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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18] '서유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승려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1일 09시52분    조회: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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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아니, 그게 뭐꼬?" 제목을 미리 말했더니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이 물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를 모두 그 무슨 환상소설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법어(法語) 같은 화두를 이야기의 꼭지로 삼게 된 이유이다.

  줄거리를 다 빼고 얘기한다면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당승(唐僧)처럼 신라의 승려가 서행 즉 '서유(西遊)'를 하고 있었으며 또 진기록을 남기고 있다. '서유기'는 당승 현장(玄奘, 602~664)의 천축(天竺) 여행을 모티브로 삼아 명(明)나라 때 나온 신괴(神怪) 소설이다.

  "그렇다면 신라승려는 '손오공'인가요, 아니면 저팔계인가요? 사오정은 아니구요?"

  손오공(孫悟空)과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당승의 천축 여행을 신변에서 수행한 제자이다. 그러나 신라의 승려가 72가지 변신술을 갖고 있더라도 손오공은 물론 저팔계, 사오정으로 둔갑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손오공은 본디 화과산(花果山)에서 살고 있던 원숭이요, 저팔계와 사오정은 죄를 지어 천계에서 쫓겨난 장군이기 때문이다.

  먼저 '서유기'의 주인공 당승의 실존 인물인 현장을 알고 건너갈 필요가 있다. 현장은 당(唐)나라 초기의 고승이자 번역가, 여행가이다. 10세 때 낙양(洛陽)의 정토사(淨土寺)에서 불경을 공부하다가 13세에 승적에 이름을 올려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에서 나오는 그의 다른 이름인 삼장(三藏)은 불교 경전을 통칭하는 것으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 이 세 가지를 의미한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 또는 629년 천축 즉 지금의 인도에 들어갔다. 훗날 이 이야기에 살과 피가 덩어리로 붙어서 신괴소설 '서유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보다 훨씬 앞서 '서유기'의 추형(雛形)은 벌써 민간에 형성되고 있었다. 유명한 돈황(敦惶) 막고굴(莫高窟)의 서하(西夏) 시기 벽화에 당승 그리고 백마를 끌고 있는 손오공(孫悟空)이 등장한다.

  막고굴은 16국의 전진(前秦)시기부터 시작하여 원(元)나라 때까지 여러 조대를 거쳐 건설, 동굴이 735개 되며 벽화가 4만 5천점 된다. 대륙 서부의 실크로드의 연선에 위치하며 따라서 '실크로드의 보물'로 불린다.

돈황 막고굴 전경.

  바로 이 막고굴에서 또 다른 한편의 '서유기'가 발굴된다. 1900년, 막고굴 장경동(藏經洞)에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비롯하여 대량의 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 704~787)가 집필한 여행기이다. 이 여행기에는 천축과 서역 각국의 종교, 풍속, 문화가 기록되어 있다. 잠깐, 혜초는 당승처럼 육로를 선택한 게 아니라 바닷길을 타고 천축으로 갔다.

  어찌됐거나 혜초는 명나라가 아닌 신라의 '당승'이요, '왕오천축국전'은 명나라가 아닌 신라의 '서유기'인 셈이다.

  이맘쯤이면 누군가 글줄에서 눈길을 돌려버리지 않을지 한다. "이게 바로 '제목'에 묻어놓은 복선인가 보네. 그럼 이야기를 더 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잠깐,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진짜로 있었다. 손오공이나 저팔계, 사오정이 아니라 실존한 인물이다. 신라의 승려 원측(圓測)이 바로 현장의 이름난 제자였다. 원측은 신라의 왕손으로서 일찍 3세 때 출가했고 15세 때 구법을 위해 서쪽으로 여행 즉 '서유(西遊)'를 해서 당나라의 서울 장안(長安) 즉 지금의 서안(西安)에 건너갔다고 전하고 있다. 그때가 정관 2년(628년)이니, 현장이 천축으로 떠나던 그 무렵이었다.

  궁금한 이야기부터 한다면 원측은 천축 구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장안에 짐을 풀고 유식학(唯識學) 연구의 개척자인 고승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을 스승으로 모신다. 유식학은 불교의 종파인 법상종(法相宗)의 성전(聖典)이다. 원측이 제자로 현장을 신변에서 수행하게 된 건 조금 후의 이야기이다.

  이때는 원측이 아닌 다른 신라승려가 현장처럼 천축으로 구도를 떠나고 있었다. 이 인물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책은 신라의 승려 아리나(阿離那)가 정관(貞觀, 627~649) 연간 당나라의 서울 장안(長安)을 떠나 오천축(五天竺)으로 갔다고 기록한다. 아리나의 천축 여행은 현장의 구법 시기와 거의 맞물리는 것이다. 아쉽게도 아리나가 현장과 서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리나를 이어 그 후에도 신라의 승려 혜업(慧業), 현태(玄泰), 구본(求本), 현각(玄恪), 혜륜(慧輪), 현유(玄遊) 그리고 이름 미상의 두 법사가 석가의 교화를 보기 위해 중천축(中天竺)에 가는 등 서유(西遊)를 했다. 그들은 "혹은 중도에서 죽고 혹은 현지 절에 있었으며" 오직 현태만 당나라에 돌아왔으나 어디서 입적(入寂)을 했는지 모른다고 '삼국유사'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기록을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 이런 승려를 흠모했던 고려 중기의 승려 각훈(覺訓)도 '해동고승전'에 그들의 전기를 수록했다.

  신라승려가 보리심을 등불로 삼고 옛 실크로드를 따라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가로질러 성지를 순례하면서 구법한 '서유기'는 그렇게 여러 고서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그만 다른 데로 흐른 것 같다. 천축에서 유식학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현장은 드디어 645년에 귀국했다. 이때부터 원측은 현장의 문하에 들어가서 또 유식학을 닦았다. 유식학은 결국 원측과 현장을 서로 이어놓는 연기(緣起)가 된 것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따르면 원측은 나중에 무측천(武則天)에 의해 '살아있는 부처'로 존숭(尊崇)을 받았다. 그래서 무측천의 후대(厚待)를 받아 역경관(譯經館)에 있으면서 유식(唯識)의 주석 서적과 기타 경론의 해설을 했다.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등을 번역할 때 원측은 영변(靈辨), 도성(道成) 등 여러 석학과 함께 증의(證義)를 맡아 함께 18부 34권을 번역했다. 이 무렵 그는 또 고증자(考證者)로서 번역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원측은 어학에 남다른 천부를 갖고 있었으며 중국어, 범어, 서역어 등 6개국 언어에 능통했다고 전한다.

  무측천이 등극한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 7월 22일, 원측은 임종을 앞두고 제자에게 스승의 사리탑 옆에 매장할 것을 부탁한다. 원측의 이 마지막 숙원은 그로부터 400여년 후에 비로소 이뤄진다.

  원측은 원적한 후 처음에는 낙양(洛陽) 용문(龍門)에 매장되었다. 이때 원측의 신라 제자 승장(勝庄) 등이 일부 유골을 장안에 갖고 와서 풍덕사(豊德寺) 근처에 매장하며 송(宋)나라 정화(政和) 5년(1115)에 소릉원(少陵原)의 흥교사(興敎寺) 현장 사리탑 왼쪽에 이장되는 것이다. 소릉원은 장안의 남쪽 약 20㎞ 되는 곳에 위치, 두 강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언덕지대이다.

흥교사의 뜰에 있는 현장과 원측, 규기의 사리탑, 오른쪽 탑이 원측 사리탑이다.
 
원측 사리탑에 쓰여 있는 탑 이름.

  와중에 이야기가 하나 있다. 흥교사는 '불교를 대흥(大興)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실은 현장 때문에 생긴 사찰이다. 664년, 현장은 원적한 후 장안 동쪽의 백록원(白鹿原)에 매장되었다. 백록원은 지세가 높아서 황궁 대명궁(大明宮)에서도 환히 보인다.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현장을 몹시 경중(敬重)했는데, 궁전에서 멀리 현장의 영탑(靈塔)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성체의 안강(安康)을 위해 고종의 황후 무측천이 조령(詔令)을 내려 총장(悤章) 2년(669) 장안 남쪽의 소릉원에 이장하고 이와 함께 사원을 세워 현장을 기리었다. 이때 사찰은 '대당호국흥교사(大唐護國興敎寺)'로 명명되었으며 그 시기 장안 남쪽 여러 사찰의 으뜸으로 꼽혔다.

  "하루가 멀다하게 한국 스님들이 사찰에 찾아와요." 흥교사에서 불교용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거사(居士)가 이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거사는 우리 일행이 주고받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에도 한국 승려가 여럿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의 말을 실증하는 듯 한국 어느 사찰인가 증정한 쇠종이 종루에 걸려 있었다. 바다 건너 저쪽의 일본의 승려도 흥교사를 자주 다녀가고 있었다. 흥교사의 동쪽에는 중국과 일본 친선을 기리는 '광명탑(光明塔)'이 서있었다.

  옛 실크로드 연선의 이 고찰에는 해동 승려들의 발길이 그냥 이어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거사는 얘기 가운데 자주 개탄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요, 사찰에 남아있는 옛날의 유물이 별로 없거든요."

  정말이지 그래서 뭐나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종루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광명탑'에는 진입을 불허하는 끈이 드리워 있었다.

일본승려들이 흥교사에 세운 광명탑.
 
현장법사의 다른 이름을 따서 만든 흥교사의 삼장원(三藏院).
 
  흥교사는 천년 동안 여러 번 훼손과 중수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전란과 멸불지화(滅佛之禍)로 인해 한때는 사찰에 승려가 없고 탑에 주인이 없는 피폐한 정경이 출현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부분 민국(民國, 1912~1949) 시기에 중수한 것이었다.

  유물로 잔존한 사탑(寺塔)은 중수한 사찰의 상징물로 되고 있었다. 사탑은 현장과 그의 유명한 제자 원측, 규기(窺基)의 세 사리탑을 합한 이름이다. 규기는 현장에서 비롯한 법상종을 자은종(慈恩宗) 종파로 확립한 인물이며 이로 하여 일명 자은대사라고 불린다.

  규기는 원측과 함께 현장의 양쪽에 사리탑으로 시립하고 있지만, 살아있던 현생에는 전생의 그 무슨 업보인지 불협화음을 빚고 있은 듯하다. 어쩌면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지 못한다"는 말은 불문(佛門)에도 통하는 것 같다.

  원측의 도청설(盜聽設)은 옛 문헌에 기록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할 때 현장은 규기 등 몇몇 제자에게 윤색과 집필, 검문, 편찬을 담당하게 했다. 현장의 고의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원측은 이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원측은 문지기를 매수하고 몰래 들어와서 현장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는 규기에 앞서 승려들에게 '성유식론'을 강의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현장은 원측 몰래 규기에게 '인명론(因命論)'을 강의했으며 규기는 이에 대한 해의(解義)를 써서 미구에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측은 종파적인 모든 선입 관점을 떠나 유식의 진전만 탐구했으며 또 '반야심경찬(般若心經讚)' 1권과 '인왕경소(仁王經疏)' 3권울 남기는 등 법상종의 다른 학승(學僧)에 비해 진보적인 학문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변의 시샘하던 자들이 도청을 했다고 원측을 무함했다는 설이 나올 법 한다.

  원측은 현장의 유골을 소릉원으로 이장할 무렵인 668년 산속에 들어가 은거했다. 이때 그는 장안 남쪽의 만화산(萬花山) 운제사(雲際寺)에서 선정(禪定)을 닦았다고 전한다. 산은 장안의 귀족들이 늘 와서 꽃놀이를 했다고 해서 '완화산(玩花山)'이라고 했으며 훗날 비슷한 발음의 '만화산'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만화산의 정상은 해발이 약 2천m이며 산꼭대기에 위치한 운제사는 이름 그대로 방불히 흰 구름의 바다 위에 두둥실 떠있는 듯하다.

운제사 근처에 있는 신라왕자의 옛터에 패쪽만 남아있다.

  원측은 후에 운제사 근처의 다른 곳에서 수련했으며 나중에 장안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렀다. 당시 황후였던 무측천은 그에게 서명사를 관장하도록 하고 국사(國師)로 모시는 등 극진한 대우를 했다.

  운제사는 국사 원측이 수련한 도장이라고 해서 사찰 근처에 '신라왕자의 누각(新羅王子臺)'이 만들어졌다. 당나라 때 '왕자의 누각'에는 고승이 운집했으며 문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초부터 뭔가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그걸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 "이름이 왕창 틀렸네요, '왕자의 누각'이 아니라 '왕손의 누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왕자이든 아니면 왕손이든 운제사에 처음 나타난 신라승려는 실은 원측이 아니었다. 신라 진골(眞骨) 귀족의 출신인 승려 자장(慈藏, 590~658)은 636년 서쪽 여행 즉 '서유'를 해서 당나라에 왔을 때 조정의 허가를 받고 운제사 근처에서 3년 동안 수련하면서 마침내 득도했다고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왕자의 누각'보다 '귀족의 누각'이 먼저 서야 하는 게 순서이다. 아니, 이 개명보다 꼭 앞세울 게 하나 있었다. 명나라 판본의 '서유기'에 앞서 신라 판본의 '서유기'가 먼저 기술되어야 했다.

  가만, "이게 뭐꼬?" 하고 힐문할 사람이 이번에도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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