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길림대학 물리전공 박사학위 획득
1993년-1995년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 마침
1997년-1999년, 2000년 독일메인즈(Mainz)대학 물리화학소에서 유기결정구조 연구
2004년-2005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 방문학자
현재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 연구원 겸 박사지도교수
1999년 중국과학원“백인계획”입선
1995년 길림성 교육위원회 과학기술진보 1등상
1995년 전국고압학술회의 우수청년론문상
2002년 교육부에서 추천하여 국가과학기술상 자연과학 1등상 수상
2010년 호남성 자연과학 1등상
명랑한 말에는 밝은 진동이 있다고 안존한 용모와 달리 그의 말에는 마치 한잔의 탄산수마냥 톡 쏘는 상쾌함과 그만의 색채가 묻어났다.
“독서보다 텔레비죤을 훨씬 좋아해요. 스크린을 통해 소리도 듣고 움직임도 볼수있고 많은 지식은 책보다 텔레비죤을 시청하면서 배운거예요.”조용하고 한적한 곳보다 사람이 북적대고 시끌벅적한 일상에 머물기를 즐긴다는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소 연구원 겸 박사지도교수 우일성(51세), 물리에만 골몰하는 수재형 사나이인줄만 알았는데 반전스럽게도 그의 섭렵은 넓었다.
“영화‘소림사’때문에 어려서 무술을 동경해왔어요. 그러다 83년 길림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면서 압형권(鸭形拳)을 배울 기회가 생겼고 한동안 무술에 흠뻑 빠졌죠.”
버거운 실험연구와 학습과정에서도 우일성 연구원은 배구, 롱구 등 구류운동은 물론 한동안 권투를 즐겼고 독일에서 테니스도 배웠다고한다. 한사람의 일생을 오래 두고 보면 살아가는데 진정한 가치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할수있는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요즘 졸업, 취업을 앞둔 많은 청춘들이 성장의 아픔을 겪고있는데 대해 그는“알다싶이 선택이 운명을 결정해요. 인생의 파도를 헤가르면서 새로운 수역에 진입하려면 좋아하는 일을 찾아하세요. 그러면 후회가 없죠”라며 간단명료하게 조언했다.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음악을 배우고싶다며 처음으로 의향을 밝혔을때 깜짝 놀랐어요. 석사공부는 대학 전공과 완연히 다른 작곡의 길을 걷고싶다고하니 부모로서 망설였죠. 하지만 되돌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일을 할수있다는것이 얼마나 행복한 과정이겠는가싶고, 결국 선택을 존중해줬어요.”세상에는 가족이란 이름만큼 따뜻하고 포근한 보금자리가 없다는것을 우일성은 잘 알고있다.
길림 반석시 명성진의 한 의사집안 아홉 형제중 막내로 태여나 형님, 누나들의 보살핌아래 그는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부모들은 환자 돌보느라 분망했지만 그들의 가르침만은 여직껏 생생해요. 어머님이 늘 입가에 달고 다녔던 말이 있었는데‘쇠 먹은 띠가 안썩는다’고 재간을 배우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든든한 능력을 키울수 있다고 가르쳤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생, 박사까지 포기 모르고 한우물만 판데는 부모들의 영향이 컸어요.”
고중 시절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집안사정이 넉넉치 못해졌지만 자식교육만은 끝까지 밀어줄거라는 어머니의 끈질긴 집념때문에 그는 공부에 올인할수있었다. 우일성은 선후로 길림대학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중국과학원 물리소 박사후를 따낸후 1997년-1999년, 2000년 두차례 독일메인즈(Mainz)대학 물리화학연구소에 머물러 유기결정구조에 관한 분석연구를 다그쳤다. 그중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1999년 중국과학원에서 가동한“백인계획”에 입선되여 물리학자를 향한 힘찬 원동력이됐다.
“학술의 길을 걸으면서 권태기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한번에 피로가 확 밀려올때 있어요. 또한 시대의 변화도 빠르다보니 주변에서 다양한 제안도 들어오고 선택도 많았어요. 그러던 와중에 내가 초심을 잃지 않았던것는 내 마음이 가리키는대로 선택했기때문이죠.”갈래갈래 기로에 설때마다 우일성 연구원은 자신을 고취시키고 흥분시키는 일을 희망했고 무엇이 자신의 가치를 유용하게“느끼게”하는지를 되새겼다.
“음악을 좋아해요. 가난했던 시절 하모니카를 혼자서 배워불고 대금도 저절로 습득해서 즐겼어요. 억겁의 세월속에 인간의 생명은 찰나에 불과해요. 책임지고있는 일외에도 다양한 거리를 즐길수 있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가요? 충분히 용기를 북돋아 새로운 시도와 배움에 도전해보세요.”말쑥하게 차려입은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학술에 능하고 머리숙여 물리연구에만 전념하는 교수로 비춰질거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생활을 남다르게 해부하고 재조합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두손으로 꿈의 계단을 쌓아왔고 탐색을 견지하는 우일성 연구원, 오십 지천명이라지만 이채로운 연구를 엮어나아가고 더 많은 독창적인 기여를 할때까지 새로운 발견을 꾸준히 이어갈거라는 마인드를 드러냈다.
연변일보 글·사진 리명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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