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중국작가협회 길림성 분회 부주석, 상무위원회 위원이던 그는 베이징으로 전근한다. 이어 중국 작가협회에서 발간하는 '민족문학'주필이 된다. 그때만 해도 조선족은 북경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5년 만에 베이징 호적(시민)이 된다. '베이징 시민'은 특혜였다. 조선족으로는 처음 베이징 명예시민이 된 것이다.
등소평 개혁개방이후 각 서으이 조선족 기업인들이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에게 와 '도움'을 청했다.
"메이징에서 조선족이 발붙이긴 정말 힘들었죠. 소도 비빌 언덕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는 1986년, '북경 조선족 기업가 협회'를 결성, 회장이 됏다. 조선족들에게 '등 떠밀려'된 것이다. 몇 번인가 회장을 고사했지만 아직도 회장이다. 중국 정부의 제의에 따라 여러 조선족 단체는 '베이징 고려문화 경제 연구회'로 통합된다.
해외동포단체는 그ㅏ를 OKTA 부회장으로 추대했다. 1998년이었다. 그는 현재 차관급 대우를 받고 있다. 승용차와 운전사. 아파트, 기름 값, 전화, 심지어 주택까지 제공받는다.
김 철. 그는, 조선족의 이민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조선족을 대표하는 중국중앙정부의 '문학일꾼'이다. 중국작가협회 중앙위원, 중국기업문화촉진회 KOREA문화경제연구회 회장, 세계문화교류협회 중국본부 총재, 중국 안중근 사상연구회 총회장 등 직함은 수두룩하다.
이제껏 시집 30권르 출간했다. '동틀 무렵''샛별전''뻐꾸기는 철없이 운다''동풍 만리'등. KBS해외동포리포트에 그는, 1시간 동안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시는 한민족의 바탕을 육화하는 한편 이민시의 특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겨울이면/외로운 햇볕이/댓돌에 홀로 앉아 기다리다가/저녁 짓는 아낙네들/물동이에 담겨 재 넘어가고…."
(시'고향3'중에서).
민족 토착 언어의 복우너에도 애착을 보였다.
"황토 고원이 지어 온/옛말 농사는/할배의 댓진에/누우렇게 절었다. 옹이진 대추나무처럼/못나디 못난/그래도 옛말은 어거리 대풍/쿠새 묵은 그 속에서/뿔난 호랑이가 담배를 묵고/천년 묵은 백여우가 둔갑을 했지.."
(시'황토 고원'중에서)
노태우 민정당 때, 그는 한국 국회에 가서 말했다.
"나는 국제적 유랑아다. 한평생 외국을 떠도는'또바라기(떠돌이)'다. 내 인생은 내 조국, 우리 민족의 수난사다."
글/서병욱 작가 편집장
사진/최금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