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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76]《통사》와 ‘조선족’ 정의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30일 07시54분    조회: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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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6](김춘선편5)

우리 조선족사연구를 체계화시키려면 인물전이나 혁명투쟁사, 청년운동사, 부녀사, 근거지사 등등 전업성 연구가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하나로 묶은 《통사》의 출간도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국내에서 큰 민족들인 만족, 몽골족 등등을 제외하고는 기타 소수민족들은 《통사》를 써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의 력사는 비교적 짧지만 력사 자료의 풍부성과 독특성은 기타 민족에 비해 못지 않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후에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연구성과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우리 연변대학이 전국적으로 조선족력사연구의 자료중심, 인재중심이 되려면 연구중심도 되여야 한다. 연구중심이 되려면 그에 알맞는 계통적이고 대표적인 저작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바로 《통사》의 집필이다. 일찍부터 《통사》의 집필을 꼭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저는 민족력사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 이 《통사》에 관한 집필을 시작하였는데 2007년부터 시작하여 조선문판은 2009년에 출간하고 중문판은 2013년에 출간하였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사업회의 기념(뒤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춘선 교수).

《통사》를 어떻게 출간할 것인가? 《통사》의 기틀을 어떻게 구성하겠느냐? 《통사》는 기실 우리 민족의 력사를 계통적으로 종적으로 편집하는 편년체 형식의 한개 력사서이다. 즉 우리 조선족의 모든 력사를 총망라한 력사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한 학자가 독자적으로 할 수가 없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하나로 뭉쳐서 집필해야만 《통사》의 체계나 질을 보장할 수 있다. 2011년과 2012년에 《통사》집필소조를 내왔고 력사, 문학, 체육, 민속, 어학, 예술 등 분야의 교수들과 수차의 토론을 거쳐서 《통사》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통사집필에 각 분야의 교수들을 참여시킨 이후에 제일 중요한 문제는《통사》를 집필할 때 어떤 원칙에서 집필하는가 하는 것이였다. 특히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는 상당히 복잡한 력사발전과정을 경유하여 왔기에 허다한 문제에서 론쟁점이 많다. 하나는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조선민족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사의 일환인 중국조선족사, 소수민족사의 일환으로서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족력사의 기본개념과 범주와 관점문제를 우리가 진일보로 확정하고 론증하는 문제가 존재해 있었다. 물론 2007년도에 길림성당위와 길림성정부의 대폭적인 지원하에서 길림성사회과학원의 교수와 연변대학 교수를 망라하여 5명의 전문가들이 최초로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라는 성정부와 사회과학원의 중점항목으로 되는 프로젝트를 완성하여 출간한 바가 있다.

2014년 《중국조선족통사(상,하책)》이 길림성사회과학우수성과 3등상을 수상.

이 책은 당시 길림성정부의 2등상까지 받은 대표적인 연구성과였다. 당시 이 책을 출간할 때 이미 성(당위)에 계시던 전철수 (부)서기와 당시 성당위 선전부 부장이였던 등개 등 분들의 지지하에 책의 초고가 완성된 후에 연변학자들 뿐만 아니라 길림성사회과학원의 학자 그리고 길림성 당사연구소의 학자, 길림대학, 동북사범대학 등 대학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책에서 나온 여러가지 관점들을 론의한 바가 있다. 그때 론의되였던 중국조선족력사의 기본틀을 이번 통사에 그대로 인용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 제안에 따라서 설정하게 되였는데 우선 중국조선족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지금 일반적으로 조선족 혹은 한인, 조선인, 조선민족 이렇게 호칭하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호칭이 개념적으로 상당히 모호한데 이러한 호칭이 왜 나왔는가부터 알아야 하고 이 호칭을 어떻게 규범화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선민족은 우리가 단군의 후손으로 세계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전체 조선민족의 주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민족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각 나라에 살고 있는 민족의 호칭은 다 다르다. 조선반도 내부에서도 다르다. 조선반도도 력사과정을 거쳐서 왔는데 고대를 제외하더라도 근대에 와서 조선왕조, 대한제국이 있었고, 1919년에는 대한민국림시정부가 건립되고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광복전까지 이어졌다. 광복직후에 랭전이 시작되고 또 조선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북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년)으로 되고 남쪽은 대한민국으로 된다. 이렇게 우리 민족을 주축으로 한 나라의 명칭이 상당히 복잡하게 변하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호칭도 매우 복잡해진 것이다. 조선인이란 명칭은 대개 조선왕조시기에 우리 민족을 가리켜서 많이 한 말이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력사서적에서 다 조선인으로 나온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건립되면서 조선왕조가 없어지고 그때로부터 조선인이 아닌 한인으로 불리우게 된다. 현재 사람들이 한인, 한국인 이렇게 말하는데 한국인은 대체로 지금의 대한민국의 국민을 말하는 것인데 일찍 대한제국의 조선민족을 한인이라 호칭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조선인, 한인 등은 력사적으로 1910년대, 1920년대에 많이 불리워왔는데 다 조선반도의 조선민족을 말했다고 보면 좋겠다.

《중국조선족통사》

그 이후에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는데, 그럼 조선족은 어떻게 되여 나왔는가? 물론 고대에서도 조선반도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가 있는데 그렇게 널리 사용한 것은 아니였다. 조선족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은 중국경내 특히는 동북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가리켜 조선족이라고 했는데 조선족과 조선인은 어떻게 다르냐면 민족은 같으나 국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족은 조선민족의 한 지류이지만 중국경내에서 살고 있는 중국 국적을 가진 중국공민인 소수민족인 조선민족이다. 그들을 가리켜 조선족이라 한다. 그런데 중국공민이라는 이 개념도 상당히 애매하다. 우리가 말하는 중국공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다. 그렇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언제 건립되느냐?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도에 건립된다. 그런데 1949년전에 이미 중국지역에는 수백만의 조선민족이 살고 있었다. 광복직후 1945년도 통계에 의하면 그때 동북지역에는 약 216만명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약 절반이 광복직후에 한국 혹은 조선으로 나갔고 113만에 달하는 중국조선족들이 여전히 중국 국내에 남아서 중국의 공민으로 된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바로 조선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조선족이고 그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집필소조 합영.

새 중국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동북에 사는 조선족들은 어떤 국적을 가지고 있었느냐면 대체적으로 2중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국민이였고 중화민국의 국민이였던 것이다. 이렇게 국적이 상당히 복잡하다. 일부 년세 있는 분들이 저한테 전화도 오고 편지도 온다. 우리가 렬사비, 기념비를 가보면 항일전쟁시기 렬사가 누구누구고 해방전쟁시기 렬사가 누구누구라고 쓴 촌마다에 세워져 있는 렬사비에 이름까지 적혀 있고 책들도 그렇게 쓰고 있는데 우리가 알기로는 그분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 아니지 않느냐? 그분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인데 어떻게 렬사로 모시고 있고 우리 후대들이 거기 가서 혁명전통교육을 받을 수 있냐?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분들이 리해는 된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력사를 어느 하나의 시점에서 어느 한개 조대에서 갈라놓고 볼 수가 없다. 우리 조선민족 혹은 조선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중국 땅으로 이주해와서 수백년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지금의 조선족으로 형성되고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전에 내가 말했던 19세기 중엽이 아니라 17세기 초부터 전쟁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온 그분들을 보면 지금도 그분들의 상당히 많은 조상의 무덤은 하북성, 료녕성, 길림성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그분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물론 그분들이 청나라시기에 한때는 동화되여 만족으로 살기도 하고 또 중화민국시기에는 민족기시를 피하기 위하여 중국인(한족)으로 등록한 적도 있다.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출판기념회가 2010년 11월 11일에 연변대학에서 개최되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면서 특히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후 중국공산당이 민족정책을 제대로 락실하면서 민족성분을 재차 고증할 때 한족이였던 수천명에 달하는 하북, 료녕, 길림성의 박씨성의 중국인들이 우리 조상은 고려인이기 때문에 조선인이기 때문에 민족을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고쳐달라고 정부에 신원을 제기한 것이다. 그래서 1980년부터 중앙정부와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전국적으로 소수민족에 대한 력사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조사는 1960년대에도 한 바가 있다. 동북지역도 그때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하여 동북3성의 력사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의 지속적인 선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박씨촌의 조사이다. 박창욱교수님이 이들 지역에 대한 조사와 론증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그때 박창욱교수님은 직접 나서서 석사연구생들을 이끌고 박씨촌에 가서 거주하면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력사자료를 수집하고 민속습관을 고증하고 그곳 사람들의 의식형태와 언어 및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하고 근 10여편에 달하는 론문을 륙속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박창욱교수는 이분들이 바로 17세기 초에 전쟁포로로 끌려왔던 그 사람들의 후손임을 학술적으로 증명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사보고서가 정부에 제출되고 결과적으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바꾸어달라는 수천명에 달하는(초기에는 1200명)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민족을 한족으로부터 조선족으로 고쳐주었다. 이러한 혈육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내려온 이런 사람들을 조선족으로 볼 때 우리 력사의 상한선도 기실은 17세기 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립증하게 되였다. 이러한 문제들이 《통사》를 쓰는데 제일 중요한 문제로 되였다.

김춘선교수가 펴낸 저서들.

1사2용’ 문제를 학술적으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조선족《통사》를 쓰기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와서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동북지역을 개척하였고 또 중국에서 승인해주고 인정해주었던 수전(논)개발, 이 수전(논)개발에 대한 공헌에 대해서는 지금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데 나의 시대까지는 그 혜택(중앙민족대학 시절 정부에서는 우리 조선족학생들에게만 입쌀표를 더 많이 주었다)을 받아왔다. 이와같이 국가에서도 우리 조선족이 동북지역의 수전(논)개발에 큰 공헌이 있고 동북의 농업구조를 개변시킬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승인하기 때문에 조선족에게만 입쌀을 더 많이 공급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 조선민족이 동북개척에 큰 공헌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족이 동북개척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1910-1920년대부터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한 사실, 1930년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성세호대하게 진행했던 반제반봉건투쟁과 항일무장투쟁, 내지는 광복직후에 제3차 국내전쟁시기 공산당의 령도하에 공고한 동북근거지건설에서의 핵심기지였던 동만근거지건설에서 일으킨 역할, 한마디로 전국해방전쟁에서 근 10만에 달하는 조선족의 영웅아들딸들이 전선에 나가서 총을 잡고 전국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에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기실 우리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정식으로 된 것은 1947년부터이다. 그런데 1947년에는 공화국이 정식으로 건립되지 않았다. 공화국이 건립되여 헌법이 제대로 제정된 것은 1949년 이후라고 보면 된다. 제1차 정협회의에서 조선족도 기타 민족과 같이 동등한 대우를 받기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부터 정식공민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이 동북지역을 제2고향으로 생각하고 일찍부터 반제반봉건투쟁을 진행하면서 이 지역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생활해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조선족이란 어느 시기가 아니고 어느 나라의 국적법도 아닌 무릇 조선반도에서 동북땅에 이주해와서 또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면 그들의 모든 력사, 조상들의 력사까지 모두 포함하여 중국조선족력사로 보아야 된다는 이러한 력사범주를 책정하게 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7세기 초부터 조선반도에서 온 조선인 선조들이 우리 조선족의 선조였고 우리의 력사의 일부분이다는 이런 1사2용의 관점에서 모든 사실들을 서술하였기에 조선족《통사》가 기타 문제없이 합법적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통사》에서 또 하나의 문제는 자치문제이다. 자치권문제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자치권문제는 중국공산당의 자치제도의 발전과정을 잘 공부해보아야 한다. 공산당은 간고한 시기에 민족정책을 어떻게 락실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초기에는 대체적으로 쏘련의 정책을 모방하는 그런 형태로 나갔다. 그러나 강소에서 쏘베트정권이 건립되고 간고한 2만 5천리 장정을 경과하여 섬서지역에 일정한 근거지를 확보하고 그 근거지를 토대로 새로운 정권을 건립하고 군민들에게 각종 정책을 락실할 때 토지법도 나오고 소수민족정책도 나오는데 민족자결로부터 민족자치로 발전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우리 조선족은 공산당의 옳바른 민족정책하에서 자치를 실현할 수 있었고 그 자치가 중화민국도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다시말하면 1952년도에 연변에 조선족자치구(후에 자치주로 변경)를 건립하면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춘선교수가 펴낸 저서들.

한마디로 1사2용, 우리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진행하였고 그전에는 반제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력사가 모두 우리 민족의 찬란한 력사였고 인류의 평화를 위한 하나의 정의적인 력사이기 때문에 소수민족사의 시각이거나 중국사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이런 력사가 완전히 우리 민족사 혹은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시기의 조선족의 력사를 조선사 혹은 한국사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민족의 해외독립사거나 해외유민사거나 해외민족해방투쟁사, 해외항일무장투쟁사의 일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1사2용의 시각으로 그때 중조인민들이 어깨 겯고 싸웠던 력사를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지금에 와서 인위적으로 너무 협애한 민족사적 관점이나 협애한 국사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하나의 평화를 위한 반제반봉건의 위대한 력사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이러한 시각에서 력사를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때문에 과거 조선족들의 동북지역에서 이룩한 력사를 단순히 조선의 력사로 밀어 버려서도 안되고 우리 만의 력사로만 독점해서도 안된다. 반드시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중조 량국과 두 민족의 공동한 력사유산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태국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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