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에서도 나타나는바 고대 사람들은 풍수지리를 중요시 여겼다. 그 부분이 룡두산고분군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산세, 지세, 수세 등을 판단하여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죽은 사람을 묻거나 집을 짓는데 적합한 장소를 구하느라 고민했을 모습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였다. 룡두산고분군은 룡두산 동쪽언덕에 자리하고 있는데 남으로 멀리 산을 마주하고 앞이 훤하게 트였고 그 한가운데로 고동하가 흐른다. 그리고 고분군의 위치가 해빛이 막힘없이 오롯이 비추는 양지바른 언덕이고 바람도 한점 거침이 없었다.
한 고분 건축물에 들어서자 고분들이 하나 둘 눈앞에 보였다. 그들을 마주하니 역사를 거슬러 그 때 그 시절 1200여년전으로 돌아가 발해인들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 부러움없이 살았을 발해의 정효공주와 귀족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들 또한 무덤은 거창하게 썼으나 결국 한줌의 흙이 되어버렸다. 나오면서 본 그들을 지켜주는 듯 했던 큰 나무와 이따금 날아가던 꿩들이 그 오랜 세속들을 말해주는 상 싶었다. 그 곳 가이드에 의하면 룡두산고분군의 무덤들이 송나라 때에 많이 도굴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 두 무덤은 운이 좋게도 도굴군들의 눈에 피해 도굴되지 않았고 역사학자와 연구일군들이 파헤치자 매장시의 원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한다.
특히 중요시 된 것은 이 곳의 벽화와 묘비라 할 수 있다. 널길의 동, 서벽과 널방의 동, 서벽 그리고 북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도는 처음으로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사, 시위, 내시, 악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평소에 공주를 시중들던 사람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공주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묘지에 따르면 정효공주는 용모가 빼어나고 여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시서에 능하였을 뿐만아니라 총명하고 품성이 우아하였다고 한다. 훌륭한 배필을 만나 혼인하였으나 남편과 어린 딸이 일찍 죽는 바람에 삼종지도를 지키며 수절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죽은 인물이다. 이어 가이드는 이 묘지명과 그때 사람들의 생활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벽화는 생생한 자료로써 문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도 연구의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고 하였다.
대조영의 증손녀이자 발해의 왕녀인 정효공주의 행적과 생애는 문헌과 기록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부분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 의해 재발견 되고 또 다시 재조명 되어야 하는 역사의 한 부분, 살아 숨쉬고 있는 그 현장이 오늘날 우리 주 내(두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랍고, 다시 한번 잊혀진 우리민족의 역사를 몸소 배우고 느끼고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이 관광이 너무 뜻깊었다.
류설화/글 박군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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