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주간이 만난 사람(2) 최룡국
부끄럼이 없어요
연변가무단 전임 악대 지휘 최룡국선생을 만나
오전 9시반경, 령하 13도… 립춘이 코앞까지 굴러왔는데도 마냥 포복행진을 하고 있는 날씨다.
하남가‘주부가원(州府嘉 )’정문에 들어서자바람 6동 아빠트를 찾아 좌우로 고개를 뽑았다. 금시 엉성해진 목깃사이로 찬바람이 쳐들어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어, 추워…
“여기, 여기요~”
그때 4단원 출입문이 열리며 반바지 차림의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 낯익은(?) 손짓이다. 헌데 이 추운 날씨에 반바지차림이라니…국가1급 지휘가 최룡국선생님과의 만남이였다.
대를 잇는 예술인가정
“왜서 반바지차림인가구요? 허허… 자, 이제 집에 들어가면 알겁니다.”
널찍한 집안은 과연 련며칠 한파가 정조준을 하고 있는 날씨답지 않게 후끈했다. 몇해전부터 실시해온 중앙난방덕이란다. 서재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결국 반바지를 찾았다. 곁들인 선생의 해석에 반갑게 맞아주던 사모님(최국화)이 악의없이 눈살을 찌프렸고 순간 사모님이 마주하고있던 출입문바람벽에 시선이 갔다.
달력옆에 멋지게 디자인된 리력서 한장이 곱게 붙어있었다.
‘피아니스트 최광’
“아들애랍니다. 독일만하임국립음악대학(德 曼海姆 立音 大 ) 피아노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요. 지금 심양음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있답니다.”
바이올린 전공의 녀자친구와 함께 설쇠러 부모집에 왔다가 며칠전 심양으로돌아갔다며 올해는 웨딩마치를 올려줄 타산이라고 했다.
“아, 그럼 예술인가정이네요.”
어마지두 탄성에 선생이 한술 더 떴다.
“그럼요. 집사람 역시 연변가무단에서 수석바이올린수로 있었답니다.”
“네에 ”
자연 탄성이 더 길어졌다.
“혹시 ‘최옥주’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무용가 최옥주선생님 그러셔요?”
우리 연변이 낳은 걸출한 무용가 최옥주선생,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자 사모님이 웃음을 지었고 역시 곁에 서있던 선생이 동을 달았다.
“집사람 언니랍니다. 친언니요.”
“아…”
그냥 입이 벌어졌다.
손풍금수가 지휘가로
집안 구석구석에 잘 챙겨놓은 악기들을 보면서 선생의 뒤를 따라 서재로 향하던 중 엉뚱한 호기심에 발목을 잡혔다.모든 악기에 똑같이 사랑을 기울이는 지휘가라지만 혹시 “그만의 악기”가따로 있지 않을가?
선생은 잠간 사색에 잠기더니 이야기 한자락으로 답안을 돌렸다.
“60년대에 연변예술학교를 다니면서 바이올린쪽으로 공부했어요. 그러다 문혁바람(문화혁명)이 불면서 민족화를 하라고 해서 손풍금으로 바꾸었구요…”
이후 67년부터 76년까지 연변가무단에서 쭉 손풍금수로 활약했던 선생은 당시 조선족가요계의 기리성들인 왕개평, 방초선, 김선옥, 박정자, 송대윤 등 가수들의 손풍금반주를 도맡았다. 악기가 귀하던 그 시절 선생의 손풍금반주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였고 따라서 선생의 손풍금반주가 시작되기만 하면 무대아래에서 우렁찬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렇게 뛰여난 손풍금수로 활약하던 선생은 1973년 가무단 악대 부지휘로 임명됐고 사숙해오던 안국민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대석두림업국 하향연출이 선생의첫 지휘인생의 시작이란다. 당시 지휘악곡은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였는데 악사들 중에는 박재원(바이올린), 강문국(첼로) 등 스승님들이 지켜보고 있어 더욱 긴장했다. 이마에 돋은 땀을 훔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지휘봉이 움직였고 찰나 “천군만마”로 악기들이 질주했다.
“히야, 그야말로 ‘쫠’ 나가는데 어찌나 놀랬던지 진땀을 다 뺐더랬습니다. 허허…”
연변가무단 지휘가 계보에서 제3대 대표주자가(제1대 정진옥, 제2대 안국민) 탄생하는 시각이였다.
시대와 호흡하는 취미인생
서재에 있는 선생의 컴퓨터 모니터에 창작중인 악보가 펼쳐있었다. 잠간 띄여보니 가야금, 새납 등 악기이름이 오선보 여러 소절에 한글로 자세히 표기돼 있었다. 창작중이였다.“79년 상해음악학원 작곡지휘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국내 저명한 지휘가들인마혁순( 革 ), 황효동( 同) 교수님을 모시고 체계적인 음악공부에 나섰지요. 그뒤 졸업하고 82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인생을 시작했구요.”
그해 여름에 펼쳐진 “자치주성립30돐문예회보공연”에서 선생은 우수지휘상을 획득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주(州)및 성(省)급상 30여차와 국가급대상을수차 수상하는 등… 1년 100여차 공연을 한번도 빠짐없이 보람차게 현역시절을 구가했다.
지난 2007년 명예롭게 은퇴한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허송하고’있는 퇴직생활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음악을 내놓고 뭔가 또 다른 ‘사랑’을 숨기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현역시절 ‘강태공’이란 애칭을 달 정도로 낚시를 즐겼는데 어느 하루 갑자기 싫어지더란다. 프로급 낚시군답게 어구도 구전했는데 그것이 해빛을 못본지가 어언 9년. 기호품으로는 골초답게 담배도 퍽 즐겼는데 역시 큰 리유가 없이 14년전에 끊었다고 했다. 금연기념으로 당시 남았던 담배 아홉가치와 라이타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단다. 운전면허는 2004년에 진작 획득했으나 운전에 관한 이야기는 슴슴했다. 그럼 진짜 ‘사랑’은?…
추억을 쫓다말고 컴퓨터에 마주앉아 그 무렵 기념사진을 마우스로 익숙하게 낚아내는 선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번쩍 답안이 켜졌다. 컴퓨터, 바로 저것이구나!
온복남 기자
프로필
연변가무단 전임 악대지휘, 국가1급지휘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
중국음악가협회 회원
연변음악가협회 부주석
연변주정치협상회 제7, 8, 9, 10기 위원 및 상무위원 력임
연변대학과학기술학원 겸직교수
1947년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
1966년 연변예술학교 졸업
1982년 상해음악학원 졸업
1994년 한국국립중앙극장 연수.
무극‘춘향전’한국방문공연시 내셔날심포니 오케스트라 객원지휘 담당
1998년‘98한국교향악축제’연변가무단 교향악단 지휘 담당
한국 KBS‘열린음악회’관혁악단 객원지휘 담당
한국‘제1회재외동포서울예술제’KBS교향악단 객원지휘 담당
2000년 한국 KBS‘가요무대’KBS관현악단 객원지휘 담당
2001년 연변가무단 창작오페라‘아리랑’(공동지휘), 무극‘춘향전’, 무용
시 ‘장 백정’, 음악무용시‘천년아리랑’, 기상곡‘나의 살던 고향’, 교
향곡‘신기한 장백산’등 많은 작품 및 음악회 지휘 담당
2009년 중화인민공화국성립60돐 경축 대형음악무용서사시‘부흥의 길’ 창작 에 참여
‘중국음악가명록’, ‘중국당대음악계명인대사전’등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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