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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울음소리에 3국이 깨여나는 곶 자리 방천마을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2월6일 23시57분    조회: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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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정유년 닭띠해를 맞으면서 “계명천하” “계명동방”과 같은 닭울음소리에 관한 낱말들이 뜨고있는 가운데 “닭 울음소리에 3국이 깨여난다”는 속설을 갖고있는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이야기들이 새삼스러워진다.

방천은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 최동단에 위치한 "동방의 제1촌"이다.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과 잇닿아있고 장고봉을 사이두고 로씨야와 린접해있으며 두만강이 바다로 나가는 곶자리에 위치해있는 방천마을은 예로부터 중대한 국경사건이 발발한 곳이며 또한 오늘날 우리 나라 “1벨트 1로드” 세계화전략의 중요한 문호의 하나로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있다.

바로 이 마을이 우리 조선족들이 손수 개척하고 지켜온 삶의 보금자리인것이다.

“토자비”에 출해권을 묻다

19세기 50년대로부터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조상들은 버들이 빼곡이 들어선 이곳에 조심스레 괴나리 보짐을 풀고 화전밭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하싼호일때에 살던 박리근(朴利根)로인의 조부가 1860년에 방천에 왔을 때 방천에는 이미 10여세대 조선인 간민들이 살고있었다고 했다.

일밭에서 돌아온 김만혁서기 방천촌의 력사를 들려준다

버드나무가 많아 방축을 이루고있는 이고장을 사람들은 우리말 그대로 《버들방천》이라고 불렀다. 후날 지명을 올리면서 《방천》이라고 하였고 또 조선과 로씨야사이에 끼여있는 좁은 《목》이라는 뜻으로 항(项)자를 붙혀 《방천항》(防川项)이라고도 불렀다. 하여 《동삼성정략》에는 《방천항》으로 등록되여있다.

력사적기재에 의하면 방천은 워낙 수당시기 “일본도 해상비단의 길”로 소문높은 고장이였다. 당나라 시기 경제문화, 민속종교는 이곳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고 중일 두나라간의 경제문화교류와 인민들간의 우의가 이 통로를 통해 촉진되였다.

16세기후로부터 짜리로씨야가 흑룡강지역까지 침입해 들어왔고 1860년 제2차아편전쟁시기에는 또 청정부를 강박하여 불평등 “중로애훈조약” 과 “중로북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쑤리강동쪽 광범한 지역을 훈춘관할구에서 떼여갔다. 이리하여 중국은 연해지역을 잃게 됨과 동시에 출해구(出海口)를 잃었으며 다만 바다를 바라보는 “망해구”(望海区)로 되고말았다.

1861년 청정부는 흠차대신을 보내여 짜리로씨야와 국경담판을 하고 두만강어구에서 20화리(华里, 1화리 500메터) 되는 곳에 중-로국경 “토자비”(土字牌)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짜리로씨야의 끝없는 탐욕으로 토자비는 암암리에 두만강어구에서 46화리 되는 사초봉지대로 옮겨지게 된다.

조국의 령토를 되찾고 주권을 지켜낸 오대징장군조각상

1885년 조정에서는 또 흠차대신 오대징을 파견하여 짜리로씨야와 다시 국경을 담판하게 된다. 1886년 7월 오대징은 유력한 근거로 “토자비”를 다시 원자리에 옮기게 하였으며 너비 600메터, 총면적 10평방키로메터에 달하는 령토를 다시 찾아냄으로써 일본해와 15키로메터 거리를 확보하고 동시에 두만강출해권을 쟁취하였던것이다.

20세기초에 이르러 또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반도를 강점한후 중국에 대한 마수를 뻗치면서 악명높은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훈춘일대를 비롯한 간도지역에 대한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20년 이른바 “경신년대토벌”로 하여 3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무참히 학살되였고 훈춘, 경신, 방천 등지는 페허나 다름없게 되였다. 거주민들은 로씨야 연해주거나 중국 내지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뒤 10년도 넘은 세월속에 마을 사람들은 다시 정든 고장으로 돌아와 사초봉늪가며 골짜기에 66세대가 자리잡게 되였을 무렵, 1938년 7월말, 일본침략자들은 쏘련을 공략하고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심으로 장고봉(张鼓峰) 사건을 일으켰다. 중국땅에서 쏘련군과 일본침략군과의 격전이 벌어지면서 방천마을은 또 쑥대밭으로 변해버렸다.

장고봉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이 지역을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냈으며 두만강하구에 수뢰를 묻어놓고 훈춘에서 바다로 나드는 배길을 끊어버렸다. 근 한세기를 두고 방천사람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방천땅은 또 하루 아침에 일본군 《군영》으로 되고 말았으며 이때로부터 중국은 출해권을 완전히 잃게 되였다.

세계명가 “카츄샤”의 탄생지

방천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고장이다. 해마다 4, 5월이 되면 이 고장의 산기슭에는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여나고 동해로 흘러드는 두만강하류에는 바다로부터 안개가 자오록이 몰려오며 이색적인 풍경을 이룬다.

《장고봉사건》이 일어나기 4개월전 구쏘련의 저명한 시인 이사꼽쓰끼는 방천일대를 돌아보며 아름다운 풍경에 매혹되여 《흰배꽃이 산기슭에 피여날 때, 강우엔 몽롱한 안개 서리네》라고 하며 《까츄샤》가사를 지어냈다. 구쏘련의 작곡가 브란체르(勃兰切尔)가 이 가사에 곡을 달고 민요 녀가수 리쟈•루스란노바(丽基雅•鲁斯兰诺娃)가 노래를 불렀다.

초기엔 별로 인기를 몰랐던 이 노래는 몇년 뒤 쏘독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속하게 인기를 누리게 되였고 단연 세계명곡으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구쏘련의 신형무기로 위력을 과시했던 로케트속사포도 이 노래의 류행에 힘입어 《까츄샤》로 명명될 정도였으니 “카츄샤”노래의 인기도를 가늠할수 있는것이다.

연변 방천일대에서 지어진 《까츄샤》노래는 지금도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부르는 외국가요의 하나로 되여있다. 전세계반파쑈전쟁 승리 70돐을 맞는 나날 로씨야인들이 열창하고있는 “카츄샤”노래는 중국인들 마음속에 크나큰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이 노래는 방천과 관련된 하나의 자랑으로 영원히 방천력사의 한페지를 기록하고있다.

국경의 “산 토자비”

《8.15》광복을 맞은 방천사람들은 1947년 봄, 전쟁으로 파괴되였던 마을을 다시 수건하고 드디여 방천땅에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러나 1950년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쏘련, 조선간의 철도운수선이 지척에 있는 관계로 방천마을은 또 위험구간으로 지목되였다. 정부에서는 방천마을사람들의 인신안전을 위해 내지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마을이 비게 되면서 방천지역은 또 쏘련변방군의 말훈련장으로 되였다. 방천은 우리 나라 령토였지만 쏘련군의 삼엄한 통제로 마음대로 나들수조차 없었다. 당시 중국과 쏘련간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교섭이 매우 어려웠던것이다.

방천으로 들어가는 좁다란 길마저 홍수에 밀려 없어졌으며 방천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수로를 통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결국 방천땅은 쏘련국경안에 있는 중국의 령토로 됨 셈이였다.

1963년경 상급 해당 부문에서는 연변군분구에 소속된 변방퇀에 한개 패를 파견하여 방천에 주둔시킬것을 령하였다. 따라서 방천에 거주할 이민조직사업을 가동하였다. 하지만 방천은 륙상교통이 두절되여있어 생활보장이 없고 자녀교육이 또 큰 문제로 되였으므로 그 누구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1965년 7월 경신공사 금당대대 당지부 부서기 강태원이 변방부대 관병들과 함께 고향땅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선줄을 끌었다. 공산당원 강태원이 인솔한 열여섯세대가 쪽배를 타고 물길을 헤가르며 방천으로 돌아왔다. 그속에는 방천의 개척자이며 토배기인 박리근로인도 들어있었다.

그 이듬해 방천에는 28세대가 모여 오붓한 동네를 이루었으며 16헥타르의 논을 풀고 65헥타르 되는 한전밭을 일구었다. 그때 방천농민들의 일체 생활물자는 부대의 순라정으로 운송해왔고 문화수준이 높은 2명전사가 주둔부대에 파견되여와 문화생활을 이끌어주었다. 방천농민들의 집은 몽땅 나라에서 무상으로 져주었고 공구량도 모두 면제해주었다.

방천마을사람들은 각급 해당 부문과의 협동으로 두만강기슭에 제방뚝을 수축하고 방천과 경신사이의 도로를 수건하여 방천으로부터 내지로 통하는 륙상교통을 열어갔다.

로씨야 땅이 될 번했던 방천땅을 도로 찾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건설해낸 방천사람들이야 말로 조국의 신성한 령토를 지켜낸 “산 토자비”가 아닐수 없으며 중화국경력사에 귀중한 한페지를 기록한 “장군”들인것이다.

오성붉은기를 휘날리며 조국의 동단을 지키고있는 방천마을

“동방의 제1촌”으로

장고봉을 병풍삼아 오붓하게 줄어지어 들어앉은 방천촌 50여세대의 조선족농가들은 멀리에서도 그 정갈함이 안겨오고 방천촌사무실상공에 휘날리는 오성붉은기는 저으기 인심을 격동시키고있다.

1991년 1월, 전임 중공중앙 총서기 강택민동지께서 방천을 시찰하며 “바다로 나가자”(出海)는 제자를 쓰는 장면의 사진이 방천촌사무실벽에 정히 걸려있다. 방천마을 사람들은 나라의 문호를 굳건히 지키고 잘 건설할 사명을 짊어지고있었던것이다.

지금쯤《방천풍경구》는 연변의 제1관광명소로, 국가급 4A풍경구로 되였고 방천촌은 2016년 “중국의 아름다운 레저향촌”으로 선정되였다.

《방천풍경구》에는 조국의 령토를 되찾고 주권을 바로세운 오대징장군 조각상이며 《토자비》, 장고봉전투유적지기념관 및 두만강출해를 상징하는 두만강나루터, 내지에서는 보기 드문 금사막 공원, 1억 3천 500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두만강련꽃기지,조선족민속촌 및 새로 건설한 룡호각 등으로 경관대를 이루고있다.

해마다 새해를 맞는 이맘 때면 전국 각지의 관광객들이 여기 룡호각 전망대에 올라 중국, 조선, 로씨야 3국이 함께 펼치는 불꽃놀이를 한눈에 흔상하며 희망찬 새해의 첫 해돋이를 맞고있다. 전국 여러 민족은 물론 말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지구촌 여러 나라 관광객들도 이곳 “동방의 제1촌”에 모여들고있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훈춘으로 개통되면서 한해에 20여만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방천을 찾는다. 방천촌에서는 그들을 맞이하여 조선족특색을 갖춘 민박집만 해도 17채나 건설하였다. 또한 상급으로부터 1000만원 정책보조금을 유치하여 방천조선민속레저오락장과 투우경기장, 그네, 씨름경기장, 널뛰기 등 각종 민속행사시설도 마련하였다. 방천마을의 관광수입만해도 인구당 5000여원, 사초봉늪과 두만강에서 잡아내는 물고기수입만해도 한해에 인구당 1만5000원을 웃돌고있다.

방천촌의 《코기러기》 김만혁서기는 력래로 갖은 시련을 이겨낸 방천은 오늘날 “바다로”, 세계로 나아가는 “1벨트 1로드”전략의 전초에서 명실상부한 “동방의 제1촌”으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힘차게 노를 저어갈것이라 의지를 밝혔다.

/ 김원범 김청수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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