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놈들의 말꼬리에 머리태 끌리워 화형당한 최계옥렬사
건국 65주년 맞이 특별기획보도-《81년만에 공향에 돌아온 항일녀전사의 충혼》 제1편
조선인들이 비교적 집중적으로 모여 산 차조구(지금의 안도현 석문진)일대는 19세기말부터 항일의병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였다. 박영철선생의 외가집은 바로 차조구 동흥툰의 혁명세가라고 할수 있다. 박선생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때부터의 외가집의 항일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맞이가 큰이모 최기철, 그리고 외삼촌 최동호, 어머니가 외삼촌 다음이고 어머니 아래로 작은이모 최현춘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외아들 최동호를 조선 반일지사들의 계몽교육기지였던 룡정동흥중학에 보낸다. 학교때부터 외삼촌은 신문화운동에 용약 뛰여들었고 1922년에 졸업한후에는 중국공산당조직의 신임과 양성을 받아 항일유격대의 골간으로 활약하다 맑스주의교육을 더 깊이 받게 하느라 나중에는 쏘련으로 파견되여간다. 외삼촌이 동흥툰집에 드는 일은 점점 뜸해지면서 일본경찰과 그 앞잡이들은 외삼촌의 사진을 들고 찾아내려고 헤매다닌다. 놈들은 시집간 큰이모, 어머니한테도 툭하면 찾아와 으름장을 놓군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외할머니는 중공지하통신련락소의 지시를 받들고 산속 유격대에 옷감, 량식 등 물품을 구입, 운송을 해왔다. 이에 련루되여 외할아버지는 1925년 연길현감옥에 잡혀들어갔다. 외할아버지는 2년간 고추물주입 등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에서 지조를 잃지 않았다. 결국 열물을 토하는 위독상태로 출옥하게 되여 얼마후 세상을 뜨고말았다.
1930년 중공 연(연길)화(화룡)중심현위가 건립되였는데 큰이모부 즉 외할머니의 큰사위 최태훈은 중공연길현 선전부장, 조직부장으로 활약했다.(《최씨렬사비》에도 적혀있음)가문의 영향하에 작은이모 최현춘도 인차 유격대에 가입했다.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가 세상 뜬후 아예 집을 버리고 유격대에 있는 사위와 아들, 작은딸과 함께 조선인으로 구성된 연길현(지금의 안도현도 당시는 연길현에 속했음) 항일유격대에 들어간다. 외가집과 한마을에 살던 외할머니의 큰사돈 최희경(최계옥의 큰사위 최태훈의 부친)도 유격대에 있었다. 외할머니의 유격대입대 및 활동 이야기는 어머니한테서 들은바도 있지만 《최씨렬사비》에나, 외할머니의 렬사등록서류에도 간단하게나마 기술되여 있다.
최계옥렬사의 반쪽초상사진에 근거해 복구해낸 최계옥렬사의 초상화. /연변대학미술학부 최호걸 작
유격대에 입대할 때 외할머니는 이미 두 외손자를 본 55세 년장자였지만 혁명적 투지는 열혈청춘 못지 않게 끓어넘쳤다. 유격대에서 외할머니는 통신원으로 있으면서 유격대의 물자구입, 정보수송 등 임무를 맡고 유격대가 활동하는 차조구, 삼도구, 오도구 일대 산길을 수없이 오르내리였다.
우리 어머니는 본가집 온집식구가 투신해있는 유격대를 항상 동경해왔다고 한다.
1932년 여름의 어느날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오도구쪽 산속 유격대 밀영에 마차로 싣고간적 있었다. 신록에 가리워진 숲속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많은 유격대원들의 얼굴을 처음 봤다고 한다. 그속에서 그 많은 년세에 쉼없이 뛰고있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대단해보였고 가슴아팠다고 한다. 그날 어머니는 거기서 작은이모 최현춘을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모와 외할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추수》, 《춘황》투쟁를 비롯한 전투이야기를 들었으며 김일성, 《코대(림춘추)》 등 인물들의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공산당의 힘이 그렇게 크고 항일유격대조직이 그렇게 드세다는걸 알았다…》고 감탄했다. 다만 그 대오속에서도 외삼촌은 만나보지 못했다면서 어머니는 외삼촌이 《큰일 하는분이여서 만나보기 힘들었어. 늘 여기저기를 다니시는분이였으니까…》 하며 아쉬워하며 탄식하군 했다.
그해 일본놈들은 대량의 군경을 《간도림시파견대》라는 이름으로 연변에 증파해 대토벌, 대소탕을 감행했다.
1932년 10월 23일(어머니는 음력으로 기억) 재밤에 외할머니가 《투문재》(지금의 석문진거리)장에서 유격대의 동내의 30여벌을 마련한 큰 보따리짐을 이고 유격대가 있는 삼도만으로 가는 길에 동흥툰 우리 집에 들어선다. 산후병에 시달리는 우리 어머니가 걱정되고 돌이 막차는 나의 형님을 한번 들려보지 않고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결국 외할머니의 행적은 밟히고말았다.
우리 집에서 나가 삼도만으로 가는 삼도구 산중턱에서 일본경찰들과 그 앞잡이놈들에게 외할머니가 불행하게도 붙잡히게 되였다. (중평촌 중심마을에 일제 파출소가 있었다. 지금도 촌민들은 그 자리를 정확히 짚는다.)
행선지를 대고 《빨갱이》, 항일분자, 유격대원들을 불어내라고 놈들이 아무리 윽박질러도 외할머니가 입을 열지 않자 놈들은 외할머니를 묶어 수레에 실었다. 외할머니가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놈들은 외할머니의 긴 머리태를 수레의 풍채에 묶어버린다. 그렇게 울퉁불퉁한 산길을 근 1리나 내려왔다.
이때 중평의 조선인 악패 앞잡이 박락순이란 놈이 말을 타고 올라왔다. 그뒤로 중평골의 백성들이 길에 모여나왔는데 그속에는 우리 집과 한 마을에서 산 셋째삼촌 박치현(아버지의 셋째동생)도 있었다.
외할머니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듬으면서 《네놈들은 이 땅에서 쫓겨나고말것이다. 망하고말것이다…》고 소리지른다.
박락순은 말에서 내려 일본놈한테 뭐라 하고는 외할머니를 수레에서 끌어내려 아예 머리태를 매놓은 끈의 이쪽 끝을 자기가 탄 말꼬리에 맨다. 이윽고 이자는 말에 올라타고 채찍을 날린다. 할머니는 인차 말에 질질 끌려나갔다. 삼촌 박치현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얼굴을 돌릴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얼마 안 가 전신이 피범벅이로 되였다. 할머니는 실신한채로 동흥툰을 벗어나 박락순과 일본놈들이 만들어놓은 《형장》에 끌려온다. 거기에는 나무단들이 빙 둘러놓여져 있었는데 외할머니 말고도 외할머니의 큰사돈 최희경과 그의 두 전우(이름 모름)가 피투성이채로 묶여있었다.
놈들은 나무단을 더 올리고 불을 달았다……
우리 어머니가 이 가슴 찢어지는 과정을 우리 셋째삼촌한테서 들을 때는 이튿날 새벽이였다.
정신이 반은 나간채로 셋째삼촌과 함께 허둥지둥 《형장》에 찾아간 어머니는 재무지를 파헤친다. 타다남은 위장우에 치마띠꼬리가 보였는데 그것이 외할머니의 유해를 분별할수 있는 유일한 참조물이였다.
서리사람으로 된 우리 어머니는 그자리에 물앉아버린다…
삼촌은 삼촌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버린다.
어머니는 옷을 벗어 할머니의 유해와 띠꼬리를 감싸안는다.
《형장》북쪽 좀 뉘연한 자리에 어머니는 맨손으로 외할머니의 유해를 묻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느닷없이 창문지에 뚫려진 구멍을 발견하게 된다.
외할머니가 그렇게 놈들한테 들켰는가 싶어 어머니는《내가 좀 건강해서도,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안 들렸어도…》하면서 또다시 오열한다.
어머니는 그후 셋째외할머니(외할아버지의 셋째제수)한테서도 외할머니의 수난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셋째외할머니네 집도 우리와 다 한마을이였으니까.
셋째삼촌은 우리 형제들이 철이 든후 외할머니의 순난 전 과정을 말해준적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외삼촌과 작은이모랑 함께 혁명하던 가문의 친척집을 통해 외삼촌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으로 떠나갔고 이모는 동북항일련군에 편입돼 조선과 쏘련국경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리고있다는 소식을 들을수 있었다고 한다.
광복후 1946년초 작은이모 최현춘은 상급의 지시대로 동북항일련군으로부터 연변에 조선인간부로 파견되여왔다. 작은이모는 한동안 (1949년 3월 조선으로 나가기전까지) 연변의 부녀사업 주요책임을 맡고 사업하였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면서《꿈만 같았다》고 개탄했다.
그 때 작은이모는 중국공산당 동북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던 전우 려영준(해방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 원장, 부주장 등 요직 력임)동지한테서 외삼촌 최동호를 찾으려고 수소문했고 중공조직에서는 쏘련의 《쁘라우다》(쏘련공산당기관지)에 외삼촌을 찾는 글을 냈는데 여전히 소식이 나지지 않았다는 전달을 받았다고 가족에 알렸다고 한다.
역시 그해초 우리 집은 차조구 사득촌으로부터 연길로 이사왔다. 외할머니의 유가족으로 어머니앞으로 집을 배려받았던것이다. 큰이모네, 셋째외할머니네와 한 줄집에서 살게 되였다. 큰이모와 세째외할머니는 다 남편들의 유가족으로 집을 분배받았던것이다.
그때에야 서로 마주서 보니 두집 다 녀자들만 남아있었다. 큰이모네는 큰이모부 최태훈이 외할머니가 순직한 이듬해 신창동전투에서 일본놈들과 싸우다가 희생되였고 아들 최우는 당시 길동군정대학에 가고 집에 없었다. 셋째외할머니네는 셋째외할아버지 최봉일(외할아버지의 셋째동생)이 림춘추를 따라 항일하다 1931년 대토벌 때 희생(광복후 조선에서 렬사칭호 받음)되였고 셋째외할머니네 아들 최동만도 큰 이모네 아들 최우와 함께 금방(1946년 2월20일 )길동군정대학에 가고 집에 없었다.
우리 집이 이사와 얼마 안있어 《원쑤를 처결》하는 날은 오고야 말았다.
차조구일대에서 수많은 항일혁명자들과 무고한 백성까지 극악무도하게 살해한 박락순주구는 드디여 차조구에 설치한 심판석에 오른다.
《어머니와 혁명선렬들이 기다리던 광복은 왔으며 일본침략자들은 멸망하고말았다. 나는 정부와 인민을 대표하여 그리고 희생된 최씨가문렬사들을 비롯한 무수한 렬사들과 남아있는 그들의 가족을 대표하여 박락순주구놈을 처단한다. 인민의 공적인 너희들은 백번 죽어 마땅하다…》 하고 작은이모님이 심판대회에서 발언했다. 심판을 마치고나서 작은이모는 자신이 직접 권총방아쇠를 당겨 박락순을 시원하게 처단해버렸다.
그 경과에 대해서 우리는 어머니한테서 몇번 들었지만 연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셋째외할머니가 집에서 또 《그래도 너희 작은이모가 직접 자신의 권총으로 외할머니의 원쑤를 갚았으니…》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니 감회가 남달랐다.
내가 마흔에 들어서서 오래간만에 도문에 계시는 외가6촌형 최철석(정부공무원이였음)을 방문하면서도 외가집의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형님도 《물론 광복을 맞은후여서 정부와 사법쪽에서 일본놈의 앞잡이를 처단한거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니들 작은이모가 자기 어머니를 처참하게 살해한 박락순이란 앞잡이원쑤놈을 직접 권총으로 쏴죽였으니 속이 좀 내려가지…》 하며 외할머니를 너무나 처참하게 살해한 놈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그러다 《니네 작은이모 그때 연변전원공서(전칭은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광복후 공산당조직이 연변에 세운 정권대표기구)의 전원으로 있었다. 대단했지...》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내 손에 있는 충주최씨의 족보도 그 형님한테서 그때 정리해 받아가진거였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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