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생명보험협회에 가입된 국내 생명보험회사는 25개다. 이들 회사에서 일하는 FC(Financial Consultant) 즉 '설계사'는 4월 30일 기준 12만8천511명.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3만3천502명이 삼성생명에 몸담고 있다.
삼성생명은 매달 올리는 실적, 고객관리와 유지 등 10여 가지 기준을 정해놓고, 목표를 달성하는 설계사에게 '보험 판매 명인(名人)'이란 타이틀을 부여한다. 과거에는 '보험왕'이라 칭하며 연도대상 시상식을 치렀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 100여 명이 명인에 반열에 올라있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삼성생명 소하지점에도 명인이 있다. 주인공은 이명화(여·49) 씨. 국내 보험사 가운데 유일무이한 조선족 명인인 그는 2009년부터 8년째 이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소하지점에 오던 첫해인 2009년부터 명인에 올랐어요. 10개월 만에 명인이 됐는데, 당시 연봉은 7천만 원 정도였죠. 이후 승승장구했고, 8년째 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월 8억∼10억 원 규모의 보험을 판매하고 있고요, 고객은 3천 명이 넘습니다. 연봉은 비밀이지만 두 자릿수(수십억대)입니다."
그는 "소하지점에서 함께 일하는 40여 명의 설계사 연봉을 다 합쳐도 제 연봉을 넘지는 못한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그때까지 설계사로 일할 것이고, 끝까지 명인으로 남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주변 설계사들의 시기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까지 이 명인의 삶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아청(阿城)시에서 태어난 그는 상즈(尙志)시에서 성장했다. 상즈체육대학에서 스케이트 선수를 했고, 헤이룽장 성을 대표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육상과 배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89년 조선족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나중에 배워놓으면 써먹을 수 있겠다 싶어 미용 기술을 배웠다. 실제 베이징에 이주했을 때 미용실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됐다. 임신한 뒤 염색 약품이 태아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는 사업을 접은 그는 이후 딸을 낳고는 한국 식당을 열었다.
개방이 되기 전 한국 대기업 관계자들을 상대했기에 장사는 잘됐다. 그러나 부모와 친척들이 사는 한국에 가고 싶어서 식당 문을 닫고서는 나이 서른 살에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경북 경주, 아버지는 헤이룽장 성이 고향이다.
일단 울산으로 건너온 그는 숙모와 슈퍼마켓을 차렸다. 베이징에서 한국 식당을 해 번 돈을 투자한 것이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 됐지만, 주변에 조선족이 많지 않아 외로웠다. 그래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강남의 선릉에 둥지를 튼 그는 부산방직에 근무하는 4촌 오빠의 도움으로 '애리'라는 옷가게를 열었다. 사업 수완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렇다고 돈을 못 번 것은 아니었다.
"큰돈은 못 벌어도 딸 아이 학교 보내고, 남부럽지 않게 뒷받침할 정도의 돈은 만졌죠. 하지만 목욕탕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사고로 옷가게도 문을 닫았습니다. 다리 수술을 두 번이나 해 1년 반 정도 휠체어에 의지했고, 이후에도 목발을 짚고, 보조기를 차고 다녔죠. 4년 정도 꼼짝을 못했습니다. 바깥 출입도 어려운 평범한 주부로 살았던 것이죠."
당시 보험을 들어놨었기에 수술비용이나 생활비 등을 충당할 수 있었다. 또 병원에 있을 때 보험사 설계사들이 병문안을 오는 것을 보고는 '참 좋은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했고, 건강이 좋아져 걸을 수만 있다면 설계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설계사들의 출발이 대개 그렇듯 이 명인도 2003년 '시험만 한번 봐 달라'는 친한 언니의 부탁에 거절 못 하고 시험을 봤다가 '코가 꿰인' 케이스다. 종로에 있는 삼성전용 대리점에 자신의 코드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설계사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만 사무실에 나갔다.
"그때도 실적은 나쁘지 않았어요. 연간 3천만∼4천만 원 정도는 벌었으니까요.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니 보험 사고가 터졌죠. 한데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보니 사고 수습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고는 소하지점을 찾아가 교육을 다시 받았습니다."
교육 이수 후에는 무서운 상승세로 기록을 달성했다. 보험 수혜자였기에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그는 첫째도 둘째도 성실함을 내세우는 영업으로 고객들에게 믿음을 줬다.
"내 계약처럼 설계를 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아무리 명품이라도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죠. 바로 맞춤형 설계가 필요합니다. 열심히 뛰면 고객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영업의 비결이죠. 고객관리요? 저는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고객이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기에 성실히,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성실함으로 월 납입보험료 1천만 원이 넘는 VIP 고객을 100명 정도 유치했다.
이 명인의 계약은 80%가 소개로 이뤄진다. '성실히' 해주기 때문에 고객이 고객을 연결해 준다고 믿고 있다.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부산, 제주까지 전국에 걸쳐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고객이 이 명인을 직접 찾아와 상담하고 계약을 한다. 희한한 현상이다. 지점에서는 "저렇게 배짱영업하는 설계사는 이명화밖에 없다"고 부러워한다.
그가 지방에 있는 고객을 소하지점까지 부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 부산까지 달려가면 꼬박 하루를 허비하기 때문이다. 대신 고객이 찾아오면 모든 경비를 그가 지불하고, 더 성실히 상담에 임한다.
그는 연봉의 30%를 고객을 위해 재투자한다. 고객에게 맞게 사후관리를 해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가끔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진상 고객'도 있지만 될 수 있으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보험 영업의 가장 큰 보람이란 고객으로부터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란다.
"지린(吉林) 시 출신의 조선족 고객을 소개받아 계약한 적이 있었어요. 보험금 납입이 1년이 채 안 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죠. 아내가 간암 진단을 받았다고요. 병 문안 갔다가 노인 두 분만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죠. 자식들한테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더라고요. 아저씨는 수입이 딱 끊겨 생활은 말이 아니었어요. 아저씨는 엉엉 울면서 보험금 낼 걱정을 했죠. 그런데 앞으로 보험금은 안 내도 되고, 치료도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말했더니 아저씨는 저를 은인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힘이 절로 난답니다."
명인에게는 여러 혜택도 주어진다. 특히 여행갈 기회가 많다. 이 명인도 수도 없이 여행을 갔다 왔다. 올해에만 일본, 베트남, 유럽 9개국, 태국을 다녀왔다. 매년 6∼7차례 해외여행의 특전이 생긴다.
명인에 오르면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다. 그러나 이 명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움직이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개인 사정상 계약을 파기할 때, 말도 안 되는 얘기로 괴롭힐 때 설계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더 단단히 다진다.
3천 명이 넘는 고객 가운데 조선족은 40% 정도다. 그는 올해 들어 2월부터 팀을 새로 짰다. 6월 현재 4개월 만에 13명을 증원했다. 당연히 최우수 지점으로 선정됐다.
"취미가 사람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목표가 하나 있다. "조선족이 진짜 똑똑한데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조선족으로만 구성된 영업 지점을 꾸려 보고 싶은 포부다. 삼성생명뿐만 아니라 국내 전체 보험업계에서 처음 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이 명인은 바쁜 틈을 내서 조선족 CEO 여성 100여 명이 중심이 된 'CK 여성위원회'에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매월 봉사활동을 통해 조선족의 이미지를 바꾸는 일에도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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