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방송국 기자의 취재를 받고 있는 권오용 박사(오른쪽)
<진찰과정에 가끔씩 조선족 환자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복건성 하문시 장경병원 안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권오용 의학박사의 말이다. 2010년 권오용씨는 일본 야마구지 대학에서 의학박사과정을 마치고 7년째 하문에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다.
자랑스런 농민의 아들
권오용씨는 1979년 길림성 영길현의 한 평범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렸을때 부모님은 비교적 엄한 분이였습니다. 항상 저한테 모든것은 본인한테 달렸다는 말씀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우선시하게 되였던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그는 이름난 노력파였다. 모르는것이 있으면 찾아 물었고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권오용씨는, 사실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데는 특별한 리유가 없다고 말했다.
<대학입시때 지망을 쓰고보니 우연잖게 전부 의과대학에 지망하게 되였습니다. 의대를 지망한 특별한 리유는 없지만 아마도 어렸을 때 의사였던 친척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의사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조국에 돌아와 어엿한 의사가 되였지만 사실 그의 배움의 길은 생각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음 대학입시에서 락방했었습니다. 이듬해에 재수하여 길림의학원에 입학하게 된것입니다.>
권오용씨는 고중시절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그가 대학에 입학해보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한족학생들과의 경쟁에서 락오되지 않기 위해 그는 꾸준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남들보다 휴식을 적게 하고 잠을 적게 자는 한이 있더라고 그는 학업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저의 친척중에 일본에서 류학한 분이 있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일본에 류학가고 싶다는 마음에 대학시절 일본어 공부도 열심히 했었습니다.>
피타는 노력끝에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일어 국제1급 시험에 통과되였다. 훗날에 안 일이지만 그는 길림의학원 50년 사상 처음으로 일어 국제1급시험에 통과된 학생이였다. 이 또한 훗날 그가 일본으로 류학갈수 있었던 밑거름으로 되였다.
그렇게 길림시에서4년간의 학사과정을 마치고 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베쮼의과대학 연구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어엿한 의학박사로
베쮼의과대학에서 연구생과정을 마친 그였지만 솟구쳐오르는 학구열을 주체할수 없었다. 그는 박사과정을 계속하기로 작심했다. 동북지역의 의과대학은 거개가 일본의 여러 대학들과 좋은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구생과정에 알게된 일본교수의 초청으로 그는 결국 일본 남부지역에 위치한 국립대학인 야마구지 대학으로 류학의 길에 올랐다.
<학교에서 학비를 면제해주었기에 저는 큰 생활고를 겪지 않았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돈은 거의 장학금으로 마련하였구요. 많은 류학생들에 비해 저는 비교적 행운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그는 학업에 모든 열정을 쏟을수 있게 되였다. 권오용씨는 일주일에 3,4차 있는 수업시간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냈다. 그의 연구방향은 각막이식분야였다. 동물로부터 추출한 각막세포가 배양을 거친후 어떤 영향을 받게 되고 어떤 단백질을 나타내며 또 어떤 작용이 있게 되는지를 연구하는것은 그의 일상이 되여버렸다. 각막염 치료에는 백혈구의 일종인 중성과립세포가 필수였다. 실험을 위해 그는 매주 한두번씩 자신의 몸에서 피를 뽑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실험자체는 모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의의를 어떻게 대하느냐의 차이가 있을뿐이지요. 실패가 반복될지라도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토대우에서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면 언젠가는 성공할수 있습니다.>
일본 야마구찌대학 박사생 졸업식에서 니시다 테루오 (西田輝夫) 교수와 함께
그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0년, 그는 4년 예정의 박사과정을 3년만에 완성하고 박사학위를 받아안았다. 기타 세명의 일본인 학생과 어깨 나란히 이루어낸 장거였다. 이 뿐만이 아니였다. 그의 졸업론문은 졸업생중 최고점수로 학교의 장려상을 받았을뿐만아니라 미국의 권위적인 의학지인 <백혈구> 전문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졸업식에서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마저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노력의 아이콘
<굳이 저의 장점을 꼽으라면 아마도 무엇이든 꾸준히 노력하는 성미라고 생각됩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조그마한 성적이라고 낼수 있었던것은 누구보다 재능이 뛰여나서가 아니라 끈질긴 노력에서 비롯된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권오용씨는 길림의학원에서 맨 처음으로 일어 국제1급 자격증을 땄을뿐더러 베쮼의과대학 연구생으로 입학한 첫번째 조선족이였다. 그야말로 피타는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싶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 류학시절 그는 일상대화나 자료검색을 하기에는 충분한 일어수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로 되여있는 대부분 자료들을 찾기에 영어실력이 딸린다는 생각이 든 그는 영어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피타는 노력에 힘입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영어수준은 눈에 띄이게 제고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어론문한편을 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과거의 10일에서 20일정도 걸리던데로부터 하루이틀사이에 모두 소화할수 있게 되였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였지만 의학연구를 해오면서 점차 외향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권오용씨이다.
<사실 의학연구에 있어서 지나치게 내성적이여도 지나치게 외성적이여도 안됩니다. 내성적인 성미라면 연구를 절차마다 침착하게 할수 있겠지만 데이터 분석에 있어서는 대담한 예측도 반드시 필요한거거든요. >
하여 의식적으로 마음을 많이 열기에 노력해 왔다는 권오용씨이다.
후회없는 선택-의학연구의 길
하문장경병원 진찰실에서
<의사로서 가장 보람있는 일은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하는것일겁니다. 다들 아시다싶이 안과질병은 생명의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만 정상시력에서 점차 보이지 않는 고통은 아마 겪어보지 않고서는 리해하기가 힘들것입니다.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입에서 시력이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말을 듣는것보다 더 보람찬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긴긴 학업을 마치고 어엿한 의학박사로 성장한 권오용씨지만 오늘날에도 그는 팽이처럼 바삐 돌아친다. 진료나 수술과 같은 일상사무외에도 시간을 짜내여 실험연구를 계속하면서 매년 적어도 한두편의 론문을 발표하고 있는 그는 이미 부교수로 진급했다.
일본 즈구바대학(筑波大学)서 연수시 오오시가 데즈로우(大鹿哲郎) 교수와 함께 수술실에서(왼쪽)
2014년 그는 제36회 일본 사사가와 장학금 수상자로 재차 일본 즈구바대에서 1년간 연수하는 영광을 지녔다. 전국적으로 6명의 장학금 획득자중 그의 성적은 단연 1위였다. 현재 그는 하문시정부로부터 청년의료기금을 지원받아 림상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14년 제36기 사사가와 의학장학금 획득자들과 함께(맨 오른쪽)
2014년 제36기 사사가와 의학장학금 고급방문학자 대표로 발언
돌이켜보면 지난 시간들이 어느정도 힘들었다고 할수는 있겠지만 절대 후회한적은 없다고 말하는 권오용씨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여 부단히 의술을 제고함으로써 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주는것이 의사로서 저의 목표입니다.>
제2의 고향-하문
<좋은 인상을 안고 하문에 오게 되였는데 와보니 환경도 좋고 사람들 인품도 소박하고 의료조건도 훌륭하고 해서 비교적 쉽게 적응할수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에 만나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도 하문시 제1부속병원에서 일하고 있고 또 2년전 하문에서 아들까지 얻게 된 권오용씨는 하문을 제2의 고향으로 부른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매년 음력설때마다 고향을 찾아 부모님을 찾아뵙는다는 권오용씨이다.
한돐을 맞은 아들과 함께 남긴 가족사진
평소 시간날때마다 그는 달리기를 즐긴다. 지난해 하문에서 있은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마라톤을 하면서 머리도 쉬우고 신체단련도 할수 있어 너무 좋다며 환한 웃음을 보이는 권오용 의학박사, 끝없는 노력끝에 어엿한 의사로 머나먼 타향에서 조선족의 자부심을 안고 떳떳하게 살고 있는 그의 인생 마라톤은 이제 금방 시작이다.
글/사진 박민걸/박운 기자 중앙인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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