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후엽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떠나온 조선인들은 광활한 동북대지에 수전농사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학술론문에 따르면 연변지역에는 1868년부터 첫 수전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며 길림성 통화현 하전자에서는 1870년에 첫 수전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흑룡강성에서는 1895년 오상시 사하자향에서 첫 수전농사를 시작했다고 하며 료녕성에는 1905년 안동(단동)지역에서 첫 수전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학자들에 따라 수전농사의 원조가 엇갈리고 있지만 동북지역의 수전농사를 개척한 것이 조선인이라는 사실만은 모두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학술론문에 따르면 1930년 동북지역의 수전면적이 900만무에 달하고 총수확량이 1300만섬에 달해 동북지역 식량총수의 13%를 차지했으며 이중 91%는 조선인농민들이 기여한 것이라고 한다.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을 지냈던 고 리정문선생의 말을 빈다면 일제와 착취계급의 수탈속에 비탄과 눈물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조선인농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삶의 길을 찾게 되였고 투쟁의 방향을 찾게 되여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시기 든든한 후원자가 되였다.
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조선족농민들은 중국의 첫번째 집단농장을 설립해 수전면적을 늘이고 수확고를 높였으며 조선족육종가들이 속출하여 현지의 토양과 기후에 맞는 대량의 벼종자를 개발해냈으며 타민족에게 수전농사를 보급하고 조선족마을이나 조선족향진은 현지의 수매량임무를 늘 초과완수함으로써 중국‘밥그릇’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51년 2월, 김백산이 주석을 맡고 리재근이 부주석 겸 당지부서기를 맡은 중국의 첫번째 집단농장인 화천현 성화집단농장이 고고성을 올렸다. 농장은 설립하자부터 부단히 확대되였는데 주변농민들은 물론 외지와 타성의 조선족농민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초창기 36가구, 1426무로 부터 1957년 209가구, 7920무로 확대되였다. 김백산은 전국로력모범으로 되였으며 제2기, 3기 전국인대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화천현과 흑룡강성은 물론 ‘인민일보’에도 그들의 사적이 실려 전국의 전형으로 되였다.
새중국의 첫 집단농장인 성화집단농장은 오늘날 화천현 성화조선족향으로 발전했다. 삼강평원의 복지에 자리잡은 이곳은 어미지향으로 원근에 이름났으며 다양한 민속행사가 펼쳐지고있다. /자료사진
한랭지역인 제3적온대의 ‘벼품종의 왕’으로 불리는 ‘합강’계렬 벼품종을 배육해낸 강석일, ‘동농’계렬 벼품종을 연구해낸 동북농업대학 최성환교수, 도화향계렬의 벼품종을 배육해내 ‘오상입쌀의 대부’로 불리는 전영태, 주은래총리로부터 ‘남방에는 벼재배전문가 진영강이 있고 북방에는 벼재배전문가 최죽송이 있다’는 평가를 받은 전국로력모범인 연변의 최죽송은 ‘새발모농법’을 개발하고 연변의 기후에 적합한 20여가지 벼품종을 개발해냈다.
연변의 첫 호조조, 첫 농민대학을 설립해 전국에 이름을 떨친 전국로력모범 김시룡 그리고 박삼덕, 윤종룡, 권태관, 차성철, 홍상표, 리수길 등 우리 주변에 현지의 기후에 맞는 벼품종을 개발하고 이를 보급시킨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할빈시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을 지냈던 고 서명훈선생은 건국초기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동북지역 수전농사의 70%는 조선족들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흑룡강신문/특별취재팀 진종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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