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훈장”수여식이 6월 29일 오전10시 인민대회당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29명 수상 당원들 속에는 백세 로인 4명이 있는데 그중 최고령자는 101세이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란세 속에서 탄생했다. 그해 구독이(瞿独伊), 신육령(辛育龄), 곽서상(郭瑞祥),륙원구(陆元九)가 나젊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세계의 신생아로서 백년 로정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했다.
중화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무수한 유지인사들이 혁명에 뛰여들었다.
17살 청년 곽서상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지하공작자로 되였다.
복잡다단한 환경 속에서
그는 정보를 수집하고
당원을 발전시켰다.
16살의 신육령은 학업을 접고
팔로군에 가입하였고
그후 백구은 의료대를 따라
전선에서 생명을 구조하는 작업에 종사했다.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는 17살 륙원구는
총탄을 무릅쓰고 후방인 중경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체계적 항공기술을 익힌 대학생이 되였다.
그해
16살 구독이는 홀로 이국타향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 구추백이 희생전
“중국공산당 만세”를 높이 웨치고
국제가를 소리높이 불렀던 모습은
젊은 그의 마음 속에 혁명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1941년 귀국할 때 구독이는 체포당해
감옥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구독이의 딸 리효운: 해빛이 안드는 곳에서 곰팡이가 낀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녀자감옥에서 심문을 3차례 진행했고 그들을 탈당시키려 했는데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추호의 흔들림없이 공산주의 신앙을 견지하였습니다.
4년후 석방된 구독이는 연안으로 복귀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신육령도 백구은 의료대를 떠나 연안으로 가 의학 공부를 이어갔다. 두 젊은이는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 간고분투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리상신념을 더 굳히게 되였다.
곽서상은 지하공작자에서 팔로군으로 변신해 총탄이 빛발치는 전선에 나갔다. 1946년 9월 곽서상과 150여명 전사들은 수천명 적군의 포위를 당했다. 이때 곽서상은 돌격대를 동원하여 권총과 칼만 쥔 채로 적군에 뛰여들어 결국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뚫었다.
료녕성군구 대련 제16리직간부휴양소 리직휴양간부 곽서상: 공산당은 전투에서 용감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무수한 희생과 노력 끝에 새 중국이 드디여 창건되였다. 개국대전에서 구독이는 라지오를 통해 새 중국 창건 로씨야어 소식을 전세계에 방송했다. 이듬해 구독이와 남편은 함께 쏘련으로 파견되여 새 중국 최초의 외국 보도기구인 신화사 모스크바 지사를 세웠다. 전쟁으로 아무런 기초가 없었던 새 중국, 구독이와 남편은 어렵게 시작을 떼여 당의 보도사업을 적극 추진시켰다.
구독이: 당시 남편 리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 형편이 아직 어렵기 때문에 월급을 줄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업무능력이 당신보다 뒤떨어져서 월급을 많이 줄이고 당신은 적게 줄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중화 진흥의 사명을 안고 신육령과 륙원구는 첫진 국비 류학생 신분으로 외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각기 의학과 항공기술을 학습했다. 1956년 조국으로 돌아온 륙원구는 동시에 여러 항공기술연구를 주재하고 세계에서 최초로 “위성 회수”를 제기했으며 배운 지식을 책으로 편찬해 우리나라 항공자동화과학의 개척자 일원으로 이름을 남겼다.
륙원구와 같은 해 귀국한 신육령은 당시 국내에서 공백이였던 흉부외과 기술을 장악하고 있어 우리나라 흉부외과의 창시자로 되였다. 당시 중국에는 심각한 페결핵 등 병을 앓는 환자들이 많았다. 신육령은 의료진을 이끌고 밤낮없이 수술해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경험을 얻기 위해 신육령은 심지어 자기 몸에서 실험했다. 그는 침술 마취 상태에서 스스로 수술을 진행했는데 최종 침술 마취를 흉부외과수술에 응용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침구를 전세계에 알렸다.
중일우호병원 제1대 원장 신육령: 환자 한명이라도 더 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제가 능력이 있는 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개혁개방초기 환갑이 넘은 신육령은 명령을 받고 초기 현대화병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병원 완공후 그는 원장 직무를 그만두고 다시 흉부외과에 복귀해 90세 고령까지 일터를 지켰다. 신육령은 “당이 과학기술을 학습하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한평생 과학기술사업에 몰두하고 당의 과학기술사업을 위해 평생을 분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중일우호병원 전 종합외과 주임, 흉부외과 주임 류덕약: 신육령 선생은 일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어느날 외래 문진 진료에 나가셨는데 점심 때 갑자기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였습니다. 신육령 선생이 움직이지 못하니 휠체어에 모셨고 그때부터 입원하게 되였습니다. 일을 이 정도까지 열심히 하셨습니다.
신육령처럼 과학보국의 리상을 품은 륙원구는 우리나라 관성 항법사업의 다분야 발전을 추진시키고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내면서 우주비행사업에 한평생을 바쳤다.
구독이는 아버지 세대가 희생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맞바꾼 사실을 지켜본 사람이다. 부모가 남겨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구독이는 항상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답해곤 했다.
전쟁터에서 성장한 곽서상은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모든 영예를 숨겨두고 “영원히 당과 나라에 페를 끼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분투하자”는 가훈을 세웠다. 101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곽서상은 여전히 당의 리론지식을 학습하고 홍군의 본색을 유지하고 있다.
료녕성군구 대련제16리직간부휴양소 리직휴양간부 곽서상: 당의 백주년에 우리는 더욱이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기해야 합니다. 당의 취지, 당이 지시한 빛나는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백년은 아주 길다
그들은 어려운 길을 개척해 나갔고
력사적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시각마다
국가와 민족의 중요한 사명을 짊어졌다
공산주의를 위해 평생 분투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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