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김춘명의 영웅본색 들어본다
사적보고요청으로 김춘명은 전국을 기본상 다 다녀왔다 /자료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표창대회참석차 연길에 도착하기 바쁘게 투숙호텔에서 본지의 인터뷰에 응했다. 연변은 초행이라고 한다.
뉴스인물로 TV화면에서 눈에 익힌 김춘명의 모습은 무거워보이는 안전모, 안전화까지 무장한 전투복차림의 모습이 아니면 앞가슴에 공훈메달이 주렁주렁 번쩍이는 초록색 군복차림, 수상대에서의 찬란한 모습이였다. 기자와 오늘 마주한 김춘명은 160센치메터 정도의 작은 체구에 편안한 털실세타 실내복차림의 이웃청년 같았다. 편안하고 홀가분해 보여 보기 좋았다.
눈앞의 왜소한 체구의 청년과 소화전투장의 《화신(火神)》으로 불리우는 영웅 김춘명, 그가 투신한 소화 및 구조구원전장들, 세운 공, 지닌 영예를 잇달아 생각하긴 버거워보였다.
군에 입대한 18년간 김춘명은 3800여차의 소화 및 기타 위험구조전투 최전선에 뛰여들어 165명의 생명과 나라, 인민의 재산 수천만원을 구해냈고 그가운데서 1등공 1차, 2등공 4차, 3등공 9차를 기입했으며 공안부 전국소방부대 기술능수, 공안부 모범소방전사, 전국우수인민경찰, 중국청년5.4상장 획득자,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개인, 전국군민공동사회주의문명건설선진,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서 명명한 《뢰봉식소방전사》… 등등 이루 셀수 없는 영예를 안아왔다.
김춘명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고 전국인민의 영웅이며 본보기이다.
김춘명은 료녕성소방총대 본계시지대 명산구대대 특근반 반장에서 본계시지대 부대대장 겸 특근중대 중대장으로, 지금은 본계시지대의 부참모장직에 있다고 한다.
김춘명: 나는 예전에나 이번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로 선정되였다는 통지를 받은 지금이나 고마울따름이고 황송할따름입니다. 제일 하고싶은 얘기는 여전히 《감사합니다》입니다. 《길림신문》 등 이번 주최측에 의해 조선족의 《걸출인물》을 선발하기는 처음이라고 아는데 그속에 내가 들어있어 참말로 황송합니다…
기자: 그렇게 많은 영예앞에서 부담감도 없지 않지요?
김춘명: 있지요, 당연히. 분에 넘쳐서 부담스럽다는 생각이라고 할가요? 영예는 어디까지나 지난 일에 대한 긍정이고 앞으로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하면 크게 부담으로 생각해서도 안되지요. 계속 노력하는 힘으로 생각합니다. 《뢰봉식소방전사》영예를 포괄해 내가 수상한다는 그 자체에 대해 나는 내가 속해있는 부대의 일원 대표로 받았을뿐이지 내 개인의 영예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김참모장은 인민대회당수상대에만도 수차 오르신분이기에 혹은 국가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의 특별한 기억이나 감수가 있지 않을가요?
김춘명: 인민대회당 수상대에서 호금도주석의 접견을 6번 받았습니다. 《전국우수인민경찰》로 2005년 8월 제7차 전국공안전선영웅모범립공집체대표대회에 참가했을 때 그때 호금도, 온가보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은것이 나한테는 세번째로 호금도주석의 접견을 받은것이고 잊을수 없는 기억을 남겼습니다.
호금도주석께서 저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면서 《동무가 김춘명이지요. 우리의 소방전사, 잘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계속해 우리의 소방부대와 공안전사들 그리고 광범한 군인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길 부탁합니다. 또 새로운 공적을 세우세요... (你是金春明吧, 我们的消防战士,你做的好,辛苦了! 希望你继续为我们的消防部队和公安战士以及广大军人做好榜样,再立新功…)》 하고 친절히 고무해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줄은 너무 뜻밖이였습니다.
중앙TV에서 그날 전반 접견화면방송시간이 59초였는데 저와 마주한 화면의 방송시간이 30초를 점했습니다…
기자가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평선측으로부터 료해하고 장악한 김춘명의 전투차수는 1650차, 구조구출인원 65명, 립공기록은 1등 1차, 2등 2차, 3등공 8차였는데 알고보니 그건 2006년전까지의 수자였다.지금의 상응수치는 참전차수 3800여차, 구조구출인원이 165명, 생명과 나라, 인민의 재산 수천만원을 구해냈고 그가운데서 1등공 1차, 2등공 4차, 3등공 9차를 기입받았다.
기자:18년에 전투 3800차라면 거의 1일, 2일에 한차례씩 전투에 참가한셈인데 놀랍습니다. 특히 소방전사의 전투라면 당연히 소화전투로 리해되는데?
김춘명: 소방부대는무장경찰부대의 한가지 병종입니다. 공안기관의 중요한 직능부문이지요. 그래서 소방부대라지만 소방, 보위 그리고 사회위험구원구조직능을 리행하고있습니다. 거기서 우리 기층중대 같은데는 어찌보면 민간에서 말하는 《특종부대》 같다 할가요? 소방기능, 체능기능, 위험구조실전에 필요한 장비에 대한 료해, 사용훈련, 지역 안전정보데이터, 말하자면 건축구조, 교통, 수원관련 정보에 대해서도 장악하고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소방대는 불만 끄는것이 아니라 《급한일》, 《위험한 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구조구원에 나서야 하는 부대이고 무릇 백성의 수요에 복종하는 평범한 《복무병》이기도 하지요…
김춘명의 그 작은 체구는 입대 18년래 60메터 넘는 고공 기중기에서, 열길 깊은 우물속에서, 지하 6메터 아래의 갱도에서, 화염이 솓구치는 불바다에서, 홍수가 사품치는 물바다에서 천길 낭떠러지에서 , 고속도로사고구조현장에서… 언제나 가장 앞장에 섰고 날렵하게 관건적인 난제들을 잘 해결해냈다. 또한 신변전사들의 어려움, 길 가다 부딪치는 일, 불우이웃돕기… 무릇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외면한적 없다고 한다.
중앙TV방송에서는 그의 사적을 《특근반장》특집으로, 료녕성소방총대에서는 연극 《사병 김춘명》으로 만들어 방송했고 중앙선전부, 공안부에서는 《뢰봉식소방전사김춘명》 학습도서를 출판하였다.
기자: 김참모장의 사적들을 듣고보니 《불사조》, 《초인간》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늘 생명위험을 가까이하고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젠 편히 지내자는 생각은요?
김춘명: 전우들은 나를 《불의 신(火神)》이라고는 합니다. 전투에 맞닥뜨렸을 때에는 솔직히 죽음을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수차 구조작업을 마치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위험했구나》하는 느낌이 든적은 있었지요. 소화전장, 유독기체류출구조전장 등 전장에서 몇번은 《죽어》구급을 받은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는 나의 직업이라 생각하고 잘하자는 생각뿐입니다. 나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기자: 김참모장을 오늘에까지 밀어준 가장 큰 힘은 무었이라고 생각합니까?
김춘명: 우선 사람은 스스로에 떳떳해야 (要对得起自己) 한다고 봅니다. 떳떳이, 그리고 감사하며 사는 자세가 제일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떳떳이 산다는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과 통하지요. 최선을 다하면 후회없고 부끄러움 없이 떳떳해질수 있는거지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노력해 채우고 환경이나 조건을 개선하고 개변하려고 노력하느라면 주변에서 보내오는 관심, 방조는 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사랑의 힘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떳떳이 살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랑을 나눌줄 알고 보답할줄 아는것이 《감은》이라고 봅니다.
김춘명은 자신이 입대했을 때의 정경을 잠간 들려준다.
김춘명의 아버지는 김춘명이 5살에 병고했고 뒤이어 어머니는 춘명보다 2살 어린 녀동생을 어데론가 보내버리고 《가출》했다. 셈평이 좋지 못했던 고모네가 춘명이를 키워줬다. 그래서 춘명은 늘 빨리 커서 고모와 고모부한테 짐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효도하며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였다고 한다. 형편상 대학까지 갈 엄두를 낼수도 없고 또 참군하면 집부담부터 줄일수 있고 부대는 사나이를 단련하는 제일 좋은 학교라고 생각해 고중에 들어갔다가 중퇴하고 참군을 택했다고 한다.
체격이 너무 왜소해서 군대에 겨우 갔다고 한다.
고향이 상지시 어지조선민족향 창평촌인 김춘명은 크면서 한어를 못했다. 그래서 부대에 가서 찾아 든것이 《신화자전》이였고 신문이였다고 한다. 자전을 다 습득할 정도로 강련습했다고 한다. 글씨를 익히고 단어를 쓰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신문을 소리내 읽고… 그러다가 《웃기는 애》라고 소문나기도 했다. 한편 소방전사들이 알아둬야 하는 전문지식학습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입대후 4년만에 법률전과대학함수를 마쳤고 그뒤 부대에서 배려해주어 전국의 유일한 곤명소방지휘학원을 2년간 다녀 졸업증을 땄다. 김춘명의 대학꿈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한편 지금 소방부대에서는 김춘명이 자기의 실전검증을 거쳐 써낸 10여가지의 구원구조조작방법들이 사용되고있다고 한다.
체능, 기능훈련관 넘기에서 보면 정상훈련에도 따라가지 못하던데로부터 입대 2년만에 소방지대 체능무예시합에 나가 1등을 따냈고 그 뒤로 련속 1등 보좌를 지켰으며 입대 10년만에 전국소방부대무예복합경기(比武全能)에서 3등공을 기입받았다.
《별수가 있겠습니까? 남한테 딸리면 남보다 덜 쉬고 배로 노력, 그래도 안되면 가배로… 10배로 더 련습해야지요.》 한다.
1년 사이에 신 다섯컬레가 닳아떨어졌고 훈련복 두벌이 땀에 삭아 해여졌으며 줄사닥다리 두대가 훈련에 끊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사관이 군관으로 되는 길은 군입대후 해당 고등학교에 시험쳐 진학해 자격을 따는 경로, 표현이 돌출하여 부대서 추천해 고등학교에 진학해 자격을 따는 경로외 표현이 특별히 돌출하여 비준을 받아 직접 군관으로 되는 경로가 있다고 한다.
김춘명은 세번째 경위자에 속한다. 2005년, 입대 10년만에 사관으로부터 군관으로 되였고 오늘날의 부참모장직에 림했다.
기자: 청소년들에게 김참모장의 인생격언을 남긴다면?
김춘명: 나는 《큰일은 작은일들로 이루어진다(小事成就大事)》,《근면하고 성실하게 배우자(勤勤恳恳学习)》,《성실하고 착실하게 살자(踏踏实实做人)》란 말을 좋아합니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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