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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강효삼- 문학은 인간학이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9월9일 09시56분    조회:10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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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강효삼
 —"우리 민족 밑바닥의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다"

   시골 농군의 후줄근한 옷차림에 작달막하고 여윈 체구, 학교때 별명이 '오태(误胎)'였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로인이 있다. 그가 가는 곳이면 그만의 특유한 해학으로 웃음소리가 넘치게 하고 걸쭉한 육담이 오간다. 그에 또 술 한잔까지 곁들이게 되면 곁에 모인 사람들 모두를 똑 같은 촌로로 만드는 신기한 '마술'이 있는 사람. 인기는 어찌나 좋은지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시인이라고 한다.

  짜장 별 볼멋 없는 촌로인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아니한 신기한 매력이 있는 사람, 그것도 북방 문단의 사실주의 시의 코치인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강효삼시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시 구상을 익히고 있는 강효삼시인

1943년 출생, 1963년 2월 15일 흑룡강신문 '진달래문학세계'에 '봄이 나간 날' 이라는 시로 등단.

  동시, 시, 노래말가사, 수필, 등 쟝르의 작품 500여편 발표. 7인 시집 '칠색무지개', 시집 '먼 후날. 저 하늘 너머'와 아동시집 '봄비'가 있음. 윤동주문학상, 한국 문예시대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연변작가협회회원, 흑룡강작가협회회원, 현 흑룡강성 상지시 자유기고인.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은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운이 겹쳐진것이였습니다. 지금도 로임은 적고 사회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역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올해까지 문학인으로서의 50년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는 강효삼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문학인생을 설명하는 말이다.

  "문학은 내 인생의 강심제였다"

  강효삼시인이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된것은 소학교 4학년때를 들어야 할것 같다. 당시 상지시신화서점에서 '조기천시집' 등을 학교에 가지고 와 팔았는데 어린 그는 '시집이란 시집가는 책인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의 학교 랑송대회에서 강효삼은 조기천의 '조선은 싸운다'를 랑송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는 조선전쟁이 진행될 때여서 그때의 분위기와도 알맞았던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그는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되였다.

  소학교 5학년때 '봄바람'이라는 제목의 동시를 써서 교원의 칭찬을 받았고 교과서에 있는 '어린 시인' 이라는 글을 배우면서 문학을 지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중학교에 입학해보니, 당시의 상지조중은 문학 분위기가 농후하여 문학 지망생이 많았다. 하지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그는 그들속에 끼이기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당시 조선어문을 가르친 선생님이 많이 고무하여줘(박룡국선생님) 큰 힘이 되였다. 당시 그는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민간이야기도 정리하면서 점차 문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후 대약진운동에 회의를 가지고 불만을 표시했던 그는 학교에서 처분을 받고 중퇴하여 생산대에 내려가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당시 연수현 평안 성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다시 문학의 꿈이 살아나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 학교때부터 함께 문학을 꿈꾸던 김상봉씨(상지시 월성향 사람, 향토시인)를 만났다. 문학을 사랑하나 발표원지를 찾을수 없었던 그들은 문학동아리를 만들기로 하고 '송화강 문학청년 애호자 단체'를 만들었다. 강효삼이 부회장이 되여 문학 애호자들끼리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당시는 나라적으로 계급투쟁을 할 때여서 공안국의 비밀감시까지 받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래도 동아리의 규약 첫 머리에 '모택동문예사상의 위대한 붉은기를 내걸고'라고 써넣었기에 반혁명조직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으나 그후 이 동아리는 절로 해산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흑룡강신문에 강효삼의 첫 작품이 발표되여 액막이로 되였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였으며 그후 련거퍼 발표한 '공사의 처녀'라는 시는 당시 흑룡강신문사 문학편집이 한어로 번역하여 '흑룡강일보'에 발표하면서 의심이 해소되고 공청단 가입까지 비준받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전까지 강효삼은 꽤나 많은 글들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재미를 붙히게 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반당문예로선의 검은선'이라는 대자보가 나붙어 어렵게 고비를 넘겼고 그후 또 "문화대혁명은 문화에 대한 파괴"라고 불만을 토로한것으로 하여 하루 아침에 현행 반혁명으로 몰리게 되였다. 격리당해 투쟁을 받았고 교사대오에서 쫓겨났으며 리혼까지 당했다.

  그는 문학을 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있게 되였고 그때문에 교원대오에서 쫓겨 났지만, 또 문학을 했기에 다시 교원대오에 설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으며 후에는 상지시 하동향문화소에 전근하게 되였다고 말한다. 즉 좋아도 문학이요, 나빠도 문학인것이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가파로운 경사를 거듭하는 인생 그라프를 그려오던 나날, 그는 문학을 한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것이 강심제로 되여 어려운 나날을 버틸수 있게 했고 끝내는 볕을 볼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 문학을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였다면 중도에서 문학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강효삼시인은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고 말한다.

  강효삼시인은 1978년에 연변작가협회에, 1980년에 흑룡강작가협회에 가입했고 흑룡강신문의 국경15주년 맞이 응모에서 '시 노래불러라, 영이야' 가 3등상을 탔으며 또 그 작품이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타게 되였다. 그리고 그가 쓴 가사 '톱질타령'은 흑룡강성의 우수가곡 평선에서 2등상을 타기도 했다.

  하동향문화소에서 13년간 근무하던 시절 그는 인생의 황금시기를 맞이해 많은 글들을 썼으며 작가들을 양성하느라 하동향진달래문학살롱(상지진달래문학회 전신)을 만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효삼이 끝내는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만약 성과로 성공을 론하는게 아니고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했다는 점으로 성공을 론할 때 나도 가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문학을 할수 있어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강효삼시인이다.


젊은 시절 문우들과 함께 있는 강효삼시인(왼쪽 두번째)

"문학은 인간학이다"

  강효삼시인은 몇십년동안 문학을 하면서 문학이 바로 인간학이라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한다.

  "한때는 정치의 구미에 맞추느라 애썼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했지만, 문학이란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강효삼시인은 문학이란 고통받는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꼭 사회의 암흑면을 꼬집어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문학은 성실해야 하고, 문학은 참되여야 하며, 문학인이라면 글에서만 인간이 되여야 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되여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인생의 추구이자 문학적 추구라고 하는 그는 글을 쓸수 있는 날까지 우리 민족의 밑바닥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들을 보면 그의 문학적 추구와 인생적 추구가 들여다 보인다.

  강효삼의 시적 추구는 민족 공동체와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이 날로 상실되는 현실에서 회복의지와 발전 전망을 리얼하게 표현하는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예술성 추구를 홀시하는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작품은 역시 예술적으로 진미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고래희의 언덕에 올라선 로인이지만 아직도 배움을 추구한다. 그것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게 되고 시를 쓸수록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게 되기때문라고 말한다. 스스로 생활에 대한 철학적 깊이가 모자라고 시적 상상력과 시를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기능, 특히 현대적기교가 부족하여 이를 고치지 않으면 그냥 그자리에서 답보할수 있다고 하면서 시를 오래 써왔다는 자격 하나로 시단에 남아있기보다 부단히 모색하고 변신하여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이 되여보려는 노력으로 소위 '원로'라는 그 이름을 보존하고싶다고 말한다.

  "금년 들어서는 동서 고금의 책들중 내가 찾아볼수 있는 책은 다 찾아봅니다. 특히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기에 시집을 탐독하는데는 좋은 시라고 인정할 때는 그가 누구든, 지어 이름없는 초학자가 처음 쓴 글이라해도 내 '시공부' 수첩에 적어두고 몇번씩 읽고 또 읽는데 지금까지 여러 풍격의 시들을 적어두고 읽은 시공부책이 두텁게 네권이나 됩니다. 어찌하든 시공부에 전념해서 후세에 남길 명작은 쓰지 못한다 해도 독자들이 한번 읽어보고 두번 다시 읽고싶다는 그런 시를 단 한수라도 만년에 남겨보는것이 요즈음 들어 내가 절실하게 가지는 시창작의 소망입니다. 그것이 이제 남은 내 삶의 과정이자 추구입니다. 또한 배우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즐거움이며 그것이 산다는것입니다."

  이제 와서 문학이 무엇인가 고쳐 생각해봤다는 그는 문학은 일시적인 취미나 애호가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사업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바른 사랑, 명지한 철학, 깨끗한 량심, 허식 없는 열정, 끝없는 열정, 그리고 욕망과 진취심이 수요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쉽게 세상을 허무하게 볼수도 있겠지만 욕망은 필요한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특히 비록 이런 저런 비리와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세상이지만 역시 자연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자연속에 살고있는 인생은 아름답기에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마음으로 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싶다고 하는 강효삼시인, 그는 "아름다운 마음가짐이 없이는 시도 없다. 그리고 생활에 대한 포부와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시는 한걸음도 나아갈수가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단순해지고 열정스러워지고싶다. 그래야 끝까지 문학의 줄을 놓지 않을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물질 욕망이 팽배해지는 세월이지만 가난한 문학을 선택한것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내가 문학을 한것을 긍지와 자호로 간주하며 인생의 끝까지 드팀없이 갈것이다.

  한때 질병으로 인생을 마칠번도 하여 현재는 그 무엇보다 건강을 중요시하고 삶을 아끼며 사랑하는 강효삼시인이다. 문학적 탐구와 인간적 탐구를 동시에 진행하며 사는 날까지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문학을 분신으로, 세상을 뻗치는 받침대로, 죽는날까지 문학은 버릴수 없다고 말하는 강효삼, 그야말로 진정 '시인'이라는 두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흑룡강신문 채복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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