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연변인민》을 선률로 전국에 알린 작곡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4월17일 09시19분    조회:698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봉호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에 당선된 영광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켜주는 조선족인민들에게 돌리는 김봉호작곡가.

프로필

1937년 조선함경남도함흥시 출생

1941년 부모님들 따라 화룡현에 이주

1857년 화룡문공단에 입사. 배우, 부단장으로 사업

1963년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회원

1974년 길림성문화국 부국장

1978년 길림성음악가협회 부주석 겸 길림성문화예술련합회 위원.

1984년 북경에 전근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정치부 문공단예술지도, 창작원으로 사업, 중국음악가협회 제4기 상무리사

대표작:

무용음악작품《홍매송》, 《적비춤》, 가요《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 《붉은해 변강 비추네》、《당의 빛발 연변을 비추네》, 《금실북과 은실북》,《쫭족처녀》 (壮家妹)、《국기와 병사》、《장고야 울려라》、합창《장성의 노래》(长城畅想曲)등100여수의 작품이 국가급 및 성급상을 수상.

1980년 《아름다운 마음》(美丽的心灵)유엔아세아태평양지구음악교재에 편입, 장백산문예상(1985년) 수상

1986년《친선의 꽃》(리재린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년감상 수상,

1999년중국방송신가요금상 수상

2003년 정신문명건설 《5개1프로젝트》입선작품,

2005년장백산문예상 수상

2013년 12월 《붉은해 변강 비추네---김봉호음악회》가 연변에서 개최되였으며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에 당선

저작:  《당의 빛발 연변 비추네-김봉호가요집》(인민음악출판사 1982년), 《김봉호가곡선》(연변인민출판사 1989년), 《김봉호성악작품집(장춘출판사 1997년)》, 《아름다운 마음—저명한 작곡가 김봉호작품전집》(CD,민족출판사 1999년)

 

국가1급작곡가이며 조선족대표작곡가의 일원인 김봉호선생은 《연변인민》을 격졍의 선률로 전국 나아가 세계로 알린 저명한 작곡가이다.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에 당선되여 모처럼 연변땅을 찾은 그이는 조선족인민들의 변함없는 사랑에 못내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그만큼 그 역시 다함없는 사랑으로 고향과 고향인민을 노래하는 가요를 창작하면서 일평생 충직하게 살아온 조선족인민들의 자랑스런 《아들》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충성의 노래-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

사상감정이 없이는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지을수도 부를수도 없다. 1965년 김봉호선생이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한윤호 작사)라는 곡을 창작할 때는 전국적으로 모주석을 노래하고 공산당을 노래하는 열조가 끓어번지는 시대였다. 당시 화룡현문공단 손풍금수로 활약하는 그의 충성심 역시 남 못지 않았다.

70년대초 조선족마을에 내려가 농민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체험을 하고있는 김봉호작곡가(가운데).

1941년 그는 다섯살나는 해 조선함경남도 함흥으로부터 어머니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왔다. 화룡지역에 정착하면서 동네이웃들의 동정속에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성장한 그는 해방을 맞아 이 나라 이 땅의 어엿한 주인으로 되였으며 1957년 화룡현문공단에 입단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정열을 다바쳐 열심히 사업하면서 부단장직무까지 짊어지게 된다.

당시 한윤호선생으로부터 《붉은태양 모주석》이라는 가사를 받아들고 훑어보던 그는 흥분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가장 아름다운 선률로 모주석을 노래해야겠다고 작심하면서 가야금으로 착상을 무르익혔다. 20분만에 그의 마음을 담은 선률이 완성되였다.

이 노래는 어느덧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제목으로 연변의 곳곳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얼마 못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는 또 이 노래때문에 검문을 받게 된다. 전문검사조에서 별다른  부정이나 표절이나 없음을 확인한 뒤 1968년 중앙인민방송에 발표되면서 이 노래는 대뜸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민간문예가들로부터 민간음악을 청취하고있는 장면.

《…장백산아래 사과배 열리고 해란강반 벼꽃 피》는 연변은 대뜸 전국인민들이 한번쯤 와보고싶은 고장으로 떠오른다. 뒤이어 그가 창작한 《붉은해 변강 비추네》라는 노래 역시 《험산을 파헤쳐 보물을 캐고 강물을 가로막아 산에 올리는 》연변인민의 기개를 전국에 홍보하였다.

잇달아 김봉호선생도 유명작곡가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는 인민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사상감정을 깊이 수립한 기초상에서 시대적인 환경과 결합하여야만 창작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당년 1년치고 8개월은 조선족농촌에 내려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정감세계를 료해했고 보다 많은 민간음악과 접하면서 민족음악에 깊은 정취를 느꼈다. 그의 음악작품은 분명 짙은 민족특색을 띠고있고있으면서도 시대적분위기를 잘 살린데서 일종 신선한 매력으로 전국에 전파되였던것이다. 

정열의 노래- 《금실북과 은실북》

충성심 하나로 들끓던 시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적조류가 서서히 밀려오는 그때 1974년 김봉호선생은 길림성문화국 부국장으로 일터를 옮기게 된다. 창작대상이 달라졌고 창작폭이 넓어졌으며 관리대상이 생소하였다.

여러 소수민족들이 공통으로 접수할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기에는 우선 타민족에 대한 료해부터 앞서야 했다. 그들과 널리 교류하면서 깊은 감정을 쌓아야 했고 따라서 여러 민족의 음악특징을 깊이 연구하면서 자기 민족음악에다 타민족의 우수한 음악특징을 결합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기에 그는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개혁개방초기에 첫 작품으로 청결공을 노래한 《아름다운 마음》을 창작하여 보편적인 호평을 받게 된다. 그뒤로 《금실북과 은실북》(1980년)이라는 가사를 접하면서 참신하다는 느낌으로 정열의 펜을 날렸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청춘들이 매래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안고 활기차고 씩씩하게 분발노력하는 이미지를 선률속에 그려냈던것이다. 이 노래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설맞이공연무대에 오르면서 전국의 방방곡곡에 울려퍼졌고 나아가 기악곡과 합창곡으로 편곡되여 외국공연무대에까지 올랐다.

김봉호작곡가는 소수민족인민들의 생활과 정감세계를 료해하기 위해 변강산구로 자주 내려가 생활체험을 하였다. 

이 작품을 그의 풍격전환의 대표작이라고도 한다. 그 시기 그가 창작한 《쫭족처녀》(壮家妹), 《우리들의 집》(我们共同的家),《아름다운 마음》등 가요들은 전국적인 공명을 일으켰다. 그중 《아름다운 마음》(美丽的心灵)은 유엔아세아태평양지구음악교재에 편입되였고 장백산문예상(1985년)도 수상하게 된다. 이런 노래들은 또 중앙음악학원 민족음악교육 교학용으로 지금도 응용되고있다.

그가 쓴 론문《조선족음악과 이웃민족음악과의 상호영향과 융합》은 1991년 향항 제14기아세아예술절에 채용되였고 《나의 가요창작》등 12편의 문장은 련속《음악주보》《인민일보》 등 신문에 실렸다.

1984년 김봉호선생은 중국인민무장경찰부대 정치부 문공단예술지도 겸, 창작원으로 북경에서 생활하고 사업하게 된다. 그 시기 그는 중국음악가협회 제4기 상무리사로 활약하면서 일관하게 자신의 창작원칙을 견지하였다. 《음악창작에서 자기 민족 음악특징을 구비하면서 여러 민족 음악의 많은 형태를 장악하고 또 그것을 결합할줄 아는 그런 기질을 갖춰야만 수요에 따라 발휘를 잘할수 있다.》

그의 이런 음악원칙에 비롯되여 탄생한 음악들은 지역을 불문하고 보다 많은 대중들의 환영을 받게 되였으며 세월의 변천속에서도 갈수록 깊은 향기와 향수를 동반하게 되였다. 최근에도 장강이남 기업들에서는 공장의 이미지를 수립하고 로동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기업의 노래를 특별 부탁해오군 하는데 이로 하여 김봉호선생의 창작일정은 벅차기만 하다.

사랑의 노래-《장고야 울려라》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돐에 즈음하여 음악가의 심정은 경건해졌다. 몸은 비록 북경에 가있지만 마음은 하냥 고향 연변으로 향해있던 김봉호선작곡가는 뜻깊은 명절에 고향인민들에게 훌륭한 작품을 선물하고싶었다.

 

고향의 사과배꽃 사이길을 걸으며.

마침 조선족대중들이 가장 애용하는 전통악기인 장고에 관한 가사를 접하게 되였다. 장고는 힘을 싣고 흥을 돋우며 인심을 뭉치게 하는 《음악무기》이기도 하다. 그는 울렁이는 심정으로 펜을 잡고 《경쾌로운 우리 민족 음악 리듬과 음형에 현대통속음악의 요소를 결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창작하려고 밤에 낮을 이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돌을 맞는 경축행사장에서 《장고야 울려라》는 선률이 울려퍼지자 장내는 완연 격정과 환희로 들썽하였다. 절주가 생신하고 음악이 아름다우며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특징으로 이 노래는 재빨리 대중들속으로 파급되였고 향항, 싱가폴에까지도 전파되다.

중앙예술학원에서는 한국방문시에도 이 노래를 중요프로으로 선곡하여 공연무대에 올림으로써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2003년 중앙선전부 정신문명건설 《5가지 1 프로젝트》입선작품으로도 당선되였으며 1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하냥 조선족인민들이 즐겨부르는 애창곡으로 곳곳에서 메아리치고있다.

작곡가에게는 퇴직이 따로 없다. 1996년 직장에서 퇴직한 몸이지만 작곡을 생명으로 간주하는 김봉호선생은 쉴줄 모르는 열정으로 1,000여수의 작곡창작을 이어오면서 《중국가요계 휘황 20년》(1996년) 작곡성과상을 수상하였다.

지난해말, 그는 연변주당위와 화룡시당위에서 주최한 《붉은해 변강 비추네-김봉호작품음악회》에 고향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으로 엮은 17편의 대표작을 묶어 고향인민들앞에 선물하였다. 이어 그는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의 일원으로 선정되면서 고향인민들의 사랑에 목메도록 감격해마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답이런듯 그가 연변에 머무는 동안 여러 현시 과외창작들이 고향을 노래하는 가사를 지어갖고 겨끔내기로 찾아와 작곡을 부탁하자 고래희를 넘어선 그로서는 기력이 딸릴만도 하건만 고향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때건 무엇이든 달가왔다. 그는 그냥 밤을 패며 《화룡노래》《훈춘노래》《룡정노래》들을 지어냈다.

50여년의 창작생애에서 고향과 고향인민에 대한 사랑은 곧 그의 창작의 원동력이였고 대중생활과 생활실천은 곧 그의 창작원천이였으며 본민족 음악과 타민족 음악을 결합하고 전통과 현대를 아우름은 그의 성공비결이라고 일괄해본다. 그의 음악이 감미롭고 생활정취가 넘치며 심금을 울리는 감동과 시공을 넘나드는 생명력을 공유함은 이를 떠나 달리 리유를 찾을 길이 없다.

《중국예술가사전》(현대 제1분책), 《중국대백과전서》(음악권), 《중국당대문예예술명인사전》,《음악감상》,《중국공산당원명인사전》,《중국소수민족예술사전》등을 펼쳐보면 김봉호선생의 이름 석자와 함께 그가 이룩한 성과들을 한눈에 찾아볼수 있다.


길림신문 깅청수 기사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선족청년작곡가 박광춘 신미디음악회가 10월 28일 연변TV방송국 스튜디어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박광춘이 최근년간 창작한 새로운 가요와 음악작품들을 신미디음악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담아 표현하였다. “세상은 우리것이야”“청춘스타트”“오아시스” 등 17수의 음악으로 구성되였고 열정 사랑 찬미 등 세 부분...
  • 2005-10-31
  • 광복 60주년을 맞아 올해, 덕수궁미술관에서는 8월말부터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보통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제 강점기 중국 땅에서 화가이자, 고고학자, 나아가 혁명가로 활동하다 끝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 뼈를 묻어버린 한낙연(韓樂然)을 기념하는 ‘광복 60주년 기념 한낙연 특별전...
  • 2005-10-31
  • [원제:할빈시고려회관 안중근의거96주년기념좌담모임 소집] 2005년 10월 27일 10월26일 안중근의사 의거 96주년에 즈음해 할빈시고려회관은 안중근의사 기념좌담모임을 소집했습니다. 회의는 리민 전 흑룡강성정협위원회 부주석이 기증한 ,이란 글발의 휘호족자 두폭을 전달했습니다. 이날 모임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생애와 ...
  • 2005-10-28
  • 《퉁소마을》인 훈춘시 밀강향에서 태여나 자라 꾸준한 탁마로 중국 문화예술부상인 문화(文華)예술학원상 제2회민족악기연주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최민(25살)이다. 1993년, 훈춘시문화관에서 《퉁소마을》조성을 위해 밀강향에 퉁소 100대를 지원했다. 어려서부터 마을 로인...
  • 2005-10-28
  • 효자효녀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부모에게 효도하는 성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15세밖에 안되는 초중생이 학교로부터 '효자상'을 받았다. 그가 바로 상지시조선족중학교 초중 2학년 4반의 류춘길학생이다. 춘길학생은 학습성적도 우수하거니와 학우간에 우애단결하고 학교 각항 제도도 모범적으로 ...
  • 2005-10-27
  •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조선 국방공업을 이끌어온 시세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여난 연부위원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체코의 프라하공대를 류학한후 로동당, 정무원(현 내각), 국방위를 오가면서 조선 국방공업과 경제건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항일빨찌산 유자녀로 김일성 주석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
  • 2005-10-26
  • 1983년. 중국작가협회 길림성 분회 부주석, 상무위원회 위원이던 그는 베이징으로 전근한다. 이어 중국 작가협회에서 발간하는 '민족문학'주필이 된다. 그때만 해도 조선족은 북경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5년 만에 베이징 호적(시민)이 된다. '베이징 시민'은 특혜였다. 조선족으로는 처음 베이징 명예시민이 된 것이다. 등...
  • 2005-10-26
  • [원제:《천리를 말 한필로 달리다》호평속에 다카쿠라켄 장예모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제18차동경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오른 영화 《천리를 말 한필로 달리다》는 장예모감독과 다카쿠라켄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개막식에서 이 작품은 세계영화인들과 일본관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편의 중국영화...
  • 2005-10-25
  • [원제: 중국조선족항일사 연구하는 만족당사학자-조문기] - 다련래 조선족항일사에 관한 저서, 론문 대량 발표 다년간 신빈현 당사지방사연구판공실 주임직을 담임했던 조문기(만족 57세)씨는중국조선족항일사연구에 조예가 깊어 중국조선족사회는 물론 한국에도 꽤 알려졌다. 조문기씨가 중국조선족항일사에 관심을 가지기...
  • 2005-10-25
  • 중국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정률성선생(1914~1976)의 출생지와 관련, 현재 한국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은 한국 광주남구의회 유 순남 의원이 지난 17일 정률성선생의 호적과 화순 능주소학교 제적부, 정률성아버지 정해업씨의 토지소유대장자료 등을 토대로 정률성선생의 출생지가 화순이라고 주장하면...
  • 2005-10-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