.
이 가운데 미국은 슈퍼기업가 411명을 보유해 세계 자수성가 부호의 절반 이상(56.9%)을 차지했다. 이어 ▷일본 41명(5.7%) ▷영국 32명(4.4%) ▷독일 29명(4%) ▷캐나다 23명(3.2%) ▷홍콩 20명(2.8%) 순이었다. 한국은 6명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자수성가 부호를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곳은 홍콩으로 나타났다. 인구 100만명 당 슈퍼기업가 수가 2.831명으로 가장 많아서다. ▷이스라엘(1.788명) ▷미국 (1.338명) ▷스위스 (1.229명) ▷싱가포르 (1.053명) ▷노르웨이(1.039명) 등이 뒤를 이었다.
슈퍼기업가의 수와 인구 당 분포도 모두 상위 10개국 내에 포함된 곳은 대만ㆍ미국ㆍ이스라엘ㆍ캐나다ㆍ홍콩(이하 가나다 순) 등으로 집계됐다.
뿐만 아니다. 이들 나라는 블룸버그가 집계한 200대 빌리어네어 중 자수성가로 부를 일군 인물을 최소 1명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미국 43명ㆍ홍콩 4명ㆍ대만 2명ㆍ이스라엘, 캐나다가 각 1명씩). 2010년 이후 기준으로 봐도 자수성가한 글로벌 거부가 밀집한 핵심국가들인 셈이다.
아울러 주목할 만한 최근 경향은 브릭스(BRICsㆍ브라질, 러시아, 중국, 인도 등 4대 신흥경제대국)국가 출신 거부(巨富)들의 약진이다.
이 중 러시아는 빌리어네어 상위 200명 중 자수성가한 슈퍼기업가 19명이 분포해 가장 많았다. ▷중국(6명) ▷브라질(4명) ▷인도 (4명) 순이었다.
글로벌 빌리어네어 200명 중 이들을 합친 자수성가 부호는 총 134명, 보유 순자산 총계는 2조3000억 달러다. 이 슈퍼기업가들의 주요업종은 IT, 바이오, 금융, 리테일 등으로 분석됐다.
▶자영업자 많으면 자수성가 부자도 많다? NO=자영업자를 포함한 창업자 비율이 높으면 자수성가 부자도 많을 것으로 인식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무분별한 창업 육성책이 슈퍼기업가를 배출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증거다.
분석결과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나라일 수록 슈퍼기업가는 대체로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OECD 팩트북 등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자영업자 비율이 25.1%로 OECD 평균(15.8%)보다 높은 이탈리아의 자수성가 부호는 14명이었다. 자영업 비중이 33.7%에 달하는 멕시코의 자수성가 부자는 6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취업자 40%에 달하는 자영업자를 거느린 그리스(36.8%)의 자수성가 부호는 3명에 불과했다. 이는 자영업 비율이 낮은 일본(자수성가 부호 41명)ㆍ독일(29명)의 절반을 밑도는 수치다. 홍콩도 자영업자 대비(10%대) 자수성가 부호가 많은 편에 속한다.
브릭스의 대표주자인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 자영업자 비율은 전체 노동인구의 9.2%(2012년 기준)정도다. 반면 200대 빌리어네어 명단엔 자수성가 부호 6명을 올려놨다. 자영업 비율 28.2%로 OECD 평균 갑절에 가까운 한국의 경우 200등에 포함된 자수성가 빌리어네어는 한 명도 없다.
뿐만 아니다. 세율과 규제장벽이 낮은 나라일 수록 자수성가 부호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비용은 기업활동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어서다. 실제 1990년대부터 자수성가 부호들을 꾸준히 거느려왔던 미국ㆍ캐나다 등 5개국의 평균 세율은 16.65%로 나타났다. 반면 슈퍼기업가를 좀처럼 보기 힘든 벨기에는 고용 및 기업활동 전반에 부과되는 평균 세율이 33.35%에 달했다.
정책연구센터는 “슈퍼기업가를 양성하는데 있어 각 나라의 정책결정자들은 ‘혁신에 기반한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자영업자 육성책이 자수성가 부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고 평했다. 이어 “각종 고(高)세율 정책 등도 슈퍼기업가들의 사업 지속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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