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춘녀: 위챗상거래로 고향의 특산물 류통업체 만들겠다
이른새벽 수상시장에서 영양오이와 토종고추, 마늘을 구입하고 있는 방춘녀씨
여기 당차고 야무지고 깐깐한 녀성 한 분이 있다. 바로 37살 젊은 나이에 홀로 아이를 키우고 어머니까지 모시면서 자기 두손으로 벌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타고난 장사군이 아니고 고객의 수요를 최대한 첫자리에 놓고 일하다 보니 이렇게 규모가 커지더라구요.” 그녀에게 장사복이 따라다니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말이다.
매일 이른새벽 아침시장이라 불리는 연변동방수상시장에 가면 영양오이, 지방도마도, 목이, 산나물 등 지방 특산물을 한보따리씩 사서 들고 끌고 택시에 실어서는 총총히 사라지는 삼심대 중반의 녀성을 볼 수 있다. 되거리장사를 하는 사람 정도로 오해할 수 있으나 기실 그는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살면서 고향 음식이 그리운 사람들이 요구하는 물건을 구입하여 보내주는 위챗상거래자인 방춘녀녀성이다.
1. 토닭알 흥정 2. 구입한 물건을 끌고 들고 3. 택시에 싣다 4. 포장
언제부터 위챗상거래를 시작하였는가 하는 물음에 방춘녀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위챗상거래는 2년반이 넘었고 본격적인 연변농산품 위챗장사는 올해 3월 초였을 거라고 대답한다. “철남시장에 봄달래가 나왔댔어요. 내가 먹기에도 맛갈스러웠고 그래서 사진을 찍어 모멘트에 올렸더니 숱한 댓글이 달렸어요. ‘한근에 얼마냐?’ ‘어디서 샀냐?’ ‘보내줄 수 있냐?’와 같은 내용이였지요.”
위챗장사는 이렇게 친구들이 요구하는 물건을 보내주면서 저도 모르게 시작되였다. 원래 농촌에 살면서 마음씨가 착했던 방춘녀는 시장에서 살 때 최저한 가격을 깎아서 친구들한테 저렴한 가격으로 보내주군 하였다.
눅은 가격으로 멀리서도 고향의 특산품을 먹을 수 있게 된 친구가 자기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그 친구들이 또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하면서 특산품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방춘녀는 갑자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물량이 많아지니까 가격 협상도 쉬워지고 저의 집까지 직접 배달해주는 사람들도 생겼어요.”
북경, 상해, 청도, 광주, 절강 등지의 10여개 음식점들도 그녀에게 명태, 해삼, 토간장, 유기농 입쌀, 영양오이, 가지, 배추, 상추, 토닭알 등 연변에서만 살 수 있는 특산물 공급을 맡겼다.
한근에 얼마씩 떨어지는가고 물었더니 물건마다 다르다고 한다. 토닭알 같은 경우는 연길 현지에서 한알에 1.50원인데 광주에 도착하여도 1.50원이니 밑지는 장사가 아닌가고 물었더니 “돈을 남기는 장사가 아닌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거든요. 그 분들이 저를 찾아 부탁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하면서 닭알장사와 흥정하여 한알에 1.30원씩 사며 물건을 받는 쪽에서 운송 비용을 무는 외 수고비까지 얹어주니 백알에 30원 정도 번다고 구체적인 금액까지 알려준다.
토닭알을 포장하는 방춘녀씨
화룡시 동성진 흥성촌의 농민가정에서 이남매 중 맏이로 태여난 방춘녀는 경찰학교에 가는 것이 꿈이였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중까지 다니고 학업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학교를 그만 둔 그녀는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해야 했는데 어린 나이에 힘든 농사일은 그렇게도 싫더란다. 18살 어린 나이에 얼굴을 가맣게 태우며 농사일을 하는 그녀를 보다 못해 훈춘에 있는 사촌언니가 일자리를 소개해준다고 련락이 왔다.
“단돈 50원을 들고 무작정 훈춘에 갔어요. 언니가 소개한 일자리는 친구가 경영하는 양고기뀀점에서 심부름 하는 복무원이였죠.” 부끄러운 이야기라며 허두를 뗀 방춘녀는 도시에서 처음 배우며 하는 일이였지만 열심히 하면서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맛있게 먹고 다시 찾아오게 할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때부터 장사를 배운 게 아닐가 생각해요.” 그후 3년 간 훈춘, 연길, 룡정 등지에서 음식점과 판매업을 전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때 배워둔 장사비결이 바로 ‘사람 남기는 장사’였다고 한다.
21살 때 싸이판에 갔다가 23살 때 남편을 만나 2003년 12월에 귀국하여 이듬해에 결혼을 한 춘녀는 남편과 함께 한국에 가서 돈을 벌기로 하고 한국에 갔으나 남편이 몸이 불편하여 직업을 찾기가 힘들었다. 당시 드살이 센 춘녀가 이악스레 일하고 시어머니가 옆에서 도와주면서 어려움을 극복하였지만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마냥 행복하기만 하였다.
남편의 건강과 힘든 일 때문에 그들 부부는 결혼한 지 만 7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임신을 하게 되였다. 그녀는 어머니로 된다는 부푼 마음으로 몸관리를 잘하였고 남들이 다 한다는 태아교육을 배워가면서 열성을 부렸다. 임신 7달부터 딸이 입을 옷을 사들이기도 하였지만 시어머니는 썩 기뻐하지 않는 눈치였다. 부부가 맞벌어서 생활이 펴일가 하니 임신하여 일할 수 없게 된 며느리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딸은 무사히 태여났고 춘녀는 연길에서 아이를 돌보고 남편은 한국에서 일하는 ‘비둘기부부’가 또 하나 생겼다. 남편한테서 생활비를 받아 쓰면서 홀로 아이를 키우기가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춘녀는 그 시절을 돌이켜보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 우울증이 오기 직전이여서 활발하던 성격이였지만 쩍하면 아이와 짜증도 냈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가서 심리자문도 받아보았다. 그것이 아이가 두살 되던 무렵이였다.
마침 그해 친정집의 농사가 잘되였는데 쌀 처리하기가 힘들었다. 년로한 부모님들이 쌀을 팔러 다니기도 힘들었고 집에 보관하기도 쉽지 않았다. “흥성의 입쌀은 평강벌에서도 유명한 입쌀이지요.” 부모를 도와 쌀을 팔아주기로 하고 정신을 차린 춘녀에게서 우울증 증상은 간데온데 없이 사라졌다. 아이를 안고 사회구역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시내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문받고 집까지 배달해주었는데 쌀이 좋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열흘 만에 만근을 팔았다. “그땐 왜 다른 농가의 쌀을 팔아줄 궁리를 못했을가요? 그랬다면 지금쯤 아마 어마어마한 쌀장사가 되였겠는데…호호호…”
그런데 일이 생겼다. 쌀을 판 돈으로 위챗상거래를 한다면서 동생이 신발장사에 뛰여든 것이다. 토보에서 보기도 좋고 가격도 맞춤한 신발을 주문하여 주변의 지인들에게 파는 사업이였다. 두컬레가 불이 펄 나게 팔리니 잘 팔릴 것 같아서 50컬레를 주문했는데 그것이 창고에 쌓이게 된 것이다. 안되겠다 싶어 춘녀가 또 나섰다. 아이를 업고 신박스를 들고 면목 아는 사람들부터 찾아 나섰다. 일주일 만에 쌀 판 돈을 찾아왔다.
그 후 춘녀는 아이를 키우면서 녀자속벌장사도 해본다. 토보에서 질이 좋고 가격이 합당한 속벌을 골라서 주변사람들에게 파는 부업이였다. 천원어치 구입하여 팔면 백원이 떨어지는 사업이라 생활비도 벌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도 친할 수 있는 소일거리 쯤으로 생각하고 시작하였는데 나중엔 일자리도 생기고 규모도 커져서 내몽골에까지 물건을 보낼 정도로 되였다.
건강엑기스라는 회사에 속벌 팔러 갔다가 그 회사 사장이 그의 열정과 판매 기교가 마음에 든다면서 사무실에 출근하라고 권한 것이다. 취직이 어려운 세월에 그는 이렇게 쉽게 취직하였고 그 회사에서 2년 간 근무하다가 자기 특성에 더 알맞는 특산물무역회사에 자리를 옮겼다. 연변의 목이버섯을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자기의 장끼를 마음껏 발휘하여 회사 책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사람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업여시간을 리용하여도 한달에 만원씩은 쉽게 벌어요.” 그녀는 아침 4시에 일어나 연변동방수상시장에 가서 외지에 보낼 물건을 구입하고 집에 돌아와 포장하는데 약 3시간이 걸린다고 하면서 물량이 많을 때에는 오전 9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며 그럴 때에는 아침을 굶고 출근한다고 말한다.
7살 나는 딸과 함께 훈춘시 맹령촌 유기농 사과기지에서(셀카)
“비싼 유기농 입쌀이나 영양오이 같은 것은 직접 밭머리까지 가서 확인하고 고객들에게 전해줍니다. 제가 마음 드는 물건을 그 분들한테 소개하고 그 분들이 직접 보고 마음에 들어야 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가격은 착하게 물건은 최고로’라는 말을 항상 명기하고 있습니다. 멀리 타향에 가 있지만 이 곳의 가격은 수시로 알수 있는 분들이 아닙니까? 똑 먹어보면 인차 진짜인지 가짜인지 다 아는 그 분들한테 값을 올려 붙이면 다시 저를 찾겠습니까?” 위챗을 들여다보면서 물건의 수량을 확인하고 저울에 달아본 후 물건이 망가지지 않게 종이박스에 잘 포장하고 다시 겉에 비닐템프로 꽁꽁 묶어준다. 그 우에 주소와 련계전화를 적은 운송단을 붙이면 끝이다.
아침상을 차려놓은 어머니도 일손을 도와 나섰다.
그런데 솜씨가 례사롭지 않다. 30근 되는 큰 포장박스도 이리저리 잽싸게 돌리고 돌리면서 가볍게 일하는 모습은 하루이틀의 실력이 아니다. “물량이 많을 때는 이런 박스가 열개도 넘어 나갑니다.”
현재 200여명의 고객을 확보한 방춘녀씨에게 앞으로의 꿈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시골에 돌아가렵니다. 전국 각지에 사는 조선족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류통업체를 만들고 싶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키운 닭이 낳은 닭알과 야산에서 뜯은 산나물, 앞마당에 심은 신선한 남새와 입쌀까지 농가의 건강한 식품들을 합당한 가격에 구매한 후 바로 고객들에게 보내주는 그런 업체지요. 농민들이 고향에서 열심히 유기농법으로 땅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면서 한국에 가지 않고도 잘살수 있는 날이 꼭 올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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