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가 남긴 가방 속 서류에 前총리·現대법원장 등 포함
정치권·국민, 대혼돈 속으로
소련의 비밀경찰 KGB가 28년 전 놔두고 간 가방 4개가 동유럽 국가 라트비아를 뒤흔들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했다. 가방 안에 든 'KGB 정보원 명부'가 사회 저명인사들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보원들은 반(反)소련 운동가들의 동향을 KGB에 고발한 것으로 명부에는 나와 있다.
문제의 발단은 1991년 소련 붕괴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련이 붕괴하며 라트비아가 독립을 되찾자 KGB는 러시아로 귀환하면서 2개의 서류 가방과 2개의 포대를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KGB 사무실에 남겨두고 떠났다. 안에는 KGB 정보원들의 실명과 '코드네임', 출생지 등의 정보가 담긴 문서가 들어 있었다. KGB가 냉전 시기 라트비아에서 운용한 2만4000여명의 정보원 중 4141명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다. 이 가방들은 KGB의 별명 '체카(Cheka)'를 따서 '체카 가방(Cheka bag)'이라고 불린다.
라트비아 당국은 일찌감치 이 가방을 확보했으나, 가방 속 리스트의 공개 여부를 두고 지난 28년간 의회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KGB 정보원들의 정체가 알려져야 한다는 주장과 문서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반대 의견이 충돌했다. 결국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정보원 리스트를 공개하는 법안이 찬성 72명, 반대 1명, 기권 1명의 압도적인 비율로 통과됐다. 이에 따라 리스트 내용의 일부가 지난달 21일 인터넷을 통해 1차 공개됐다.
리스트에 등재된 인물의 면면은 충격적이었다. 총리를 2차례 역임한 이바르스 고드마니스를 비롯해 인기 TV 쇼 진행자 외얄스 루베니스, 현직 대법원장 이바르스 비코빅스, 전설적 영화감독 야니스 스트레익 등이 포함됐다. 라트비아는 대혼란에 빠졌다. 국민은 자신의 친지, 은사가 KGB 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큰 충격에 빠졌다.
리스트에 등재된 인물들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루베니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결백하고 더 이상 이 문제로 나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들은 리스트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체카 가방'이 독립 후 라트비아의 결속을 해치기 위해 KGB가 설치한 '덫'일 수 있다는 것이다. 라트비아 대학 교수 롤랜즈 타얄브는 "결코 정보원으로 활동한 적이 없다"며 "KGB가 적지에 정보원들의 실제 정보를 남겨두고 떠났을 리가 없다"고 NYT에 말했다. 리스트의 '봉인' 담당자였던 인덜리스 잘릿은 리스트에 정보원들의 이름만 있을 뿐 자세한 활동 내용은 없는 것에 주목하며 "KGB가 그들의 업무 수행 능력을 과장하려고 거짓되게 작성한 보고서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리스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실제로 정보원이 누구였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모스크바에 보관돼 있는 KGB 관련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 잘릿은 "불행하게도 현재로선 그 기록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라트비아 정부는 법안에 따라 리스트의 나머지 부분도 지속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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