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왕청현 제5중학교)
1969년 출생. 연변대학 정치학부 졸업, 현재 왕청현제5중학교 재직교원 . 연변작가협회 회원,
수상경력 :
2008년 연변일보생활수기 은상,2011년 길림신문교원수기 동상,2012년 연변작가협회 “가야하 인터넷문학상” 수필상,2013년 연변인민방송국생활수기 우수상,2014년 제1회 전국조선족녀성수필공모 격려상
봄 비
교정의 보라빛 라이락이 싱그러운 향기를 물씬 풍기는 지난해 일이다.
꽃나무에 봄비가 촉촉히 젖어드는 어느날, 나한테 청년손님 한명이 불시에 찾아왔다.
“누굴가?”
머리속에 수많은 아름다운 상상을 하며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사뿐 들어섰다.
“선생님, 안녕하세요?나 김성빈입니다.”
훤칠한 키,말쑥한 얼굴, 시원스레 깎는 상고머리 청년이 쏘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보고 깎듯이 인사했다.
“아! 성빈이? 어느새 이렇게 끌끌한 청년으로 컸구나. “
나의 입에서는 어느덧 감탄의 말이 불쑥 나가며 성빈의 따스한 손을 덥썩잡았다.
“고맙다. 잊지않고 이렇게 찾아와서. 그동안 잘 보냈어?”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성빈이를 보노라니 나는 저도모르게10여년전 일들을 머리속에 언뜰언뜰 떠올렸다.
성빈이는 내가 담임사업을 했던 2005년급 학생이다. 소학교에서 갓 올라왔을때 해빛에 그을려 구리빛 얼굴에 왜소한 체구인 귀여운 아이였다.남보다키가 머리하나 작았지만 약싹빠르고 항상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여서 나는 처음부터 성빈이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입학하여 이튿날부터 반급에서는 학교의 통일보조에 맞추어 일주일동안대렬훈련을 진행하였다. 자원적으로 구령을 부를 학생을 뽑으려했는데 주동적으로 손을 든 것은 성빈뿐이였다. 목소리가 챙챙하고 열정으로 차넘치는 성빈이를 믿고 림시 체육위원을 하게 하였다.
대렬시합에서 체육위원이 우렁차게 구령을 부르고 지휘를 잘한 덕분에우리반급이 10개 반급 가운데서 총점 2등을 따내게 되였다. 그날 나는 너무 기뻐서 환성을 질렀다.
“성빈아! 애들아! 정말 잘했어! 고맙다!”
대렬훈련이 끝나고 학생들의 정상적인 초중생활이 시작되였다.이때 담임교원의 주요한 반급관리는 학생들의 학습, 규률, 위생이 주요한 문제이다.
규률, 위생문제는 매일마다 량호한 습관을 키워주어 제 궤도에서 천천히 잘 해결이 되여갔지만 일부 학생들의 학습성적이 부전이여서 제일 골머리를 앓았다.
생각밖에 성빈이는 후진생에 속해있었다. 평소에 성격이 쾌활하고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애였지만 학습기초가 매우 낮았다.노력하면 꼭 성적이제고되리라 생각하면서 늘 찾아서 개별담화와 개별보도를 해주었더니 일정하게 효과도 보았다
2학년에 올라가 개학초기부터 성빈이는 웬지 늘 표정이 울울하고 학습성적은 직선긋듯 내리막질을 하였다. 조용히 교연조에 불러 원인을 물었더니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성빈이의 할머니와 전화통화를 했었다.
“선생님, 우리 손자를 도와주세요. 성빈이는 세살적에 부모가 리혼을 하다보니 엄마사랑이 부족한 애랍니다. 요즈음 성빈아버지 다른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어요. 계모가 싫다고 이 애가 지금 나와 같이 있어요. 돈이 없어서 학비와 책값을 내지 못했다며 학교에 안가겠다고 생떼질을 쓰고 있어요 . 불쌍한 우리 성빈이를 참된 사람으로 꼭 만들어주세요.”
성빈할머니의 애절한 부탁에 나는 이 애를 꼭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반회활동시간에 학생들은 소비돈중에서 일부를, 나도 얼마되지않는 로임에서 돈을 선뜻이 내여 성빈이의 학비와 교과서값을 선대해주었다.
성빈이의 구겨졌던 얼굴에 홍조가 어리였다. 그러나 계모와의 모순이 해결되지않아 할머니집에서 부대끼며 살다보니 학습성적은 별로 제고됨이 알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학습을 잘하는 김혁학생과 짝궁이를 지어주고 소조성원들이 도와주게 했더니 학습성적이 좀씩 올라가고 기분도 많이 좋아져 학습에 노력했다.
비록 3학년에와서 노력을 경주했지만 경쟁자가 많고 점수가 몇점 모자라 결국 성빈이는 고중시험에서 쓰디쓴 미역국을 먹고 말았다.
초중을 졸업하고 성빈이는 사회에 진출하여 별라별 일들을 다 해보았다고한다. 외지에서 음식배달을하고 공장에서 힘들고 어지러운 일들을 했다. 지금은 해변도시 위해에서 한국기업에 취직했는데 공장장으로 있고 결혼하고 딸까지 보았다.
고향을 떠난지 10년만에 돌아와서 담임교원인 나와 함께 점심을 같이 하려고 교연조에 찾아왔던 것이다.
내가 극력 사양을 했지만 성빈학생은 기어이 나를 불고기점에 청했다. 점심을 함께하면서 우리는 잊을수 없는 추억들을 함께 나누었다.
그날 성빈이와 즐거운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나는 학생들에 대한 담임교원의 사업은 단지 3년뿐이아니라 평생교육이라는 것을 . 인성교육이 첫째가는 임무라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
올해 새해의 벽두에 남경에서 보내온 제자의 새해메시지를 보고 또 한번 교육의 의미를 음미해보고 감개무량했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장 순진하고 백지같은 세월에,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을 너무 많이 심어주셨어요.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때 커서 뭐가 될거냐고 물으면 항상 선생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밝은 혜택을 비춰줄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너무도 어렵게 힘들지만 또 보람있는 삶인것 같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
중학생들의 세계관, 가치관 형성에 교원은 마치 봄비와 같은 존재이다. 봄비가 겨우내 말랐던 대지를 포근히 적셔주고 꽃과 나무에 새싹이 움트고 꽃을 피우게 하듯이 교원은 평생도록 원예사의 역활을 하는 것이다.
교원사업을 하는 20여년간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꽃나무에 물을 주고꽃봉우리가 활짝 피우게 했을가? 어떤 학생들에게는 봄비가 아닌 번개나 우뢰와 같은 존재로 보이지 않았을가?
50살 고개에서 자신의 교원생애를 스스로 되돌아보며 반추해보게 된다.
항상 봄비같은 마음을 지니고 농부처럼 부지런하고 봄처럼 꿈을 지니고봄처럼 새롭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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