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 곽운룡원장
수많은 지식인들이 어깨를 겨루며 구름처럼 몰려있는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 길림성에서 가장 큰 설계연구원으로 손꼽히는 이런 직장에서 말단설계원으로부터 시작해 최고의 일인자의 자리까지 오르는 사람은 몇%나 될가? 더구나 그 대상을 조선족으로 제안한다면 그 확률은 더욱 희미할것이다.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 곽운룡원장(50세)은 바로 이런 희소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거기에 그는 34살에 원장으로 부임하여 16년간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을 이끌어오면서 오늘까지도 직원들의 믿음과 사랑, 신뢰를 한몸에 받고있다.
기자와 마주한 곽운룡원장은 수수하면서도 편안한 말투와 표정, 무엇보다 소탈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처음 만남이지만 여러번의 만남 같은 익숙함과 후덕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그의 표정이 방금전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회사일과 관련된 이야기인듯한데 시스템을 조률하고 조직하는 그의 단호한 표정과 말투에는 리더로서의 또 다른 카리스마가 엿보이고있었다.
“네가 해낼줄 알았다”
1962년, 길림성 매하구에서 태여난 곽운룡은 어려서부터 총명한데다가 부지런하고 자기 주견이 뚜렷하여 부모님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평소에는 별로 말씀도 없고 웃는 모습조차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모든 면에서 모범생인 막내아들의 기특한 모습을 보고는 때때로 얼굴에 미소를 짓군 하셨다.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부대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가 억울함을 당하고 이렇게 농촌에 왔다는것을 들은후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운룡이는 아버지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무척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때부터 그림으로만 아니라 무언가 설계해서 실제적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이 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싶었다.
후에 철이 들어서야 그는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었고 수많은 혁혁한 공헌을 세웠던 아버지가 한차례 전쟁에서 상급의 지시를 받고 전투를 지휘하다 실패하게 되자 억울하게 군사법정에까지 서면서 당적까지 제명당하는 곤혹을 치렀다는것을 알게 됐다. 나중에 아버지는 무죄로 판정이 나 다시 당적도 회복하고 장교로 복직할수도 있었지만 모든것을 내려놓고 홀연히 농사를 짓기로 작심했던것이다.
1979년, 우수한 성적으로 길림건축공정학원에 입학하게 된 곽운룡은 그때로부터 또 다른 꿈이 생겼다. 하루빨리 당조직에 가입하여 로공산당원이였던 아버지의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드리고싶었다.
1982년, 20살난 곽운룡은 드디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 기쁜 소식을 하루빨리 아버지에게 전하고싶어 고향으로 내려갔던 그는 마을어귀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저 중국공산당 당원이 됐어요!” 아들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하던 아버지는 순간 아들을 와락 껴안으며 “네가 해낼줄 알았다. 네가 해낼줄 알았다”며 연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의 뜨거운 눈물앞에서 운룡이는 아버지품에 안겨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부자간이 흘린 뜨거운 눈물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아버지의 가슴속에 수십년간 맺혀있던 마음의 응어리를 삽시간에 녹아내리게 했다…
그때로부터 아버지가 했던 “네가 해낼줄 알았다”는 말 한마디는 곽운룡한테 “너는 꼭 해낼수 있다”는 마음속의 주문으로 되여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 같은 가능성과 숨은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어 더욱 꿈을 향해 도전하도록 응원했다.
말단설계원으로부터 회사의 일인자가 되다
1983년, 21살의 곽운룡은 우수한 성적으로 길림건축공정학원 토목공정전업을 졸업하고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에 배치받아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설계사가 됐다. 말단설계원이라 힘들고 어지러운 잡일들도 도맡아하면서도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수 있고 자기의 두손으로 무언가를 설계하고 만들어낸다는 자부심에 힘든줄을 몰랐다.
그는 실력으로 승부하기 위해 매사에 더 철저하고 두배 세배 노력했으며 언제나 제일 먼저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설계도면과 씨름했다.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즐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노력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하기에 근 8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의 호칭 뒤에 “1호설계사”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재능과 실력, 일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아 회사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인 계획관리부문으로 발령됐다.
계획관리부문에서 사업하면서 곽운룡은 회사의 미래를 내다보고 회사의 발전과 도약을 위한 여러가지 독창적인 아이템들을 제안하고 개발하여 더욱 두각을 나타내면서 1995년 부원장으로 발탁됐다.
당시 7명의 부원장가운데서 가장 젊은 부원장이였던 곽운룡한테 또다시 생각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설계원의 원장이 정년퇴직년령이 되여 퇴직하면서 원장임선은 무기명투표로 진행됐다. 무기명투표결과 곽운룡은 600여명 직원을 상대로 진행한 무기명투표에서 99%라는 높은 투표률로 새로운 원장으로 당선됐다.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 력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34살의 나젊은 곽운룡원장은 이렇게 회사 직원들의 두손에 받들려 탄생된것이였다.
“일벌레” 원장 “전문가” 원장
34살에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원의 일인자가 되여 16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원장직에 추대될수 있는 비결을 묻는다면 곽운룡원장은 “일벌레프로정신”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한다. 이 16년간 그는 자신이 한회사의 일인자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고 지낸적이 없으며 그렇기때문에 일벌레처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회사가 성장할수 없다는 강박관념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지금도 곽운룡원장은 제일 처음으로 원장으로 취임할 때의 심정을 잊을수가 없다고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여서 젊은 나이의 자신의 모든 정열을 불태우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온 자신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믿어주고 신뢰한다는 사실에 곽운룡은 한편 기쁘기도 하면서 두어깨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치렬한 경쟁가운데서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을 업계에서 인정하는 일류 설계원으로 이끌어가는것은 일이 아니라 일종의 사명감이였다.
그는 우선 시장경제시대 설계분야도 변화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나갈수 없으며 부단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않으면 업계에서 도태될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을 직원들에게 심어주면서 자신이 변화와 혁신의 앞장에 나섰다.
그는 회사의 경영전략을 석유화학공업분야의 설계를 위주로 하던데로부터 그 경영범위를 넓혀 대담히 새로운 대상에 도전했다. 특히 길림성은 국가의 상품식량기지이고 량식가공은 길림성의 기둥산업으로 떠오르고있다는것을 읽어낸 곽원장은 대담히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의 경영방향과 설계중심을 옥수수정밀가공에 돌리고 탄탄한 기술력과 풍부한 아이템으로 선후로 황룡, 신원, 대성 등 성내외 옥수수정분 및 알콜, 정분당 등 20여개에 달하는 정밀가공대상을 책임지기도 했다. 곽원장의 인솔하에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은 미국, 네델란드, 단마르크, 프랑스, 독일 등 외국의 회사들과 합작하면서 옥수수정밀가공에서 풍부한 경험을 축적하고 탄탄한 기술대오를 형성하였으며 각종 신기술 인증, 특허와 품질인증 등 공신력 있는 기술력을 다짐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옥수수정밀가공설계단위로 부상했다.
에너지를 합리하게 리용하고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보이라를 철거하고 집중열공급을 보편화하는것은 피할수 없는 대세임을 보아낸 곽운룡원장은 일찍 손써 시정열공급령역에 뛰여들었다. 그의 예산은 적중했다. 길림성내 크고 작은 도시에서 집중열공급에 대한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곽운룡은 연구원의 기술대오를 이끌고 장춘, 송원, 길림, 사평, 돈화, 백성 등 도시의 집중열공급공사를 원만하게 완수하여 집중열공급대상을 길림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의 또 하나의 기둥산업으로 떠오르게 했다.
곽운룡원장은 설계연구원의 본업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수시로 각 성의 화학공업설계연구원과 련계를 강화하면서 업계의 정보와 선진기술을 제때에 파악하여 선후로 길림화학공업그룹 30만톤에틸렌(乙烯)생산공사의 부타디엔(丁二烯)추출장치,안양공기분해시스템 그리고 대성합성암모니아, 듀표고성능페인트(장춘) 등 회사의 다양한 화학공업대상설계도 도맡아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을 당당히 이름에 손색이 가지 않는 업계의 1위로 만들었다.
매번 새로은 프로젝트에 도전할 때마다 일에 대한 무서운 집중력과 추진력으로 제안기획부터 출력까지 진두지휘를 하는 곽원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림한다. 하기에 그에게는 휴식일이란 따로 없다. 수도 없이 전국의 크고작은 도시들을 누비며 그 현장에서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체크하는 그에게 있어서 그런 출장걸음이 곧바로 휴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회사일로 드바쁜 와중에도 곽운룡원장은 설계연구원이 세계경제의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려면 회사의 일인자가 전문가여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2001년부터 길림대학에서 연구생공부를 시작했다. 2년간 석사연구생공부를 하면서 그는 세계경제에 대한 폭넓은 리해와 연구를 거쳐 그만의 색갈을 가진 경영원칙을 세워나가게 됐고 2005년에는 당당히 국가공인컨설팅(투자)엔지니어 자격증을 따냈다.
원장이면서 엔지니어로서의 시장을 보는 안목이 뛰여났던 그는 2년전부터 회사의 미래를 겨냥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는 회사의 비전을 위해 대담히 7500만원을 투자하여 성급생물화학공업연구개발쎈터를 설립함으로써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원을 설계와 과학연구가 공존하는 자기만의 색갈을 가진 기업으로, 과학기술혁신과 성과를 산업화로 비약시킬수 있는 발판으로 만들었다.곽원장은 머지않아 이 생물화학공업연구개발쎈터는 회사와 직원 나아가 사회에 수많은 "황금알"을 선사할것이라고 자신한다.
직원은 가족이다
곽운룡원장은 오늘의 설계연구원이 업계에서 인정받는 일류 설계연구원으로 성장할수 있은것은 지도부가 하나같이 단합되고 35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똘똘 뭉쳐 함께 울고 웃으며 분투한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곽운룡원장은 7명의 부원장으로 무어진 지도부성원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당부한다. 우리는 회사에 대한 전체적인 책임은 있지만 회사를 통채로 끌고 갈수는 없다. 우리가 손에 쥐고있는것은 “방향키”일뿐이고 실제로 배를 움직이는것은 직원들이 쥐여져있는 “노”라고…
곽원장은 또 설계원의 35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이야기한다. 직원들을 가족으로, 식구로 생각하는 곽원장의 이런 마음은 직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감동전략”이기도 하다.
회사의 엄격한 규정제도로 회사의 직원이 3일 이상 출근하지 못하면 인차 곽원장한테 그 사유가 전달된다. 곽원장은 이를 그저 스쳐지나지 않는다. 회사의 햇내기직원이 병으로 출근하지 못해도 그는 인차 지도부성원들을 이끌고 문명을 가고 직원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제일 먼저 찾아가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곽원장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되여 직원들은 회사에 대한 절대적믿음을 가지고 휴식일이 따로 없이 헌신적으로 일했다 .
곽원장은 또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에 대해 프로젝트별 성과급제도를 도입하여 직원들의 사기진작에 힘쓰는 한편 포상으로 국내 명승고적으로 휴가를 보내기도 한다. 해마다 대학입시와 고중입학시험이 끝나면 휴가를 가지 못한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연구원의 직원들은 곽원장의 인솔하에 장춘시의 시교에서 3박4일간의 단합대회를 가진다. 이렇게 3박4일이라는 단합대회를 통해 설계원의 직원들은 함께 자고 함께 먹으며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간의 정을 돈독히 하면서 화목한 한가족이 되여가기도 한다…
곽운룡원장의 따뜻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러한 리더십이 곧바로 오늘의 길림성석유화학공업설계원의 놀라운 파워를 만들어냈다.
16년간 원장으로 일하면서 오직 머리와 가슴속에 회사만을 생각하며 달려온 곽운룡원장, 그한테는 수많은 영예도 뒤따랐다. 길림성로력모범,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개인, 전국화학공업업종우수탐사설계 원장, 전국석유화학공업업종우수기업가(원장)…수많은 영예가운데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영예는 고향의 영예판에 걸려있는 곽운룡이라는 이름 세글자이다. 수년간 고향건설과 매하구조선족중학교에 물심량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그한테 고향인민들이 고마움을 담아 잊지 않고 적어놓은것이다.
고향뿐만이 아니다. 조선족사회에 대한 곽운룡원장의 선행은 연변에까지 소리없이 이어지고있다. 7년전부터 곽원장은 중국탐사설계협회 리사들과 함께 돈을 모아 연변의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고있는데 시초의 3만원으로부터 올해에는 15만원에까지 이르고있다…
30년간 한회사에 몸 잠가오면서 말단설계원으로부터 16년간 회사 일인자로 일해오면서도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달려온 곽운룡원장, 그의 정신적 모토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사업하는것이다.
그래서 “길림석유화학공업설계원에 맡기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고객들에게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가족 같은 직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회사를 더욱 알찬 기업으로 키워나가리라 다짐하는 그의 발걸음은 아직도 쉴줄을 모른다.
연변일보 장연하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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