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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전쟁 등 18개 주제 129통 편지 담긴 '우편함 속 세계사' 출간
아내 빌마 그륀발트(왼쪽)와 남편 쿠르트 그륀발트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성도현 기자 = "트럭들이 이미 와 있고, 그 일이 시작되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아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스스로를 비난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 꼭 건강해야 해요. 멋진 인생을 살아요. 우리는 이제 트럭에 올라야 해요."
영국의 역사학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신간 '우편함 속 세계사'(시공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생사가 갈린 한 유대인 가족의 슬픈 사연이 담긴 편지 한 통을 소개한다.
1943년 12월, 이 가족은 수천 명의 다른 죄 없는 유대인 가족처럼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이듬해 7월 다리를 저는 첫째 아들 존이 처형 대상으로 분류되자 어머니 빌마도 함께 가스실에 가기를 선택한다. 빌마는 며칠 뒤 편지를 써서 감독관에게 건네며 수용소에서 의사로 일하게 될 남편 쿠르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빌마는 "숨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래 봐야 가망이 없을 것 같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건 우리의 운명이다"라며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는 아니라도 부분적으로 나아질 거라는 내 말을 기억하라. 당신과 미샤(둘째 아들)를 생각할 것"이라고 전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상황 속에서 아내는 담담하고 침착한 어조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빌마는 존과 함께 가스실에 보내져 숨졌고, 쿠르트와 미샤는 세 번째 걸친 이송 끝에 1년 뒤 풀려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를 발견했고, 2012년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에 기증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가기 전 아내 빌마가 남편 쿠르트에게 쓴 편지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저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 희귀한 편지를 비롯해 가족, 전쟁, 권력, 작별 등 18개의 주제에 맞춰 고대부터 21세기까지 인간사를 바꿔놓은 대표적인 편지 129통을 추려 책에 담고 짧은 해설을 곁들였다. 히틀러에서 피카소, 람세스 2세에서 트럼프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발신자로 등장한다.
이슬람 치하 스페인의 칼리프(이슬람 신정 일치 지도자)인 압둘라만 3세는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들에게 남긴 편지에서 "50년 넘게 통치한 상황에서 순수하고 진정 행복한 나날은 14일이었다"며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겸손함을 보여준다.
훗날 영국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는 한때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혹으로 체포돼 런던탑으로 이송되기 전 '피의 메리'로 불린 이복 언니 메리 1세에게 살려달라는 취지의 편지를 보냈고, 결국 풀려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편지에서 "폐하의 타고 난 선하심에 희망을 건다"고 호소하며 자신의 결백을 강조한다.
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독재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사이가 틀어진 옛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는 내게 암살자를 보내지 마시오! 이미 다섯을 붙잡았는데 만약 계속 보낸다면 나도 아주 손이 빠른 한 명을 모스크바로 보낼 것이오"라고 경고한다. 그러자 스탈린은 더는 암살자를 보내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8년 5월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의 핵 능력을 이야기하지만, 미국의 것은 워낙 막강하고 강력해서 내가 이것을 결코 쓸 일이 없기만을 신께 바랄 뿐"이라며 6·12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이후 물밑 접촉을 거쳐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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