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어깨에 걸쳐멘 카메라와 평생을 길동무한 촬영가 황범송은 《사진보도》로 유명한 원로촬영기자이다. 그는 선후로 연변일보사, 연변박물관, 연변주당위 정보처, 비서처, 보밀실 등 부문에서 사업하면서 무려 3만여점의 사진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 사진자료를 창작해내고 수집, 정리하여 연변의 촬영예술을 발전시켰는가 하면 우리 력사의 견증인으로서 후대들에게 허다한 자료들을 남겨주었다. 그는 2008년 개혁개방 30돐을 기념하면서 펼쳐진 국가급평의에서 상을 따내면서 뛰여난 촬영예술가로서의 품위를 또 한번 립증했다.
사진기 매력에 흠뻑
1930년 7월 왕청현 태생인 그가 사진에 대해 흥취를 가지기 시작한것은 하마탕향우급학교를 졸업하던 해, 바로 13살 소년시절이였다.
졸업식을 앞두고 졸업사진을 찍으러 카메라를 메고온 사진사를 보는 순간 그는 사진기에 무한한 관심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카메라는 흔치 않은 신비스런 물건이였다.
당장 사진기를 마련할수는 없었지만 꿈을 하루빨리 이뤄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그는 대도시 사진기술을 배울 욕심으로 무작정 집을 떠나 도보로 30리 떨어진 대흥구로 향했다.
기차역까지 나갔지만 돈이 없어 기차표를 살수 없게 된 그는 서서히 움직이는 목단강행 렬차를 바라보며 마음을 접는것밖에 없었다.
그후로 2년후 고맙게도 일본 도꾜의 오렌따학원에 류학을 가서 4년간 사진을 전공한후 연길에 돌아와 사진관을 차린 김모웅선생이 나어린 그를 조수로 받아주었다. 간난신고끝에 꿈을 실현할수 있는 지름길을 더듬어낸 황범송은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사진기술을 열심히 배우는 한편 시간만 있으면 선생이 대학에서 배우던 교과서를 뒤적이며 그 내용들을 밤낮으로 외웠다.
그의 스승 또한 한가지라도 더 배우지 못해 아글타글하는 꼬맹이가 대견해 모든 기술을 다 전수해주기에 최선을 다하고 애지중지하는 서적까지 몽땅 물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많은 지식을 장악하고 독립적으로 사진작업을 할수 있는 기술수준을 구비하게 되였다.
원로촬영가 황범송선생의 최근 모습
《운도 따른》 사진기자
16살때 전선원호사업에 참가해 카메라를 메고 돈화, 라법, 신잠, 소구자, 로일령, 륙도하까지 갔다온 황범송선생은 그후 연길시공급판매합작총사 촬영부에서 사업하다 1952년부터 《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의 전신) 촬영기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황범송선생은 연변에 오신 중앙지도자들의 시찰장면을 렌즈에 담을수 있는 영광을 누린 《운 좋은》 사진기자이다. 그동안 선생은 선후로 주은래, 주덕, 동필무, 박일파, 하룡, 류백승, 륙정일, 호요방, 등소평, 강택민, 리붕, 양상곤, 만리, 팽진, 교석, 주용기 등 부총리 이상급 당과 국가 지도자 50여명의 빛나는 형상을 촬영하여 연변사책에 올렸다.
모처럼 연변에 시찰을 내려오는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가까이에 모시고 사진촬영을 할수 있는 행운은 어느 사진기자에게나 다 차례지는것이 아니였다. 그만큼 번마다 보다 멋진 장면을 렌즈에 담는것이 수행사진기자의 《욕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촬영기자는 연출이 아니기에 때로는 머리속에서 오래동안 구상해온 장면이 형성되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란다.
《발 빠른》사진기자
1983년 8월 등소평동지가 장백산에 오르실 때에 있은 에피소드이다. 등소평동지가 수행인원들과 합영을 할 때까지도 리상적인 장면을 찍지 못한 선생은 안타까운 마음에 조남기동지의 곁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옆구리를 다쳐놓고는 옆으로 빠져내려갔다. 선생의 의도를 눈치챈 조남기동지가 최림동지와 함께 등소평동지의 신변에 다가가 장백산개황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때라고 선생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 감격적인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이리하여 심원한 력사적의의가 있는 예술적화폭들이 나오게 되였는데 이 사진은 선후로 전국의 20여종 간행물에 발표되고 《등소평문집》에도 수록되였다.
강택민총서기가 1991년 1월 연변시찰을 오신 이튿날 훈춘에 다녀오는 걸음에 룡정 동성용 룡산촌 조선족농민가정을 방문했을 때였다. 강택민총서기가 박만수농민네 집으로 들어갈 때 경위원들이 이 집은 신화사기자만 들어가기로 돼있다면서 지방기자들을 접근못하게 단속해 나섰다.
총서기께서 연변의 보통농가를 찾아 농민들과 무릎을 마주한 장면을 놓칠가봐 너무도 안타까와 안절부절못하는 황범송을 보고 옆에 서있던 장덕강서기가 《황동무, 앞질러 찍어야 할 장면은 앞질러 찍으시오!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두둔해주었다. 그 말에 사기가 높아진 그는 경위원의 말을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강택민총서기가 조선족농민 박만수네 집에 들어가 신을 벗고 조선족구들에 앉는 장면, 농민들과 친절하게 담화하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련거퍼 샤타를 눌렀다.
그때 만약 이런 장면들을 앞질러 찍으라고 장덕강서기가 두둔해주지 않았다면 지방기자의 체면을 차려야 한다고 했던 경위원들의 단속에 억눌리워 연변력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찍을수 없었을것이라며 감개무량해하는 그는 지금도 그때의 뿌듯함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강택민총서기가 조선족농민가정을 방문하는 사진은 지방의 여러 신문잡지에 실렸고 중앙당간행물에 실려 국가급2등상까지 받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이밖에 그는 연변에 들려간 외국지도자들의 모습도 렌즈에 많이 담았는데 조선지도자 김일성동지가 도문에 들렸을 때는 사진을 멋지게 찍었다고 칭찬을 받고 그후 초청에 의해 평양을 방문하는 향수를 누리기도 했다.
샤타로 탄생시킨 력사의 순간들
1954년이래 황범송은 장백산에 300여차 올라 천지만 해도 100장 찍었다.
50년대부터 장백산을 수백차 오르내리며 천지를 찍기는 했지만 천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찍혀나왔다고 할만한것이 없었다. 기술적으로 분석해보니 높은 봉에 올라서 사진기를 좀 더 앞으로 내밀면서 천지의 전경을 렌즈에 담지 못한것이 주요원인이라고 판단한 그한테 뾰족한 수가 떠올랐다.
천문봉은 해발 2670메터로서 장백산 동쪽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천지의 푸른 물을 둘러싼 련봉이 한눈에 안겨온다. 그러나 나무 한대, 풀 한포기 없는 험한 바위우에서 몸을 앞으로 더 내밀수 없었던터라 바줄을 허리에 둘러매고 좌우켠과 허리뒤에 당김줄을 한가닥씩 매고 뒤에서 바줄을 바싹 당겼다. 두손에 사진기를 들고 한걸을 더 나가서 바위에 엎드려 반신을 앞으로 허공에 내밀고 뒤에서 세사람이 바줄을 당기고 두사람이 다리를 눌렀더니 직선거리가 근 500메터 되는 천지의 수면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였다. 그는 련봉속에 고인 천지를 폭넓게 렌즈에 담아서 샤타를 련거퍼 눌렀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작품《장백산천지》는 국가 교육부, 수리부에서 지정한 《천지표준상》으로초고중 교과서에 올랐고 1990년 《한국장백산천지평의회》 금상을 받아안았다.
사진촬영도 여느 사업과 마찬가지로 달인이 되여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 디지털사진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촬영장면을 포착하기에 앞서 한개 장면을 무더기로 뽑아내 고작 한두장을 고르는데 이렇게 북데기속에서 너른 마당을 쓰는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단 한번의 《찰칵》으로 정품을 뽑아내는 실무를 련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변박물관에서 사업했던 그는 10년간 찍었거나 수집복제한 사진자료 3만여장을 력사자료로 보관해두었고 1983년부터 1997년까지 연변주당위 촬영기자로 사업하면서 2만여장의 사진자료를 만들었는데 자택 《사진창고》에서 불과 몇십초사이에 수요되는 사진을 제꺽 찾을수 있으리만치 5만장을 웃도는 사진들이 질서정연하게 보관되고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통신망이 발달한 전자시대이기때문에 이제 《사진창고》관리를 컴퓨터화해야 하는것은 번연한 리치라고 말한다.
모택동주석이 두루마기를 받아입으신 장면의 원판사진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과의 조선민족 관련 사진은 물론 30년대에 레닌이 조선독립군 장령들을 만나준 귀중한 력사사진 원판을 망라해 그가 소장하고있는 전부의 력사적가치가 있는 사진자료는 조선족사회에 길이 남을 문화적재부이다.
알아본데 따르면 황범송선생이 촬영, 수집, 복제한 사진가운데서 3500여점이 선후로 《연변문물전람》, 《전국소수민족전람 조선족관》 등 대형전람에 전시되였고 1000여점이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 등 책자와 화책에 수록되였다.
그동안 여러 급별의 작품평의에서 묵직한 상들을 따내고 《중국 연변》, 《중국 제1자치주 연변》 등 작품집(화책)을 출판한 선생은 또 주덕해, 조남기, 리덕수, 장덕강 등 동지들이 연변에서 사업하실 때의 모습을 담은 화책들을 7권이나 출판했다.
이제는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 하지만 황범송선생의 사진기와의 즐거운 산책은 계속된다. 평생 루적한 사진자료들을 정리해 륙속 화책으로 만들어낼 한장한장의 소중한 추억거리를 매만지며...
황범송 프로필:
1930년 왕청현 배초구진 팔과수촌 출생
1952년 동북인민조선보 촬영기자
1955년 연변일보 촬영기자
1972년 연변박물관 촬영사
1979년 민족대단결전람 《중국조선족관》사진담당
1982년 연변인민혁명투쟁사전람 사진담당
1984년 연변주당위 촬영사
1997년 화첩《연변조선족력사》,《장백산유람》 등 6부 출간
2007년 화첩《장덕강》,《조남기》,《리덕수》,《주덕해》 등 6부 출간
현재 중국촬영가협회 회원, 연변촬영가협회 고문
주요영예
1972년 사진작품《계급교양계렬사진》 동북3성 예술사진전람회 우수상
1975년 사진작품 《새싹》 동북3성촬영전시회 1등상
1982년 사진작품《중국조선족소년아동》 일본 전시
1986년 사진작품 140점 미국, 카나다 전시회 전시
1990년 사진작품《장백산천지》서울 천지촬영콩클 금상, 국가교육부 지정《천지표준상》, 초고중 지리교과서에 편입
1994년 사진작품 《민속》,《가을》,《구름속에서》중, 조, 한 예술촬영전시회 전시
1995년 사진작품《농악무》 중국예술계명인작품전람 우수상
1996년 사진작품《수확》,《민속춤》 제3차중국촬영예술계전람 우수상
2007년 론문《촬영예술에는 중국민족특색이 있어야 한다》《중화유명전문가 종신성과총서》1등상
길림신문 김영화기자 /사진제공 황범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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