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식 사장 기자가 광주시 조선족 취재에서 김종식 사장을 알선 받게 된것은, 광주에 발을 들여놓은지 20여년이라는 오랜 경력을 갖고 있는 김 사장이 광주시 조선족사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였다. 김종식 씨가 광주를 찾은 건 지난 90년대 중반이였다. 당시 광주시는 도약식 발전을 거듭하는 황금시기에 처해 있었다. 개혁개방 정책과 세수특혜정책, 그리고 대량의 향항 대만 외국 업체들이 광주, 동완 등 지에 잇따라 공장을 세우면서 광주에는 돈벌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이는 피 끓는 30대 사나이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부여하는 “기회의 땅’이였다. 할빈 석산림 공장에서 일하다가 진황도에도 있어본 김종식 씨는 나중에 광주시에 정착하기로 맘먹었다. 김종식 씨에 따르면 그때 당시 광주에서 조선족을 찾아 보기가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어쩌다 보게 되면 타향에서 오랜 친구를 만나듯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광주 조선족들은 주로 LG, 삼성, 대우 등 한국회사에 근무하는 출근족들이 위주였다. 그러다 2000년후부터 조선족들이 많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의류나 신발, 가방, 시계 도매업종에 종사하면서 기회의 땅인 광주시에서 재부를 축적하며 차츰 발붙이기 시작하였다. 하여 지금은 광주시에만 해도 조선족이 2-3만명 살고 있다고 한다. [성공적인 첫 창업] 광주는 “미식객의 천당”으로 불릴만큼 전국 각지의 음식을 맛볼수 있을뿐만아니라 세계각국의 특색료리도 맛볼수 있을 만큼 요식업이 발달하였다. 그만큼 현지 광주인들이 료리에 대한 애착과 수용성이 넓다는 것을 알수 있다. 김종식 씨가 첫 창업항목으로 잡은것도 바로 요식업이였다.995년 음식점들이 많이 밀집된 가방도매 시장근처에 그는 40평방메터의 자그마한 한식점을 오픈했다. 식당 이름은 “고려식당”. 현지에 근사한 우리민족 음식점이 없고 “식객의 천당”으로 불리우는 광주시에 우리민족의 전통료리를 알리고 싶은 소박한 생각이 전부였다. 오픈 당시에는 현지 한국 회사 직원들이 주요 고객층을 이루었고 동북에서 온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후에는 현지인들도 차츰 우리민족 음식 맛을 알아주면서 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이런 호재를 빌어 개업 5년만에 김종식 씨는 식당 규모를 800평방메터로 크게 확대하였다. 그렇게 식당은 11년간 운영하다가 안해가 너무 힘겨워 하는것 같아 접어버렸다. 한창 잘되는 식당을 단지 안해가 힘들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접어버린 김종식 씨, 그에게는 항상 가족이 우선이 였기 때문이다. 식당 일을 그만두고 나니 안해가 많이 젊어졌다며 김종식 씨는 유머 조로 말했다.
광주 한국거리를 소개하는 김사장 [사회에 대한 환원] 김종식 씨는 가정을 중요시하는 가장일뿐만아니라 사회적 책임감과 민족 애착심이 강한 사나이다. 당시 식당이 일정하게 자리를 잡아가자 김종식 씨는 광주시에 있는 조선족들을 위해 뭔가 의의있는 일을 해야 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읜 김종식 씨는 홀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의 안위가 항상 맘에 걸렸는데 그나마 어머니가 고향 로인협회에 다니면서 만년을 외롭지 않고 즐겁게 보낼수 있는것이 큰 위로가 되였다. 여기서 계발을 받은 김종식 씨는 자녀들을 따라 광주에 남하한 어르신들을 위해 로인협회를 설립해주면 좋지 않을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객지에 살고있는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활약적인 조직이 바로 로인협회가 아닌가? 근데 수만명을 헤아리는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광주시에 로인협회가 없다니?... 생각이 점차 성숙되자 그는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는 광주시에 있는 몇몇 조선족들을 자기식당에 불러 광주시 조선족 로인협회를 설립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보았다. 근데 의외로 그의 제안은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불필요한 제안이라는 푸대접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번 먹은 마음을 쉽사리 굽힐 그가 아니였다. 김종식 씨는 “협회 설립의 중요성이라든가 의의, 앞으로 협회를 통해 할수 있는 일들”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입이 닳도록 설득하였다. 근1년간의 노력 끝에 2012년 5월 27일 광주시 조선족로인협회가 드디여 고고성을 울리며 설립식을 가졌고 광주시 조선족 어르신들도 향수의 정을 달래는 “마음의 안식처”, 즐거운 만년을 보낼수 있는 “행복의 보금자리”가 있게 되였다. 협회 설립식을 하고 나니 그제야 김종식 씨는 마음이 후련해졌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하는가는 걱정이 또 큰 압력으로 다가왔다. 하여 그는 주변의 친구들한테 “물질적뿐만아니라 정식적으로 로인협회를 많이 지지하고 관심해줄것”을 간곡히 당부하군 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은 “너는 이젠 로인이 다 됐구나”하며 진담 반 롱담 반으로 얘기하면서도 친구의 견지와 노력에 탐복돼 로인협회를 물심량면으로 지원해 나섰다. 로인들의 건강관리에 편리를 주기 위해 건강검진 의료팀을 로인 활동실에까지 청해오고, 로인들의 활동장소에 경찰들이 찾아와 분쟁이 생기면 맨먼저 달려가 보증 서주고 해결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바로 김종식 씨이다. 때론 개인사정 때문에 오래동안 어르신들을 찾아뵈지 못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안부전화를 걸어야 비로소 시름놓을수 있을 만큼 로인협회 어르신들은 이미 김종식 씨의 부모와도 같은 존재가 되여 버렸다. [이제 겨우 시작일뿐] 만사는 시작이 절반이다. 김종식 씨는 로인협회 설립을 계기로 앞으로 로인을 존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해 나가고 젊은세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또한 광주시에 오래 정착해온 선배로서 이곳을 찾는 조선족 후배들에게 기반을 마련해주고 광주에 있는 조선족들을 더 잘 묶어세워 민족의 응집력을 키우는 일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개인회사 경영이 뒤전이 되고 만다. 하지만 김종식 사장은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저 생활에 큰 지장없이 필요한 만큼 벌면 됩니다.”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 치고 조금은 욕심 없는 사람으로 보일수 있다. 하물며 주변에서도 “너 바보가 아니냐?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끄고 자기 하는 사업에나 몰두해라”며 권장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래도 항상 그를 곁에서 지켜주고 지지해준 안해가 남편의 생각을 전적으로 밀어주고 힘을 보태주니 하는 일이 즐겁고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오붓한 가족 취재를 마치며 김종식 씨는 “저는 아무것도 자랑할것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저 대신에 훌륭한 분들을 많이 선전해주세요. 그저 앞으로 광주시 조선족사회에 대해 알고 싶거나 묻고 싶은게 있으면 저를 찾아주세요.” 라며 겸손하게 웃어 보였다. 참으로 인품이 돋보이는 분이였고 내심 존경스러 웠다. 김종식 씨와 같이 우리민족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하여 광주시 조선족사회 앞날이 더욱 밝아 보였다. 중앙인민방송국 전금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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