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재한조선족성공시대> ⑧ 한의·중의 접목 노현숙 한의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8월8일 10시05분    조회:764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노현숙
조선족 출신 한의사 1호, "중국 임상경험이 진료에 도움"
침술의 대가로 환자 차트 6만개…"보약보다 치료에 집중"
안산시 우수납세자…소득 질문엔 "연간 세금 1억원 납부"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경기도 안산시에 척추·관절·불임·소아과 진료로 명성을 날리는 조선족 한의사가 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린다는 노현숙한의원의 원장인 노현숙(50) 씨가 그 주인공. 조선족 출신으로는 국내 한의사 자격을 처음으로 취득한 인물이다. 기자가 찾아간 6일은 토요일인데도 환자로 북적거렸다. 한의원에 있을 때는 환자에만 집중하려고 휴대폰도 꺼놓고 일절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기에 진료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려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 번째 질문으로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가 몇 명이냐를 택했다. 환자 숫자로 명성을 가늠해볼 요량이었다.

노 원장은 "환자 중에 조선족이나 한족은 15%가 안 되며, 나머지 대부분은 치료를 받았던 조선족의 소개나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조선족 3세로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아청(阿城)시 해동촌 출신인 노 원장은 "중학교 2학년 때 유행성출혈열로 아버지를 잃고서 병을 고치는 의사가 결심했다"며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했던 지난 시절을 들려줬다.

어릴 적 살던 해동촌은 전기도 잘 안 들어오던 깡촌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학생조차 별로 없던 마을이다. 그런 곳에서 대학 진학을 꿈꾸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 덕분에 줄곧 우등을 놓치지 않았고 1985년 하얼빈 중의대에 합격했다.

"동네에서 잔치가 벌어졌죠. 처음 대학 합격자가 나왔는데 그것도 시 단위에서 한 명 정도 뽑는 의대생이 됐다고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의사는 굉장히 존경받는 직업이거든요."

노 원장은 중국 전통의학인 중의과 졸업 후 아성 시립병원에서 5년간 의사로 근무했다. 아청시 소수민족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조선족 돕기에도 앞장섰던 그는 1996년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이주했다.

중국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의사로 살다가 기득권을 버리고 한국에 온 이유를 그는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를 잊지 말고 꼭 찾아가 보라던 선친의 당부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일제 강점기에 조부모와 함께 만주로 이주한 선친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죠. 언젠가는 돌아가겠다는 마음이어서 경상도 말과 생활습관을 지키고 사셨어요. 그래서 1990년 의사로 발령을 받자마자 족보를 들고 선친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조부모가 살던 집도 그대로 남아있었고 친척분들도 만났죠. 어찌나 반겨주시던지 3개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때 고국의 따스함과 고향의 정을 흠뻑 느꼈기에 남편을 만났을 때 한국행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취득한 소아전문의 겸 침구의사 자격이 한국에서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른 살에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1997년 연세대 의대와 세명대 한의대에 동시 합격했는데 경험도 살리고 고국의 한의학도 배워보고 싶어 세명대를 선택했다.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전공 위주로 가르치는 중국과 달리 교양도 익혀야 했고 교육환경도 달랐다. 띠동갑인 어린 학생들과의 경쟁도 만만치 않았기에 공부에만 매달렸다.

"6년간 수업 외에 유일하게 참여한 학과 행사가 졸업여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온 간첩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죠(웃음). 동기들에게 중국어와 한자를 가르치면서 친해졌고 교수님도 중국에서 의사로 지낸 경력을 존중해주어서 힘이 됐습니다."

노현숙 한의원의 한의사와 간호사

 

2003년 졸업과 동시에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그는 남편의 고향인 안산에 한의원을 개원했고, 공부도 계속 이어가서 2008년에는 세명대에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노 원장은 "병원 문을 연 이래로 가장 신경 쓴 것이 환자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라며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우선이란 생각에 공부를 계속했고 지금도 학회 세미나 등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고 했다.

한의원이 돈을 버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보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병원에는 치료를 위해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노 원장은 약 제조를 위해 밤늦게까지 약재실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한의사들이 모여 침술을 연구하는 도침학회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침을 잘 놓는 한의사로도 유명하다. 환자의 90%가 침 맞으러 올 정도란다. 그가 사용하는 침술은 체침·평형침·섬유침·도침·약침 등 5가지다.

"침을 놓는 방법은 20여 가지가 넘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죠. 도침학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한의사들이 모여 침술에 대한 경험과 의견을 나눕니다. 환자의 상태와 체질에 따라 침술을 달리할 필요도 있거든요."

그는 대한여한의사회와 경기도한의사협회 이사로 국내와 해외 의료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안산시한의사협회 부회장으로 10년간 지역에서 다문화가정과 경로당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 진료 봉사를 펼치기도 했다.

한의원을 찾는 환자 중에 형편이 어려운 이에게는 치료비를 덜 받기도 한다. 중국에서 의사로 재직할 때 환자의 재정을 고려해 치료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사람이 먼저'란 생각이 배어 있어서다.

"침놓는 값을 아예 저렴하게 받았더니 다른 한의원에서 고발이 들어오더라고요. 선의로 하는 일이라도 업계가 정한 룰을 지키는 게 더불어 사는 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할인제도를 도입해서 환자 부담을 줄여드리고 있습니다."

노현숙 원장이 건강을 위한 생활속 실천법인 양생법(養生法) 전문가를 초청해 환자들에게 자기 몸 관리법을 전하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인맥을 활용해 중의 전문의를 자비로 초청해 한의사를 대상으로 강연회를 종종 열고 있다. 중의학과 한의학 간 교류가 의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중국은 전통의학에 대한 투자가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국립중의과학원의 연구원이 4천700여 명인 데다 중의 병원만도 3천600여 개 있어서 연구와 임상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죠. 과거처럼 무시하지 말고 중국의 앞선 부분은 우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의학이 발전할수록 그 혜택은 국민이 누리는거니까요."

한국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는데 제일 어려운 점을 묻자 그는 "중국과 달리 환자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경영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한의원에는 본인을 포함해 부원장과 간호사 8명 등 10명이 근무하고 있다. 노 원장은 "급여를 주고 약재를 사들이고 수시로 인테리어를 손보는 등 할 일이 많지만 책임감도 느껴지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며 활짝 웃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운영한다는 노 원장은 지난해 안산세무서 명예 민원봉사실장에 위촉됐고 지난 3월에는 안산시 우수납세자로 선정돼 표창을 받기도 했다. 본인 몫으로 가져가는 수익이 얼마냐는 질문에 그는 "소득세 등 납부하는 세금이 연간 1억 원 정도"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은퇴할 때까지 10만 명 이상 환자를 돌볼 계획이라는 노 원장은 자신을 받아준 한국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려고 지난해부터 체질에 따른 침법을 알리는 책을 쓰고 있다. 노 원장은 이 책에서 한중 양국에서 의술을 펼치며 쌓은 경험뿐만 아니라 중국 침술의 최신 동향도 소개할 작정이다.

"인생의 전반기 30년은 중국에서 보냈고 한국생활도 2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양국에서 의사로 살면서 존중받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으니 보답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앞으로는 중의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서로 교류하는 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재외동포 출신 첫 임원…"관심·애정·사랑을 보여줘야" "재외동포 대변하고, 올인할 수 있는 상황 만들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김영근(59)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의 이름 앞에는 '재외동포 출신'이라는 이력이 붙는다. 경기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 2015-12-05
  • “음악외 다른 진로를 생각해본적 없어요!” 연변군중예술관에서 독창가수, 사회자, 민요지도일군으로 활약하고있는 전예정씨, 1일 그녀를 만났다. 어려서부터 꿈이 가수였던 그녀는 지금까지 한번도 다른 진로를 생각해본적이 없다. 비록 자신의 “직업”(?)이 힘들 때도 있지만 “힘들면 그 고비...
  • 2015-12-04
  • 목포 출신 어머니가 평양으로 시집을 갔다. 아버지는 남다른 주먹을 휘둘렸다고 한다. 그 부모님이 헤리룽장성에서 중국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고 본인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자라나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그는 공부만이 살 길이라 독려한 어머님 덕에 지금은 조선족 계열중 가장 성공한 CEO로 거듭나고 있...
  • 2015-12-03
  •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 북경에서 개최    (흑룡강신문=하얼빈) 11월 27일 중국사회과학원 박건일교수의 "내가 알고있는 한락연" 좌담회가 북경에서 개최되였다. 민족출판사 사장 우빈희, 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리춘일, 룡정한락연연구회 박호만 회장, 연변대학 북경학우회독서회, 북경애심녀성...
  • 2015-12-02
  • 국내 70%의 영화제작사, 발행사가 운집해있는 북경,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화제작기지인 북경에는 해마다 수많은 영화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그중 박준희감독(61세)은 흔하지 않은 조선족이다. 지난 10월말, 북경 향산에서 야외촬영지 사전답사를 끝마치고 돌아온 박준희감독을 저녁 늦게 만날수 있었다. 반갑게 손을 ...
  • 2015-12-02
  • 사무실에서 취재를 받고 있는 박규주 총경리 칭다오부원전자 박규주 총경리 일가견   (흑룡강신문=하얼빈) 장학규 특약기자=칭다오부원전자유한공사 박규주 총경리는 일견에도 성격이 시원시원해보였다. 둥글넙죽한 얼굴에는 지성미가 다분히 풍겼으며 스스럼 없는 어조에는 항상 유머감각이 슴배어있었다.   칭다오 방...
  • 2015-11-27
  •   “올해는 왕년에 비해 여러번 고향을 찾게 되네요. 얼마전 훈춘 방천에서도 공연이 있었구요.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듯 해요. 어디에 가든지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들구요.”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 참가차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된 김미아씨, 음악회 참가는 마...
  • 2015-11-27
  •   메조소프라노 최경해(녀)는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에서 가장 나어린 배우이다. 그녀는 지난해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중앙가극원에 합격되였다. 이번 음악회는 스승인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의 림정교수와 중앙가극원 공연부 리영태주임의 추천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음악회에서 최경해는 “까...
  • 2015-11-27
  • 젊은 나이에는 미국에서 장애인교육학전공의 가난한 류학생으로 불리웠고 그후에는 고아 5명을 입양하여 자식을 마음으로 낳은 박사라 불리웠다. 그리고 또 한때에는 대전 한성대학교를 설립한 초대총장으...
  • 2015-11-26
  • 지난 11월 초, 중국 조선족 처음으로 한국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된 “사단법인 GK희망공동체” 허을진 대표를연길에서 만났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허을진이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된데는 조선족을 위한 그의 사심없는 로고와 한국사회에서의 역할이 뚜렷했기때문이였다. 허을진은 안도...
  • 2015-11-26
‹처음  이전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