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 열린 그 서예전에는 퇴역한 장성 여럿이 일시에 등장했다. 웬만한 서예전에서는 좀처럼 볼수 없는 희귀한 풍속도였다. 그들은 전시된 서예작품을 두고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그분을 여기서 다시 뵈는것 같구먼.”
진짜 글자마다 내남에게 모두 익숙한 거장의 자취가 비껴있었다. 자유분방한 글씨는 방불히 하늘의 룡이 꿈틀거리며 구름속에서 기어나올듯 했고 산속의 호랑이가 어흥 하고 수림에서 뛰어 나올것만 같았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늘과 땅을 삼킬듯한 도고한 기품이 파도처럼 용용히 사품을 치고 있었다.
일명 “모씨체의 글씨(毛体字)”였다. 모씨체는 모택동의 글씨체를 이르는 준말이다. 모택동은 공화국의 창설자로서 위대한 정치가, 군사가, 철학자이며 또 공인을 받는 20세기 걸출한 시인, 서예가이다.
정작 서예전에 전시된 모씨체 작품의 주인은 모택동이 아니었다. 모택동을 이번 서예전에 부활시킨것은 조선족장군 허용규였다.
군 복무시절 정이 들었던 탱크 앞에서 남긴 기념사진
장군의 새로운 장정
허용규가 서예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약 20년전의 일이다. 아니, 벌써 70여년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그의 부친은 붓글씨를 잘 써서 동네방네 소문을 놓았던 사람이였다. 그 무렵 연길 시내의 적지 않은 기관에서는 특별히 부친을 모셔다 기관 간판의 글을 쓰게 했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퇴역하던 1995년까지 허용규의 집에는 먹이나 붓이 없었다. 문방사보(文房四寶)는 옛말에나 듣던 훈장의 물품이였다. 그는 군복을 벗은후 오래동안 본연의 자아를 찾기 힘들었다. 그의 귀가에는 마냥 장갑차의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군 복역기간 대부분 장갑병 부대에 몸을 담고 있었던것이다.
허용규는 고사를 거듭하던 끝에 노인서예통신대학에 입학한다. 마음을 갈아 앉히고 심성을 닦는데서 서예를 따를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때부터 허용규의 앞에는 또 하나의 “군인” 세계가 나타났다. 그러나 허용규는 더는 장군이 아니라 이등병부터 신병 생활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붓을 따라 비뚤비뚤한 글씨가 선지(宣紙) 위에 기어 나왔다. 신병이 과녁에 연방 헛방을 날리면 그러랴 싶었다. 정말이지 바닥에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용규는 인터뷰 도중에 그가 제일 즐긴다는 모택동의 시 “칠률 장성(七律长城)”의 한 구절을 읊었다.
“红军不怕远征难, 홍군은 원정의 고난 겁내지 않거니
万水千山只等闲。 만수천산 넘는 것도 례사로 치네.”
산전수전을 겪은 로군인은 “만수천산”을 “례사”로 간주하고 있었던것이다.
미구에 책상머리에 비첩이 쌓였고 책상 아래에 연습지가 무지를 이뤘다. 날마다 따분하고 무료한 일과가 계속되였지만 더는 딱딱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였다. 글속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별다른 재미가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하루에 두세시간씩 서재에 박혀서 붓글씨를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낟알이 영글어 가듯 글씨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군인시절에 계급장을 올리듯 허용규는 어느덧 명실공한 서예가로 변신을 하고 있었다.
허용규는 처음에 해서(楷書), 예서(隸書), 전서(篆書) 등 다양한 글씨체를 연습했다. 이에 어느 정도 숙달되자 초서(草書)에 몰입했다. 초서는 서예의 대표적인 글씨체였고 또 서예인의 수준을 가장 잘 나타낼수 있는 글씨체였기 때문이였다. 와중에 선택한 게 바로 모택동의 글씨체인 모씨체였다.
“저희 군인들은 모택동주석에 대한 감정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모씨체 글씨를 선택하게 되었지요.”
모택동은 청소년시기부터 시와 서예를 몹시 즐겼다고 한다. 전쟁시기에도 그리고 바쁜 업무가운데도 시종 붓대를 놓지 않았다. 시와 서예는 그의 정신생활의 주요한 내용이였다.
현재 전국적으로 모체체 서예협회나 연구소(원)가 적지 않다. 그러나 모씨체를 제대로 옮긴 작품은 흔치 않다. 거개 모택동의 친필 글씨체와 비슷했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도 그럴것이 십중팔구는 글씨체의 겉모습만 흉내 내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솔직히 모씨체의 정수(精髓)를 그대로 싣는다는건 맨손으로 너럭바위를 옮기는것보다 더 힘들었다. 허용규의 몇몇 노전우도 모씨체를 연습하다가 도중에 포기했다고 한다.
“모씨체를 잘 쓰려면 미리 모택동주석의 시를 연구하고 력사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에 내재한 뜻을 글씨에 확실하게 전할수 있지요.”
허용규는 일부 난해한 시를 해독하고자 일부러 출판사에 가서 시와 관련한 자료들을 수집했다고 한다. 현재 그가 쓴 모씨체 작품은 모택동의 시와 글씨의 모양 “형(形)” 뿐만 아니라 뜻 “의(意)”까지 핍진하게 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서재에서 모씨체 글씨를 쓰고 쓰고 있는 허용규 장군
장군의 장정의 기록
말 그대로 장군의 생애는 “붓을 던지고 종군하다(投筆從軍)”라는 후한서(後漢書) 옛 이야기의 재현이 아닐지 한다.
그는 조선 함경부도 길주 태생이였다. 네살 때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고 연길 시가지 동쪽의 소영자에 정착했다. 해방을 맞은 불과 몇년후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고중을 다니고 있던 허용규는 16살 나이에 자진하여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던것이다.
허용규는 선후로 번역훈련대대와 탱크병 훈련기지 등에서 학습과 훈련을 하며 나중에 탱크사단에 배치되며 또 탄원에 의해 최전방 부대에 편입되였다.
“사실 부대에서 번역훈련을 받았지요. 이름이 전사지 총을 쏠줄도 몰랐습니다.”
허용규는 탱크를 올라타기는커녕 포탄을 나르는 등 허드렛일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서도 허용규의 활약은 눈부셨다. 전쟁이 종식되던 때 허용규는 3등공을 기입했고 조선 군공메달을 받았다. 조선에서 귀국할때 그의 어깨에는 벌써 중위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피비린 전장에서 직업군인으로 성장한 허용규의 가슴속에는 언제인가부터 장군이라는 이름이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었다. 그가 좌우명처럼 즐긴다는 모택동의 시 “륙반산(六盘山)의 한 구절이 새삼스런 대목이였다.
“不到长城非好汉。 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장부 아니어라.”
일단 시작을 하면 최고를 바라고 뛰는 집념은 그때부터 세상에 또 하나의 “장군”을 잉태하고 있었던것이다.
“장군이 되고 싶지 않은 병사는 훌륭한 군인이 아니지요.”
귀국한 얼마후인 1957년, 허용규는 시험을 거쳐 장갑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에서 그의 성적은 당연히 앞자리를 차지했다. 나중에 그는 장갑차 3급 운전수, 무선전신 능수 칭호를 획득, 졸업생 우수학생으로 선정되며 중앙군사위원회 장갑병 정치부 간부로 발탁되는 특혜를 받았다.
허용규는 “장군”이라는 이 군인 생애의 최고의 상아탑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계급장을 바꿔 달 때마다 이에 잇따른 공훈 이야기를 구구절절 옮기는건 진부하지 않을지 한다. 1995년 퇴역할때까지 허용규는 선후로 해방군 장갑병기술학교, 해방군 전자공정학원, 해방군 총정치부, 해방군 측량학원 등 학교와 부서를 드나들면서 마침내 어깨에 소장 금별을 달기에 이르렀다.
사실 신병으로부터 장군에 이르는 경력 자체가 하나의 “전설”이였다.
장군의 화려한 부활
퇴역후 새로 시작한 “장정”은 또 “군공메달”을 양산한다. 언제인가부터 허용규의 어깨에는 “금별”이 하나 둘 련이어 박히고 있었다.
중국장군서예원 리사, 중국로인서예연구회 연구원, 중국서예가연의회 서예가, 중국서예급별위원회 리사, 중국문인서예가협회 리사…
그동안 허용규는 수백점의 모씨체 작품을 창작, 그중 1백메터 두루마리에 옮긴 141수의 모택동 시사詩詞는 전대미문의 력작으로 전한다.
최근 허용규는 개인서예전을 개최했고 또 개인서예작품집을 2권 출판했다. 그의 작품은 해내외에서 각종 서예전에 참가했으며 그중 수십점의 작품이 금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미국과 브라질, 한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에스빠냐 그리고 대만과 홍콩 등 나라와 지역에 전시되였고 중국 국가도서관, 모택동기념관 그리고 여러 지방의 서원과 박물관에 소장되였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모씨체 글씨를 쓰는 행렬은 현재로선 어마어마한 군체를 이룰 정도, 그러나 진짜 군인으로의 “장군”은 단 2명뿐이라고 한다. 와중에 조선족장군 허용규가 들어있는것이다.
“일부 작품은요, 모택동주석의 가족들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옛 친인을 만난듯 허용규의 서예작품에 각별한 친근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하긴 시공간을 뛰어넘어 눈앞에 재현된 모씨체의 글씨에는 그제날의 모택동주석의 숨결이 깃들어있음에랴!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든 장군의 모습이 한결 돋보이는 순간이였다.*
김호림
예술세계 2013년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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