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창업의 길은 험난했지만 난 이겨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10월16일 09시27분    조회:609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백춘희
대련 보방무역유한회사 백춘희사장의 창업이야기

(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기자 =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주먹구구로 사회 생활에 뛰어들어 거듭되는 도전을 이겨내고 현재 연 매출 400만 달러의 복장무역회사를 이끄는 백춘희(여, 36세)사장도 그런 ‘성공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입사시 돈보다 전망을 보았다”

  1999년 요녕사범대학 경제관리 전공을 졸업하고 대련에 정착한 춘희씨는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친구들과 함께 IT회사를 차렸다. 허나 경험이 없고 자금, 인맥이 부족한 신출내기들이다 보니 회사는 2년 만에 아쉽게 문을 닫아야 했다. 이어서 월 노임 3000위안의 사무실 직원으로 취직했다가 너무나 기계적이고 안일한 삶이 싫어서 한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런 경력이 있는 춘희씨에게 있어 호구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이루어가는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당시 무엇보다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몸에 맞는 ‘옷’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그렇게 도전과 발전가능성이 있는 직장을 구하고 있던 중 ‘보방무역유한회사’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한국인 사장을 만났다.

  “무역이 춘희씨의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몇 년 동안 같이 일하면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며 한국인 사장은 입사를 종용했다.

  한국인 사장이 제시한 조건은 월 노임 800위안이었다. 당시 대련에 있는 한국회사 임금수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낮은 액수였지만 춘희씨는 단호하게 입사를 결정했다.

  그가 관심을 갖는 분야이고 또한 처음 세워지는 회사로서 백지에 뭔가를 하나하나 배워가며 그려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말단에서 부사장으로.. 대가는 컸다”

  2003년 3월 무역회사에 첫 출근한 춘희씨는 여느 초임 회사원과 다름없이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며 일과를 시작했다.

  회사가 초창기이다 보니 할 일이 많았다. 한국사장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춘희씨를 전적으로 믿었다.

  사무실의 사소한 업무에서 재무, 세관업무, 인원선발까지 춘희씨가 참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신인이 감당하기엔 업무량이 벅차기도 했지만 춘희씨는 스스로 묵묵히 감내했다. 일을 배우고 기반을 닦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과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훗날 춘희씨가 백사장으로 불릴 때 무역회사의 제반 운영과정을 속속히 들여다보며 각 부서 직원들을 여유 있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신을 바쳐 일을 하고 있는 춘희씨의 노력과 상관없이 회사상황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한국인 사장의 부적절한 인원관리로 회사 운영자금에는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연약한 사장이 번마다 협력업체들이 동원한 폭력배들의 채무독촉과 무리한 갈취에 순순히 따르다 보니 회사는 도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그 때 폭력배들의 괴롭힘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 사장은 방패막이로 춘희씨를 내세웠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지금 그 상황을 떠올리면 너무 무섭다”는 춘희씨는 당시 겁도 없이 칼을 들이대는 폭력배들과 언쟁을 벌겨가며 협상을 했다.

  그리고 회사의 자금구멍을 메우기 위해 개인 돈을 돌려댔는데 그 액수가 나중에는 30만위안을 넘기게 되었다. 춘희씨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회사를 살려야 나도 산다”는 일념뿐이었고 개인 득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춘희씨의 사력을 다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권과 관리권을 쥐고 있는 사장의 부실경영은 계속됐다. 게다가 부정을 일삼는 직원들의 가시돋힌 눈길이 춘희씨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춘희씨는 회사에 이미 넣은 개인 돈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사직하고 집에서 지낸 지 일주일 만에 회사직원들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폭력배들이 찾아와 직원들을 감금해 놓고 돈을 내라며 엄포를 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춘희씨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문제를 해결한 춘희씨를 한국사장이 간곡히 만류했다. 지금까지 사장지시에 따라 일만 해온 춘희씨에게 부사장의 직함과 함께 직원관리를 비롯한 부사장으로서의 실권을 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많은 심혈을 기울인 회사이고 그 만큼 애착이 컸던 춘희씨는 이튿날 부사장 취임식을 통해 회사에 복귀했다.

  “직원들은 내 가족, 내가 지킨다”

  2005년 한국사장은 “한국에 들어가 오다를 따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주하다 싶이 중국을 떠났다.

  춘희씨가 건네받은 건 근 20만위안에 가까운 채무와 10여명의 직원이 전부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업무거래가 있던 바이어들도 쏙쏙 빠져나갔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빨 뺌을 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허나 사장이 된 춘희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회사를 믿고 따라온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울러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든 내 손으로 꼭 이 회사를 살려 내 직원들을 지켜내겠다는 오기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왔다.

  백사장은 재정적으로 정말 힘든 상황이었지만 친지들의 돈을 돌려서라도 우선 직원들의 노임을 지급하면서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부지런히 바이어들을 찾아 다니며 업무를 주문했다.

  백사장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오다가 생기기 시작했고 일부 바이어는 여러 고객에게 나누어주던 오다를 백사장 한 사람에게 몰려주기 시작했다.

  회사는 2006년, 2007년의 진통기와 2008년의 IMF를 이겨내며 2009년에 들어서서는 차츰 제 궤도를 찾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물곤 그 과정에 바이어에게 돈을 사기 당하고 직원들의 배신을 당한 등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백 기관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보방호’ 무역선의 넓은 바다로 향한 항행을 막지 못했다.

  회사가 첩첩 난관을 이겨내고 욱일승천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백사장이 사심을 버리고 회사를 집처럼, 함께 동고동락한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회사에 남은 10여명의 직원이 지금까지 백사장을 믿고 따르고 있다.

  “보방의 직원들은 사장님 말씀만 나오면 눈에서 빛이 날 정도 자랑스러워 하고 있어요. 정말 좋은 직원들을 두었어요.”

  백사장은 주변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일에는 에누리 없지만 사람을 대함에 있어 더 없이 인간적인 백사장의 인격매력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건강검진, 년말 보너스, 연례여행 등 인센티브는 물론 야근이 있을 땐 직접 삼계탕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함께 사우나에 가서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다.

  장사를 함에 있어 푼돈을 아끼는 백사장이지만 직원들의 적절한 요구에는 호방하게 호주머니를 풀면서 직원들을 정으로 대했다.

  “이 회사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보다 높은 노임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회사도 있지만 500~1000원의 차이 때문에 이 회사를 떠나고 싶진 않아요. “

  직원들이 늘 하는 말이다.

  백사장은 이처럼 든든한 직원들을 후방에 두었기에 하루가 멀게 미얀마, 태국, 일본, 한국 등 외국을 나들며 보방의 미래를 넓혀가고 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되돌아보는 인생그라프 □ 허길성     청년시절의 허길성   사람들은 길고도 짧은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순간순간과 하루하루가 모여 하나의 트랙이 되는것 또한 인생이라고도 한다. 나 자신을 놓고볼 때 1939년생(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갑산동임)이니까 만으로 올해 75세이다. “젊어서는 희망...
  • 2013-03-07
  • 중국과학원 심양응용생태연구소 김영환부교수 산과 나무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람, 나무의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무엇인지 깊은 산속의 작은 풀잎의 스치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그는 중국과학원 심양응용생태연구소에서 삼림생태를 연구하는 김영환부교수(47세)이다...
  • 2013-03-07
  • 학자형 전문가형 일인자 연변대학부속병원(연변병원) 김철호원장 연변대학부속병원(연변병원)의 이 몇년간의 눈부신 활약과 성장에는 다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환자와 가족이 100% 만족하는 명품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언제나 온 힘을 쏟아부으며 아름다운 “항행”을 주도하는 “연변병원호” ...
  • 2013-03-06
  •  ‘전국동포산업재해인협회’남명자 총무국장   (흑룡강신문=중국주간) 나춘봉 기자 = 한국에 와 있는 동포들의 숫자가 대략 6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   대부분 중국동포들은 중국에서 한국말을 배웠다. 하지만 한국말과 글을 안다고 해서 한국의 풍습과 문화까지 다 안다고 할...
  • 2013-03-06
  •   THE NORTH FACE 연변총판대리점 한춘향사장 "경기불황으로 요즘처럼 고객수가 줄어드는것을 피부로 체감하고있는 류통업계는 일찌감치 비상경영중입니다. 그럴수록 더 력동적으로 점포가 움직여야 합니다. 불황이라고 움츠릴게 아니라 오신 고객들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정을 나눠주고 좋은 상품을 제안해 주고..." ...
  • 2013-03-05
  • 흑룡강성병원, 흑룡강성중일우호병원 부원장 김정석의학박사를 찾아 흑룡강성병원이라면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을것이지만 1800여자리 침대, 3100여명 직원을 갖고있는 이 병원의 실무담당자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할빈에서의 첫 취재에서 만난 흑룡강성병원 및 흑룡강...
  • 2013-03-05
  • -길림성 왕청현제5중학교 전철수교장 왕청현제5중학교 교장 전철수 길림성 왕청현제5중학교 전철수교장이 《길림성민족단결진보 선진집단》의 자랑찬 영예를 안고 병풍산 기슭에서 민족단결의 꽃을 아름답게 피워가고 있다. 2008년 11월, 한족학교인 왕청현제3중학교는 교사재건으로 수업할 교실이 없게 되였다. 이에 왕청...
  • 2013-03-05
  • 조선족녀기업가 김석순 당당하다, 멋있다, 우아하다… 김석순회장(48세)을 처음 만나는 순간 떠오르는 느낌은 대략 이렇다. 그는 외모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를 발산한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짧은 머리, 조선족녀성으로서는 보기 힘든 170센치메터가 넘는 큰 키 그리고 부드러운듯하면서도 목적의식이...
  • 2013-03-04
  • "중국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의 자녀가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한민족의 일원으로 육성하려면 하루속히 '재외한국학교지원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황찬식(57) 재중국한국인회장은 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부와 국회가 재외국민의 교육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면서 법적&m...
  • 2013-03-01
  • 저명한 조선족물리학자 김광성교수의 외길 인생 자석은 왜 서로 붙을가, 지남침은 왜 항상 남쪽을 가리키지?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의문들…살아가면서 그 수많은 의문들은 삶에 부대끼며 지나온 길에 하나 둘씩 잃어버린다. 하지만 한 소년은 달랐다. 헐벗고 굶주리던 그 시절에도 그의 호주머니...
  • 2013-02-2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